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가 에스더 & 무용수 데니스
우리는 계속 나아가야 하니까
스페인을 떠나 생면부지 한국에 도착한 안무가는 관찰하고 배우며 한국 문화를 깊이 흡수했다. 그렇게 서울 거리 한복판에 놓인 작품은 서로 다른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당위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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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로페스 나바로Esther Lopez Navarro는 “걷는 법을 배우기 전부터 춤을 추면서” 다섯 살에 무용수라는 꿈을 갖게 됐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플라멩코·스페인춤·발레·현대무용 등 다양한 춤을 배웠다. 컨서바토리에서 발레를 전공했으나 토슈즈보다 양말이 더 편했고, 스스로를 ‘컨템퍼러리 댄서’로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 안무가이자 프리랜서 무용수로 활동하며 여러 단체와 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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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당시 댄스동아리에서 춤을 시작했다.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는 미디어 활동을 활발히 했고, 이후 거리예술을 알게 되면서 모다페MODAFE를 비롯한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제대 후 ‘리 타이틀’을 창단해 축제 현장을 누비고 있으며 예술무대산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예술과 꾸준히 협업하고 있다.
에스더 엘렌은 17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이번 축제의 ‘해외 공모작’으로 선정됐다고 들었다. 서울거리예술축제는 어떻게 알게 됐나.
ESTHER 한국에 워낙 관심이 많은지라 서울에서 열리는, 서울에 관한 이벤트를 늘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다 국제 공모 프로그램을 알게 됐고, 내가 만든 안무가 처음 태어난 장소로 돌아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거리에서 열리는 축제라는 점이 인상 깊었는데, 무엇보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관객의 반응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아무도 완벽하지 않아Ningu (no) es perfecte>는 2023년 초 서울에서 안무한 작품이라고.
ESTHER 스페인의 한 단체로부터 안무를 의뢰받은 데서 시작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싶었고, 창작을 위해 편안한 장소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뭔가를 경험하고 싶었다. 사실 한국은 아는 사람도 없고, 내게는 완전히 새로운 나라였다. 한국 문화는 아무것도 몰랐다. 단, K-팝이 왜 그렇게 성공했는지는 궁금했다. 그 호기심이 나를 이곳에 오게 했다. 한국에 도착해서는 큰 창이 나 있는 카페에 자주 들러 몇 시간씩 사람들이 걸어가거나 말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그들은 항상 서둘렀고, 누군가는 지갑을 떨어뜨리는가 하면 또 비틀거리기도 했다. 관찰한 움직임을 노트에 기록했고, 연습실에 가서 복기하며 안무를 만들어보는 식이었다. 이후에는 K-팝 댄스를 배우고, 한국어를 공부하고, 전통무용과 태권도도 익혔다. 그 과정에서 문화적 충격Culture Shock을 적잖이 경험했다. ‘내가 아기가 됐구나!’ 작은 것부터 배워야 했고, 음식을 주문하고 지하철표를 사는 것조차 전부 새로웠다.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소통하고 공감하는지부터 살폈다. 보디랭귀지조차 새롭더라. 그 끝에 나는 새로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함께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서 함께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작품에 담으려고 했다.
프로덕션 조건으로 한국 무용수의 참가를 명시했는데.
ESTHER 작품을 만든 곳, 작품의 영감을 받은 곳이 한국이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에 함께하는 무용수들은 모두 작품에 영감을 준 이들이다. 이들과 함께 작품이 처음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순환을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무용수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무용수가 어우러질 때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고 본다.
이번 공연에 무용수로 함께하는 데니스는 에스더와 어떻게 인연이 됐나.
DENIS 지난해 봄, 현대무용 수업을 하는 서울탄츠스테이션에서 춤을 배우러 온 에스더를 처음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한국 문화를 알아가기 위해 여러 가지를 배우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K-팝 댄스만 아니라 한국무용까지 배우더라. 에스더는 서로 다른 문화를 어떻게 융합하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몸으로 발현할지 자신만의 방법을 알고 있는 안무가다. 열심히 리서치하고 안무한 것을 알고 있기에, 완성된 작품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국내의 여러 예술가와 활발히 협업하고 있지만, 해외 예술가와 만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동시대에 활동하는 해외 안무가는 어떻게 작업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렇게 이번 공연에 참여하게 됐다. ESTHER 이 프로젝트를 위해 내가 한국에 온 것처럼, 한국의 예술가들도 스페인에 와서 협업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이후에 데니스가 소속된 ‘리 타이틀’과 프랑스·스페인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무용수로서 <아무도 완벽하지 않아>라는 작품을 소개한다면.
