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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10월호

고전과 파격의 치명적 조우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스페인 배경의 프랑스 오페라 <카르멘>은 태생부터 추문과 찬사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리고 오늘날, 고전과 파격을 아우르는 이 오페라는 그 자체로 명작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상상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쿠바풍 분위기를 한껏 살린 오스트레일리아 오페라 <카르멘>(2018)
ⓒPrudence Upton/Opera Australia

19세기 스페인의 이미지는 대체로 프랑스 소설가들에 의해 구축됐다. 오페라로 만들어진 것만 꼽아도 빅토르 위고의 ‘에르나니’와 ‘뤼 블라스’, 카시미르 들라비뉴의 ‘시드의 딸’,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카르멘’ 등이 있다. 프랑스에 스페인풍이 유행하면서 19세기 중반에는 파리 등 큰 도시의 카페에 플라멩코 춤과 스페인 기타가 자리 잡았고, 19세기 후반에는 투우사, 밝은 태양, 열정, 도도한 여인, 뻐기는 이달고(하급 귀족), 도발적인 집시 등이 스페인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베르디의 1853년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2막 2장에는 코르티잔의 파티에 집시와 투우사가 눈요기 공연을 펼치는 장면이 포함돼 있다. 당시 프랑스에 유행한 스페인 문화를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프랑스인의 문화적 지향점은 호사의 극치, 즉 루이 14세 시대의 베르사유 궁정문화였다. 프렌치 고급 레스토랑은 국왕의 식탁에 오르던 고급 요리를 모방했고, 프랑스 앤티크 가구는 베르사유 스타일이어야 했다. 발레 무용수들이 온갖 예법을 다해 인사하는 것도 발레를 보호한 18세기 프랑스 왕실에 최상의 예의를 바치던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초연 당시 포스터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은 스페인풍의 유행을 반영했지만, 그 바람에 고급문화 전통에서 완전히 비켜났다. 그래서 1875년 3월 초연 당시부터 무자비한 혹평을 받았다. 3개월 후 겨우 37세 나이에 세상을 뜬 비제의 사인 또한 그 때문이란 소문이 돌 정도였다. 당시 한 평론가는 1막의 담배공장 여공들에 대해 “지옥에서 쏟아져 나온 여자들이여, 저주받아라!”라고 독설을 퍼부었다니 작곡가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는가! 그러나 결국 프랑스 오페라의 대표작으로 남았고, 그 인기 덕분에 프랑스 오페라도 이탈리아·독일 다음가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재조명된 ‘오페라 코미크’의 걸작
19세기 프랑스 오페라는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18세기 궁정 오페라의 전통을 잇는 화려하고 웅장한 그랑 오페라grand opera는 귀족과 부자를 위한 공연물이었고, 오페라 코미크opera comique는 서민에게 개방된 대중 장르였다. 19세기 후반에 새롭게 전성기를 맞은 것이 프랑스 특유의 세련된 서정성이 강조된 오페라 리리크opera lyrique요. 그와 정반대로 철저한 오락성으로 무장한 오페레타operetta는 오늘날의 뮤지컬 비슷한 역할을 했다. <카르멘>은 이 중 어디에 해당할까?

<카르멘>은 처음부터 사치스러운 궁정문화의 전통과는 거리가 있었다.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의뢰로 작곡됐기 때문이다. 이 극장은 이름 그대로 ‘오페라 코미크’를 공연했는데, 여기서 ‘코미크’란 ‘희극적’이란 의미와는 좀 다르다. 프랑스어 ‘코메디comedie’는 희극이기에 앞서 연극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오페라 코미크는 ‘연극적 대사를 사용하는 오페라’란 뜻이다. 그랑 오페라와 달리 레치타티보를 사용하지 않아 고급스럽지는 못한 오페라로 간주됐고, 그 탓에 소극笑劇을 다룬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웃기는 내용이라고 못 박을 수 없다. <카르멘>은 비극으로 끝나는 내용임에도 오페라 코미크 형태로 초연됐다.

