현대 예술로서 서커스를 이야기하다
서커스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축제를 기다리며오늘날 서커스 현장을 만들어가고 있는 이들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서울서커스페스티벌의 질문
서커스는 몸을 괴롭혀 얻은 극단적 신체의 기술, 즉 기예의 예술이다. 하지만 인체 유연성을 강조해 결국 일종의 신체 왜곡처럼 보이는 ‘컨토션contortion’이라는 서커스의 경이로운 기술은 여러 번 보면 흥미가 떨어진다. 그래서 최근 서커스 예술가들은 첨단 기술과 결합한 엔터테인먼트 쇼를 만들거나 무용·연극·미술 등 순수예술과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서커스 예술 작품을 만들어 오늘, 즉 현대의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최신 경향을 우리는 컨템퍼러리 서커스 또는 현대 서커스라 부르는데, 현대적이라는 의미의 ‘컨템퍼러리’란 현재 사회가 나타내는 특유한 성격이나 성질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동시대성이라고도 불린다. 광대와 동물, 신체 변형된 사람 등 신기한 것들을 나열해 보여주던 근대 서커스의 형식에서 벗어나, 이 장르가 낡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라는 인식 변화를 이끄는 현대 서커스는 신체 숙련을 통한 미적 감각을 전달하는 예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오랜 시간 다양한 예술 장르와 결합해 그 영역을 넓히며 진화한 현대 서커스는 최근 한국 공연예술계로도 확산하고 있다. 서커스 예술을 하나의 장르로 확장하고 그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2018년 시작한 서울문화재단의 서울서커스페스티벌은 지난 7년간 121편 공연을 발표하고 20만 명이 관람한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서커스 예술축제이며, 서커스 공연 플랫폼이다.
서울서커스페스티벌이 생겨난 후 서커스 공연은 전국 축제로 확산하고 있다. 서커스는 최근 거리예술의 주된 경향이기도 하다. 관객의 집중 시간이 길지 않은 거리극의 특성상 짧고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서커스 공연이 이에 적합하고 특히 ‘에어리얼’이라 불리는 공중 퍼포먼스는 시야 제한 없이 많은 관객이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서커스를 향한 관심과 지원이 확산되면서 동춘서커스나 ‘서커스 1세대’로 불리는 안재근 곡예사 등 근대 서커스의 뿌리가 된 공연자에도 관심이 커지고 있다. 동시에 서커스 기예를 무용이나 연극과 결합해 새로운 공연예술로 확장해 활동하는 현대 서커스 단체의 기량도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 하지만 서커스 콘텐츠에 따라 빅 탑이나 서커스 텐트, 혹은 극장과 야외를 오가며 그 다양성이 확보된 해외의 현대 서커스와 달리 한국의 현대 서커스는 주로 거리예술축제에서 대부분 작품을 선보이는 실정이다.
그러한 아쉬움을 해소하기 위해 서울서커스페스티벌은 2024년부터 노들섬 내 극장인 라이브하우스에 실내 서커스 공연을 유치하면서 서커스가 거리예술의 하위 장르가 아니라 실내외 어디로든 확장될 수 있는 고유한 현대예술임을 강조하고 있다. 폭넓은 관객을 수용하고자 공연장에서의 서커스 공연 콘텐츠도 안정적으로 제작될 수 있는 환경이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담았다.
눈에 보이는 기예보다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동작에 인간의 감정을 담아내는 현대 서커스는 새로운 관객의 새로운 취향을 만족시켜주고 있다. 우리의 서커스는 과연 현대적인가? 궁금한 관객이라면 가장 현대적인 서커스의 이야기를 축제 형식으로 보여주는 서울서커스페스티벌이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자 답이 되어줄 것이다.
2022년 여름, 유럽을 대표하는 공연예술 전문지 중 하나인 『테아터 데어 차이트Theater der Zeit』에서는 ‘변화하는 서커스: 컨템퍼러리 서커스Circus in flux : Contemporary Circus’라는 제목의 특집호를 발행한 바 있다. 컨템퍼러리 서커스에 관한 인터뷰와 기사·학술논문 등 17편의 글로 구성된 이 책은 서문에서부터 그동안 공연예술 장르로 조명되지 못한 서커스에 관한 동시대적 고찰을 담아내고 있다. 서커스의 재발견이라고도 할 수 있을 법한 이 시도는 무엇보다도 서커스가 대중의 여흥을 위한 소비재로서의 기능을 넘어서서 오늘날의 사회를 반영하는 예술 장르로 변화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서커스는 기예의 완결성에서 비롯된 스펙터클을 특징으로 삼는 전통 서커스 형식을 넘어서 콘셉트 중심의 창작 언어로 확장돼가고 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1990년대 중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소위 ‘컨템퍼러리 서커스’라 불리는 새로운 다학제적 경향이 공연예술계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가속화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오랜 기간 관람 대상에 머물러 있던 서커스는 점차 관객의 ‘읽기’를 추동하는 텍스트로서 거듭나게 됐다. 관객 저마다의 경험과 관점, 기억 등을 매개로 ‘서커스를 읽는다는 것Reading Circus’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커스 작품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읽어낼 수 있나? 만약 성공하는 서커스 혹은 도약하는 서커스가 아닌, 실패로 점철된 서커스 혹은 정지하는 서커스와 마주한다면, 우리는 이런 새로운 양상의 서커스에 대해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
최근 유럽을 중심으로 대두되고 있는 서커스학Circus Studies 연구는 이처럼 서커스에 내재하는 텍스트로서의 해석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는 실제 예술 현장에서부터 시작된 서커스의 변화가 관련 학문의 발전을 불러온 경우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 독일의 프란치스카 트라프Franziska Trapp를 비롯한 다수의 서커스학 연구자들은 이론과 실제 현장을 매개하는 방식의 연구를 활발히 수행하고 있다.
