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없으면 재주도 없다
도깨비들이 노들섬의 노을을 무대 삼아 한바탕 난장을 예고했다.당신이 거기 있고 내가 여기 있어 비로소 완성되는 우리의 재주.
서울서커스페스티벌 제작공연
<옛,다!>의 재주 많은 도깨비들을 만났다.
왼쪽부터 염한설, 오세원, 홍석민, 이학인, 서석배, 서상현, 서주향, 염예은
서울서커스페스티벌에서 선보일 제작공연 <옛,다!>를 위해 서로 다른 신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모였어요. 각자 팀 소개 부탁드립니다.
창작집단 사람은 거대한 사회 속에서 개인의 심상에 집중해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작업을 추구하는 공연예술 팀입니다. 연출가 서상현과 조연출가 겸 퍼포머 엄예은으로 구성돼 있고요. 지금까지 서커스와 신체 움직임을 중심으로 목표 의식과 맞닿은 직접적인 행위를 실행하는 다양한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저는 이번 공연에서 총연출을 맡았습니다.
저는 안성에서 줄을 타는 어름사니 서주향이라고 합니다. ‘어름사니’라는 말이 생소한 분도 계실 텐데요. 공중에서 부리는 재주가 얼음판을 걷듯 아슬아슬하다고 해서 붙인 ‘어름’에 인간과 신의 중간을 뜻하는 ‘사니’를 더해 줄타기꾼을 일컫는 남사당 용어입니다. 그동안 전통 기예 영역에서만 작업을 이어왔는데, 서커스나 마샬 아츠 트리킹Martial Arts Tricking처럼 다양한 분야의 기예팀과 함께하게 돼 무척 설렙니다.
재주상단은 옛 ‘보부상단’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봇짐을 메고 발이 닿는 대로 떠났던 보부상처럼, ‘재주’를 싸매고 다니며 관객과 만나고 있습니다. 국악기를 시작으로 양악·서커스·연극·마임 등 다양한 복합 장르를 추구하며 전통과 현대가 시너지를 이루는 작품을 제작해왔고요. 이번 공연은 아빠깨비를 맡은 저 이학인과 음악과 믹싱을 담당하는 하와이깨비 오세원,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해 퍼포먼스를 선보일 진깨비 홍석민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엄예은 퍼포머와 서주향 어름사니가 하늘을 채우는 도깨비라면, 저희는 땅에서 음악과 재주를 선보이는 도깨비를 맡았습니다.
저와 염한설 퍼포머는 사실 오늘 이 자리가 첫 만남입니다. 그래서 아직 역할이 정해지진 않았어요. 둘 다 여러 무술의 발차기, 기계체조의 공중돌기와 비틀기, 다양한 무용 동작을 접목한 마샬 아츠 트리킹 분야에서 퍼포머로 활동하고 있어서 아마 무대를 날아다니며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도깨비가 되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도깨비와 서커스, 줄타기와 무술 그리고 하와이라니 키워드가 예사롭지 않네요.
‘2024년 서울서커스페스티벌을 주제로 하는 극을 제작해달라’는 단 한 줄에서 작품 구상을 시작했어요. 가장 먼저 떠오른 키워드는 ‘연결’이었습니다. 전통 기예와 현대 기예, 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서커스에 대한 개념과 재주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고민했죠. 도깨비들이 저마다 다른 재주를 펼치면서 다양한 요소들을 연결하기 위해 시도하고, 노력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전통과 현대의 연결로 시작했지만, 나아가 미래의 재주에 대한 연결을 생각했고, 결론적으로는 ‘사람이 없으면 재주도 없다’는 방향에 도달했어요.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 중 누구 하나만 없어도 공연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매개체는 결국 사람이 아닐까요? 과거와 현재, 미래의 기예를 잇기 위해 만드는 사람도 즐겁게, 보는 이들도 즐거운 극을 만들고 있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함께 즐기고 모여야 재주가 있다’는 주제를 창작 과정에 녹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서로 다른 기예의 퍼포머가 수직과 수평 구조로 저마다 다른 공간을 차지하고 넘나든다는 점이 독특하게 느껴지네요.
노들섬이라는 공간 자체가 트여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작품의 부피감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땅깨비에서 하늘깨비, 줄깨비 그리고 무대를 휙휙 날아다니는 휙깨비까지 저마다 위아래, 양옆을 종횡무진하며 각자의 영역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교차할 거예요. 눈 둘 곳이 많은 작품이라 보는 관객도 재미있겠지만, 저희도 만드는 과정에서 의견을 주고받으며 많이 배웠어요. 공간을 넘나드는 것도 재미있지만 저마다 장르적인 변화를 추구해서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 됐습니다. 저는 하늘 공간을 맡았는데요. 공중 서커스 하면 떠오르는 아름답고 우아한 동작을 넘어 전통 기예와 접목한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드릴 계획입니다.
저는 이번 무대에서 처음으로 힙합 음악에 맞춰 줄을 타게 됐어요. 어떻게 보면 퇴폐적이기도 하고 장난기 많은, 기존에는 보여드린 적 없는 새로운 기예를 보여드릴 계획입니다. 평소에는 2.3미터 정도 높이에서 줄을 타는데, 서상현 연출님이 이번 작품을 제안하며 3미터에서 줄을 타보자고 하시더라고요. 그 자체도 새로운 도전이었는데 저보다 더 높은 하늘로 올라가는 분이 계셔서 마음의 부담을 조금 덜었습니다. 전통 줄타기와 서커스 퍼포먼스의 넘나듦도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 휙깨비는 무대와 객석 사이를 넘나들 예정입니다. 재주 넘는 원숭이랄까요? 열린 공간인 만큼 관객과의 소통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퍼포머와 관객이 잘 연결될 수 있도록 객석과 무대를 오가며 재미있게 놀아보겠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재주도 없다’는 말씀도 인상적이에요.