DENIS 사람은 누구나 자아를 갖고 있지 않나. 자아는 완전할 수 없고, 분명히 불완전한 부분이 공존하고 있을 거다.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다보면 스스로 불완전함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것조차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각자만의 길로 나아가자고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작품 안에 여러 음악이 사용된 것이 인상적이다. 첫 번째 곡으로 딘 마틴Dean Martin의 올드팝 ‘Everybody Loves Somebody’1947를 선곡했다.
ESTHER 애틋하고 따뜻한 마음, 사랑을 담고 싶었다. 이 노래는 모두가 좋아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나의 사랑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사랑하자는 의미를 담았다. 자아를 찾게 되면, 내가 누구인지 다른 사람과는 무엇이 다른지 알게 되고, 또 삶의 각 단계에서 더욱 성장할 수 있다고 본다. 애틋하고 따뜻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하지 않고 혼란스러운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 불완전함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그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니까.
그렇다면 스페인 가수가 부르는 ‘Me Robaste El Sueno (You stole my dream)’2009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에스파냐어라 스페인과 한국 관객의 반응이 사뭇 다를 것 같다.
ESTHER 인간의 생애에 비유할 때, 첫 번째 곡이 유아기라면, 이 곡은 아동기에서 성인기로 넘어가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무용수들은 거의 완벽에 가깝게 한 줄로 서 있지만, 그 줄이 무너지면서 뭔가를 끊임없이 붙잡으려고 한다. 노래 역시 나오고 끊기기를 반복하면서 극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가사를 모르더라도 무용수의 표현과 움직임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거라 생각한다.
“당신은 레벨 10에 도달했습니다.” 한국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로 반복되는 이 사운드는 ‘목표 달성’을 외치지만, 어쩐지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ESTHER 이때 무용수들은 모두가 원하는 목표인 ‘레벨 10’을 달성한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우리는 여전히 달리고 싶은가? 그게 우리의 꿈이었을까? 인생은 마치 게임 같지 않은가.
작품에 등장하는 타악 리듬이 한국의 전통 타악과 어쩐지 친숙하게 느껴진다.
DENIS 작품에 사용된 음악을 들으면 비슷한 느낌이 들지만, 확실하게 다른 지점이 있다. 에스더가 한국 문화를 경험하고 이를 영감으로 삼아 완성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 점이 작품에 반영되면서 비슷한 느낌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다른 점이라면, 작품 음악에 등장하는 타악 리듬은 우리 전통 리듬에 비해 좀 더 강렬하고, 변칙 구조를 이루고 있다. ESTHER 한국 춤과 스페인 플라멩코가 비슷한 부분이 꽤 있다. 그래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것 아닐까? 작품 전반에 있어 전통과 새로운 트렌드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고자 했다.
DENIS 이런 부분이 관객들이 특히 재밌게 눈여겨볼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무용수로서 에스더의 안무 스타일을 이야기한다면.
DENIS 다른 작품에 비해 무용수 개개인의 자유로움, 순수한 에너지를 충분히 발현할 수 있다고 느낀다. 공연을 위해 모인 무용수를 보면 비보잉·컨템퍼러리 댄스 등 세부 장르도 다양하고 국적도 전부 다른데, 이렇게 서로 다른 무용수들의 에너지를 하나로 합해내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무용수 한 명 한 명의 장점과 느낌, 에너지를 존중하고 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안무가로서 에스더의 강점이다.
안무가로서 한국 무용수들은 어떤 개성이 있다고 느끼나.
ESTHER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웃음) 일단, 한국 무용수들이 지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대부분 완벽주의자이고, 호기심이 많아 집요하게 알아내려고 한다. 유럽과 한국의 무용수를 비교하자면 가장 큰 차이는, 한국 무용수들은 어떤 안무를 완벽하게 숙지한 후 자기 표현을 더해가는 편이다. 반대로 유럽 무용수들은 자신의 표현이 앞서고 이후에 차차 동작을 발전시켜나가는 편이다. 안무가로서는 둘 다 좋다.
‘리 타이틀’이라는 단체로 이전에도 서울거리예술축제에 참여한 것으로 안다. 이번 축제에 어떤 기대를 하고 있나.
DENIS 공연자에게 공간은 중요하다. 특정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거리예술축제의 묘미는 거리에 축적된 흔적과 역사를 만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그러한 공간에서 관객과 만들어낼 관계의 미학이 기대된다. 또 한국을 대표하는 축제 중 하나인 만큼, 국내외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선보일 자신만의 작품이 궁금하다.
글 김태희 [문화+서울] 편집팀
사진 Studio Ke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