한편, 창작에 주안점을 둔 컨템퍼러리 서커스는 2015년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가 개관한 이래 국내에서도 그 저변을 빠르게 넓혀가고 있다. 해외와 다르게 서커스 전문 교육기관이 부재한 국내의 경우 서커스 예술가 가운데 대다수가 연극·무용·시각예술·영상 등 타 예술 장르에서 유입됐다는 특징을 보이는데, 그로 인해 서커스신scene 내부적으로 창작의 다양성이 비교적 빠르게 전파될 수 있었다. 이들이 서커스 기예에 앞서 오랜 기간 쌓아온 언어와 움직임에 대한 경험은 기예 구성과 장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작품에 독창성을 부여해온 것이다.
이처럼 서커스로 대표되는 동시대 공연예술의 한 흐름을 좀 더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필자는 2023년부터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한국 컨템포러리 서커스 연구’라는 제목의 학술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컬렉티브 방식의 서커스 현장 리서치 또한 이어나가고 있다. 그 과정 안에서 서커스 창작 현장과 이론을 매개하는 연구를 ‘실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서커스가 갖는 동시대 예술로서의 의미를 탐색하는 한편, 국내 공연예술학 연구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올해도 다양한 축제를 준비하며 우리는 익숙한 질문과 다시 마주한다. “전통 연희의 매력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어떻게 잘 풀어낼까?”, “2025 서울서커스페스티벌 무대에서는 전통이 어떤 방식으로 꽃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우리가 이어가고자 하는 연희의 맥락을 지키면서 오늘의 무대 위에서 그것을 어떻게 살아 숨 쉬게 할 수 있을지를 향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연희는 본래 ‘움직임의 예술’로 길 위와 마당 위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며 살아왔다. 사자춤, 줄타기, 탈춤, 풍물놀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흐르며 공동체의 숨결을 타고 몸짓과 가락, 리듬으로 이야기를 전했다. 그것은 예술이자 의례였고, 놀이이자 삶이었다.
서커스 또한 몸으로 말한다. 놀라움과 긴장, 웃음을 유발하며 관객을 끌어당긴다. 전통 기예는 공동체와의 연결을 중시하며 관객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그 의미를 확장한다. 반면 서커스는 시각적 경이로움과 기술적 도전을 통해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또한 연희는 마당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함께 어우러지고, 서커스는 독립된 공간에서 쇼 연출의 정교한 세계를 펼쳐왔다. 형식과 문화적 배경은 다르지만, 두 장르 모두 움직임을 중심에 두고 관객의 몰입을 끌어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아라한의 초기작 <대단한 놀이판: 오늘의 광대>2018에서는 전통예술 전공자와 서커스 아티스트가 협업을 이뤘다. 관객의 반응은 뜨거웠지만, 창작자로서는 전통음악의 리듬과 서커스 기예의 호흡이 조화를 이루지 못해 한 무대 안에서 따로 노는 듯한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시각적 오락성이 강조되면서 전통은 오히려 부차적으로 비치기도 했다.
첫 발표 이후 작품을 지속적으로 개편해나갔다. 재담의 웃음 구조를 분석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대본을 재구성했다. 관객 참여를 유도해 수동적 관람 형태에서 벗어나고, 전국 각지의 농악 가락을 수집해 지역 고유의 리듬과 생동감을 담아냈다. 그렇게 모인 가락들은 각 지역의 특색을 품은 새로운 음악적 질감을 만들어냈고, 전통 기예는 그 흐름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그렇게 <대단한 놀이판: 오늘의 광대>는 해마다 새롭게 탈바꿈하며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고, 2026년에는 시즌 2를 발표할 예정이다.
처음 이 원고를 쓰면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전통 연희와 서커스가 하나의 새로운 공연 장르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였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직 진행 중이다. 관객도, 창작자도 그 가능성을 함께 실험하는 중이다. 이 길의 끝에는 두 장르의 단순한 결합을 넘어, 우리만의 움직임과 리듬으로 빚어낸 새로운 공연 형식으로 이어지리라는 희망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단순히 전통을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체성을 오늘의 무대 위에 다시 호흡하게 하는 일이다. 전통을 보존하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가려는 시도, 그리고 서울서커스페스티벌은 그 여정을 함께 만들어가는 무대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