작품을 준비하면서 모두에게 도깨비라는 정체성을 부여한 건 캐릭터가 가진 유쾌함도 있지만, 시간을 거스르는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도깨비는 나이를 먹지 않는 요괴잖아요.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재하죠. 인간의 세월에 갇히지 않는, 도깨비는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요? 사람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면서 불쑥불쑥 세상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도깨비가 재주꾼과 참 닮은 것 같아요. 재주꾼도 도깨비처럼 사람들의 관심과 박수를 먹으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생각했고요.
여러 팀이 만나서 작업하는 만큼 새로운 발견의 순간이 많았다고요.
각자의 분야에서 매진해온 재주를 함께 모인 자리에서 보여주고 보는 과정 자체가 저희에겐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재주상단은 기존에도 전통과 예술의 융합을 시도하는 팀이지만, 이번 작업에서 저희가 미처 보지 못한 그 너머를 보는 경험이었어요. 뭔가 막혔던 혈관이 뚫렸다고 할까요.
음악 면에서도 기존에 해 보지 않았던 새로운 방향을 발견하기도 했고요. 이번 공연 이후의 작업을 더 기대하게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연출과 퍼포머들 모두 서로를 지지하고 잘 받아줬기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기술적으로는 새로운 발전을 이루기 힘든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하고 알게 된 부분이 많아요. 그동안 제가 했던 줄타기가 재담을 나누는 비교적 단순한 구성이었다면 극을 이끄는 방식이나 의상이나 음악, 무대 장치와 같이 기술에 집중해서 더 잘 보여드릴 수 있는 요소들에 관해 공부하는 시간이었어요.
각자의 신에서 오래 작업한 분들이라 본인이 고수하던 원칙을 내세울 수도 있는데, 여기 모인 분들은 ‘나는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고집이 없었어요. 아마 그게 저희 공연 팀의 특징이 아닐까 합니다. 각자 스스럼없이 얘기를 주고받고, 누군가 제안을 하면 그걸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낼 수도 있고요.
처음 모든 팀이 모였을 때,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주십사 부탁을 드렸어요. 하나의 결과물을 뽑아내기 위해 모였지만, 저를 포함해 각자 나름의 시도나 도전을 하면서 나름의 성취를 맛보길 바랐거든요. 작품을 올리고 끝내는 게 아니라 재미있거나 새로운 무언가를 알게 되고, 기꺼이 한번 해 볼 수 있는 힘이 생겼으면 합니다. 그래서 ‘이게 될까?’ 싶어도 일단 가져와달라고 말씀드리죠. 그런 과정이 있어야 보시는 분들도 만족할 것으로 생각하고요.
<옛,다!>라는 무대에 거는 각자의 기대감도 다를것 같아요.
많은 단체가 그렇듯이 저희 팀도 코로나19로 관객과 만나기 어려운 시간이 있었어요. 저희도 무대를 잃었지만, 보시는 분들도 예술을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동안 국악이면 국악, 현대극이면 현대극, 이렇게 규격에 맞는 공연예술을 주로 관람하셨다면, 이번 무대가 그런 고정관념을 깨는 자리이길 바라요. 무대가 사라진 동안에도 아티스트들이 거리 곳곳에서 관객과 만나고자 노력한 시간이 결실을 보고, 관객에게 전통과 현대의 융합 예술이 이 정도까지 성장했다는 인식을 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채로운 퍼포먼스를 마음껏 선보일 계획입니다. 대한민국에 이런 팀이 있구나, 서울에서 이런 시도를 펼치는 사람들이 있구나, 생각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시도와 색깔로 관객을 맞이하기 위해 땀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요.
저는 서커스 같은 공연예술이 일반 관객에겐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 경계에 놓이는 걸 참 좋아하고요. 이 경계의 백미는 공연을 보는 순간에도 유효하지만, 극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빛을 발합니다. 공연을 보고 돌아온 일상에서 문득 떠오르게 만들고, 크든 작든 삶에 어떠한 영향을 받는 일. 그게 이 공연의 목표이자 도전이니 이 새로운 감각을 기분 좋게 느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서울서커스페스티벌이 올해로 7회를 맞이합니다. 공연을 준비하며 바라는 점이 있나요?
정말 다양한 분들이 차별화된 축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조금 더 홍보가 많이 되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퍼포머와 작업하며 서로의 분야에 대해 인식을 깨고 새롭게 발견하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이번 공연이 관객에게도 전통과 현대 기예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끌어내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전통이라고 하면 ‘옛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기보다는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요.
흔히 축제하면 불꽃축제를 떠올리잖아요. 풍부한 지원과 플레이어의 즐거운 창작 활동이 어우러진다면, 거리예술이 시민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대표 축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양한 아티스트와 작품을 발굴하는 등용문이 되면 좋겠고요. 시민이 기대하는 축제, 예술로 소통하고 참여할 수 있는 서울의 축제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글 박채림 프리랜서 에디터
사진 강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