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할머니 아닌, ‘최순화’입니다
시니어 모델 최순화
1943년생 최순화 씨는 키 171cm에 팔도 남달리 길어 모델을 하면 어울리겠다는 농담 섞인 말을 자주 들었다. 사실 자신도 20대부터 모델의 꿈을 간직했지만 이 나이에 무슨 모델을 할 수 있을까 싶어 시도 한번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할 수 있다’보다 ‘해야지’ 하는 생각이 앞섰다. 일흔두 살에 꿈만 꾸던 모델 수업을 받고, 익숙하지 않은 모델 워킹을 부단히 연습해 3년 만에 일생 첫 패션쇼 무대에 오른다. 젊은 세대가 주로 활약하는 패션계에서 모델로서 당당히 이름을 알리고, 그는 이제 ‘시니어 모델 최순화’로 불린다.
Q 72세에 모델 수업을 받으셨어요. 결심한 계기가 있을까요?
제가 70대 넘어서까지 금전적으로나 여러모로 너무 힘들게 생활했어요. 빚이 많아서 저 스스로 생각할 때 비참할 정도였는데요. 아는 분이 시니어 모델이 있다고, 제가 키가 크니까 모델 하면 정말 어울리겠다고 말해 줬어요. 제가 20대에는 모델이 나오는 책도 보고, 영화배우도 따라다니던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이 힘든 생활을 버티는 힘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죠. 그러다가 어느 날 KBS <아침마당>에 시니어 모델이 나온 걸 봤어요. ‘내가 지금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보다 ‘시니어 모델이 있으면 해야지’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분 다니는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다니기 시작했죠.
Q 현재는 79세입니다. 몸이 따라가기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적응하셨나요?
70년 동안 걷는 대로 걷고, 꾸부정하게 앉고, 그러니까 등도 약간 앞으로 굽었잖아요. 모델 워킹을 한 적이 없으니까 어색했죠. 걸음은 폭이커야 하고, 일자로 걸어야 하잖아요. 걸음걸이가 굳어버리고 태도도 고정됐었는데, 많이 노력했어요. 생계를 위해 간병인을 했거든요. 24시간 환자를 돌보는 일인데, 환자가 잠들면 병원에서 연습했죠. 병원 복도가 길잖아요. 밤 12부터 1시, 아니면 2시까지 일자 워킹을 정말많이 연습했어요,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바뀌더라고요.
Q 당시에는 ‘나이 70이 넘어서 모델을 한다고?’라는 사회적 편견에 사로잡힌 시선이 많았을 것 같아요
그 시선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거의 3년을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요. 제가 모델 수업 받으러 다닌다고 말하면 다 웃을 줄 알았죠. ‘빚 갚으러 돈 버는 사람이 무슨 모델이야’ 그 소리가 뻔하잖아요. 자식에게도 말 안 했어요. 모델 수업 받은 지 3년 만에 제가 어느 명절에 아들 만나서 얘기했어요. 그랬을 때 우리 아들이 ‘아 엄마 잘했습니다. 이제 쉴 나이도 됐고, 취미 생활로 좋은 걸 할 때니 잘 하세요.’ 그러더라고요. 저는 아들이 의아해하고 당황할 줄 알았는데,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고마웠죠. 우리 딸도 제가 60대에 ‘엄마는 시대를 잘 타고나 모델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라고 말했어요. 70대가 돼서야 시대가 바뀌고 저 같은 사람도 활동할 수 있는 시기가 온 거죠.
Q 처음 패션쇼 무대에 섰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디자이너 키미제이가 초청해서 오른 무대인데, 그때 관객이 굉장히 많았어요. 제가 중앙을 걷고, 옆으로 자리가 꽉 찼는데 가슴도 두근거리면서 뿌듯했죠. 시니어 모델이 ‘서울패션위크’ 무대에 오른 건 최초였으니까, 늙어서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이건 직접 해봐야 알죠.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Q 모델을 하면서 이전과는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예전에는 애들 보살피면 그게 보람이고 희망이었어요. 손자들 보면 정말 귀엽고 예쁘잖아요. 그런데 자식 다 크고 저는 늙어보니 이제 할일이 없어요. 아무 일이 없으니까 굉장히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가 들면 이렇게 늙는구나, 안 늙어봤으니까 몰랐잖아요. 모델을 한 이후에는 머릿속에서 계속 각본을 만들어요. 저 혼자서 미래를 바라보는 거죠. 미래에 런웨이를 걸어갈 때 옆에는 관객이 꽉 차고 저는 어떤 포즈로 걸어갈 것이다. 그 순간에 만족할 저의 기분과 보람,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자체가 저에게는 놓칠 수 없는, 놓고 싶지 않은 행복이에요.
Q TV 프로그램에 나온 시니어 모델을 보며 ‘해야겠다’ 마음먹고 행동에 나섰잖아요. 어딘가에서 최순화 님을 보면서 행동할 분에게 전하고 싶은 말 들려주세요.
집에서 뭐 할 건데요. 늙어서 집에 있으면 찾아오는 손님은 질병밖에 없어요. 가만히 있으면 자연히 긍정적 생각보다 부정적 생각이 많아 지고, 그러면서 건강이 안 좋아지죠. 다시 할 일이 생겼다는 자체가 엄청난 행복감을 줍니다. 그냥 할머니로 늙는 게 아니라, ‘최순화’로 살면서 삶이 바뀌었어요. 나이 들어서 못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고, 새로운 삶의 장이 열리는 거죠. 새로운 바람이 불어서, 그 바람이 자기를 어떻게 바꿀지 모르니까, 머뭇거리지 말고 하고 싶은 일 하면 좋겠어요.
글 장영수 객원 기자 | 사진 공간느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