오페라 코미크인데도 혹독한 비평을 당한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서유럽 사람들이 천박한 하류층이라고 멸시한 집시여인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오페라로는 부적절하다고 여긴 사실이 가장 컸을 것이다. 게다가 극의 막판에 무대 위에서 칼부림이 일어난다는 것이 부정적 인상을 증폭시켰다. 초연 실패에 이어 비제마저 세상을 떠나자, 친구 에르네스트 기로는 대사 대신 레치타티보recitativo를 입혀 오페라 리리크처럼 바꿨다. 조금이라도 진지한 면을 더하고자 한 것이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 후 변화를 갈구한 관객의 취향은 이를 받아들였고, 지금은 대사를 사용한 오페라 코미크로도, 레치타티보가 붙은 오페라 리리크로도 공연된다.

천대받던 팜파탈의 재발견
<카르멘>을 본 러시아의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너무나 큰 감명을 받아 후원자 폰 메크 부인에게 흥분 가득한 편지를 썼다. 작곡가 만년의 산물인 오페라 <스페이드 퀸> 개시부에 <카르멘>과 흡사하게 어린이들의 병정놀이 행진을 집어넣었다. 독일의 요하네스 브람스도 이 오페라에 매혹됐고, 철학자 니체는 한때 심취했던 바그너에 등을 돌리고 라틴적인 <카르멘> 예찬론자가 된다. 이런 천재들이 진가를 알아본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카르멘이 뿜어낸 팜파탈femme fatale의 매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악녀’로 번역해야 마땅한 팜파탈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금기를 통렬하게 깼다는 점이다. 악녀를 매력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일종의 터부였지만, <카르멘>에서는 팜파탈을 벌 받아야 할 여자가 아닌 희소한 매력이 있는 여자로 보았다. 절세 미녀가 아니더라도 자기중심적이고 자유분방한 가치관을 따르고 있으며, 남자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지배하려는 당당한 여인으로 말이다. 이후 프랑스 오페라로 생상스의 <삼손과 델릴라>, 마스네의 <마농>, <타이스>, 독일 오페라로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베르크의 <룰루>가 나왔으니 <카르멘>은 근대적 팜파탈 오페라의 선구라 하겠다.

카리스토 비에이토의 연출로 2016/17 시즌 초연해 파리 오페라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잡은 <카르멘>
ⓒVincent Pontet/OnP

둘째, 팜파탈의 매력을 발견한 것은 비제 이전부터 프랑스 특유의 트렌드로 존재하고 있었다. 18세기 전반기에 아베 프레보의 소설 『마농 레스코』, 후반기에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가 출판됐고, 19세기에 들어 오페라의 원작인 메리메의 『카르멘』이 등장했다. 그런가 하면 문인 조르주 상드, 배우 셀레스트 베나르(일명 모가도르) 등 여걸이 자유연애를 즐긴 파리의 유명 인사가 되는데, 비제는 이런 팜파탈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보수 인사들의 소란은 있었지만, 프랑스인을 사로잡은 전통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성공은 시간문제였다.

셋째, 팜파탈에게 비극성을 불어 넣었다. 팜파탈은 대개 남자를 파멸시킨 뒤 자신은 사라지곤 하지만, 카르멘은 목숨을 걸고 돈 호세의 위협에 맞서다가 쓰러진다. 관객은 카르멘의 당당한 죽음에 연민도 느꼈다. 비제는 카르멘과 에스카미요가 맺어지는 해피엔딩도 고려했지만, 카르멘 역의 초연 가수가 반대하는 바람에 그냥 두었다는 일화가 있다. 해피엔딩이었다면 이만한 감동을 안겨주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 vs. 오페라, 같고도 다른
<카르멘>의 주요 등장인물은 오페라 성부와 캐릭터의 교과서적 특징과 거의 일치한다. 소프라노는 연인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순결한 여인이며, 테너는 소프라노의 연인이지만 성급하고 덜 성숙한 인격체다. 반면 바리톤은 테너보다 사회·육체적으로 강건하고 계략을 꾸밀 줄 안다. 메조소프라노는 강한 여인의 상징이며, 프랑스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으면 팜파탈이 된다. 그래서 카르멘(메조소프라노)의 노래는 대개 남자를 유혹하거나 유희적인 삶을 예찬하는 반면, 돈 호세(테너)의 노래는 순수하지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다. 미카엘라(소프라노)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위해 헌신하고, 에스카미요(바리톤)는 늘 자신만만하고 남성적 매력을풍긴다.

시드니 코커투 섬 야외무대에서 열리는 야외 오페라<카르멘>
ⓒOpera Australia

오페라보다 30년 앞선 메리메의 원작 소설은 4부 구성인데, 오페라는 그중 살인죄로 투옥돼 교수형을 기다리는 돈 호세의 회상인 제3부에 집중했다. 원작에는 카르멘에게 건달 남편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가 감옥에서 출소하자 질투심에 사로잡힌 돈 호세가 죽인다는 것이다. 오페라 속 소심한 캐릭터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반면 카르멘의 성격은 오페라보다 덜 분방하게 그려졌다. 비제는 평소 친분이 있던 여배우 셀레스트 베나르를 보고 카르멘의 팜파탈 이미지를 보강했다고 한다. 미카엘라는 원작에 나오지 않는다. 카르멘이 너무 강한 캐릭터인 것을 우려한 친구들이 전통적 여성상도 넣을 것을 조언해 새 캐릭터로 추가된 것이다. 카르멘의 새 연인 투우사도 원작에서는 루카스란 이름으로 잠시 언급만 될 뿐인데, 오페라에서는 에스카미요라는 준주역급으로 격상됐다.

음악적 묘미, 재창조의 원천이 되다
<카르멘>은 음악적 다양성으로 유명하다. 쿠바의 아바나에서 들어온 담뱃잎을 가공하는 세비야의 공장 앞 광장에서 카르멘은 쿠바풍의 사랑 노래인 일명 ‘아바네라(하바네라)’로 남자들을 매혹한다. 그 리듬은 명백히 아르헨티나 탱고로까지 이어지는 중남미 스타일의 춤을 담고 있다. 체포된 자신을 풀어달라며 돈 호세를 유혹하는 장면에서는 ‘세기디야’ 리듬으로 상대방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세기디야란 스페인의 황금시대이자 민속춤의 전성기였던 16세기에 확립된 3박자 계열의 춤과 시를 말한다. 그런가 하면 2막 술집 장면에서는 전형적인 ‘집시의 노래’, 즉 플라멩코로 무아의 경지에 도달한다. 플라멩코는 안달루시아의 집시 춤에서 유래한 것으로 느린 속도, 중간 속도, 빠른 속도의 세 계열로 분류되는데, 오페라에 사용된 것은 빠른 춤이다.

2012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카르멘> 무대에 선 막달레나 코제나와 요나스 카우프만
ⓒLuigi Caputo

카르멘의 중요한 노래가 춤 리듬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이 오페라의 성공 비결이기도 하다. 오페라는 탄생 당시 그리스비극의 재현을 목표로 했기에 에로스적인 요소가 제한적이었다. 반면 춤은 본능적으로 에로틱하다. 이렇게 춤 리듬을 통해, 또 비제가 의도적으로 구사한 반음계적 진행을 통해 카르멘의 고혹적 캐릭터가 창조된 것은 물론 끈적거리는 성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반면 미카엘라의 노래는 고아한 프랑스 분위기에 물들어 있다. 1막의 이중창과 3막의 산속 장면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데, 고결하고 순진한 면모를 드러내 카르멘과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가 하면 <카르멘>의 그 유명한 1막 전주곡과 막 사이 세 곡의 간주곡 (또는 각 막의 전주곡)은 가장 인상적인 관현악 소품들이다.

끝으로 <카르멘>은 그 자체가 명작이지만 새로운 상상력의 원천으로도 작용한 그야말로 원형의 예술이 됐다는 가치가 있다. 사라사테와 왁스만 등이 카르멘 선율을 이용해 바이올린 독주를 사용한 기악곡을 작곡했고, 롤랑 프티와 마츠 에크·안토니오 가데스를 위시한 수많은 안무가가 춤으로 만들었으며, 이 이야기와 음악을 사용한 영화가 적어도 10여 편은 나왔으니 말이다.


유형종 음악·무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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