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급함의 문제는 문화나 예술로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장애인의 예술 창작이나 문화향유를 특별하게 여기고 그들에게 그 기회를 제공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애인의 예술 참여는 ‘다양성’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공존하는 문화적 다양성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 2018 잠실창작스튜디오 ‘장애아동 창작지원 프로젝트A’.
해결하려는 욕구로부터 멀어지기
장애 예술가의 창작 및 향유지원에 관해 발언의 기회가 생길 때마다 효율적인 방법을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한 망설임이 있다. 이미 장애 관련 이슈는 차별과 소외의 맥락으로 전제되어 사회적인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결’을 효율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 차별받고 있다’는 문제로 현재 상황을 바라볼 경우, 그것은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는’ 해결 방안을 마련하는 것으로 논의가 진행된다. 그런데 이것은 ‘다름’을 ‘다양성’으로 수용하고 재발견할 수 있는 문화나 예술 영역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관점인지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조금 다른 방향성, 혹은 조금 다른 공존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장애 관련 이슈나 상황을 문제로 전제하고 해결된 상태를 목표로 두기보다 오히려 문화예술적인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것으로 예술의 사회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호한 해결점을 목표로 우수한 국내외 사례를 참고하는 것에 앞서, 현재 국내의 상황을 우리가 얼마나 알고자 하는지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장애를 바라보는 관념화된 시선의 파악
장애인은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이유로 사회적으로 격리, 보호되기보다 사회적 생산성을 높이기 힘든 존재로 전제되어 비장애인과 다른 공간, 환경에서 생활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단지 숨을 쉬고 있는 사람, 일을 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 천천히 일을 하는 사람은 일반화된 몸을 움직여 일반화된 속도로 일반화된 생산력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과 분리되어 살아간다. 이에 따라 삶의 기회에 있어서 비장애인과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 안에는 교육 참여나 문화향유의 기회도 포함된다. 그리고 일반적인 생산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 안에서 함께 살아가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 그들은 보통 보호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사회적 시스템 일부를 개선한다고 해도 쉽게 바뀔 수 없는 사안이지만 우리가 이런 인식을 얼마나 당연하게 갖게 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은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장애인을 뭉뚱그려진 관념적 존재로 상상하고 있다는데서 출발할 수 있다. 휠체어를 탄 사람, 지팡이를 짚고 걷는 맹인,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정도로 그려지는 장애인은 사실 장애 유형별로 특성이 매우 다르다. 또한 사회적인 요소나 어떤 사건으로 인해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도 많기 때문에 장애는 어떤 면에서 충분히 상상하고 경험 가능한 영역 안에 있기도 하다. 하지만 보통 ‘장애’는 관념화된 사회적 이슈로 인식되고, ‘장애인’은 도움이 필요한 소외계층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장애인 당사자나 그 가족, 그리고 비장애인도 장애, 비장애가 구분된 삶의 환경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장애-비장애의 공존을 문화예술이 해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모호하지만, 먼저 우리가 얼마나 분리된 삶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는 있다. 그리고 ‘대체 왜 그럴까’라는 물음이 지속적으로 제기될 때,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현재 우리가 시도 가능한 공존 방식을 상상할 수 있다.
2 2018 잠실창작스튜디오 ‘굿모닝스튜디오’ 기획전시 <흐르는 흐름> 전시 오프닝.
현재 가능하지 않은 목표나 방식에 대한 의심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파악 없이 장애인이 차별받거나 소외받는 상황을 오로지 해결하기 위해 문화나 예술을 활용할 경우, 어떤 차원의 공존도 불가능하다. 오히려 차별의 문제를 해결할 것만 같은, 혹은 부분적으로 해결의 순간을 만드는 소수만이 그 성과를 가져가게 된다. 그럼에도 구체적 근거 없이 모호한 목표나 방식을 공식화하고 그것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약자로 전제되어 있던 장애인의 삶에 그것은 반가운 ‘희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더욱 쉬운 논리의 사회적 인식이 우리들 일상에도 작동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업이나 활동이 정말 가능한 목표나 방식을 취하고 있는지, 혹시 그것이 다른 목적을 위해 작동되고 있거나 (누군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렇게 작동될 여지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공공기관일수록 이러한 태도를 더욱 공식화된 언어로 고민해야한다.
모호한 희망 대신 가능한 시도부터
그런 맥락으로 서울문화재단이 올해 시도하고 있는 사업이나 행사의 방향성도 살펴볼 수 있다. 5월 31일부터 6월 1일까지 양일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크레아(DDP CREA)에서 진행된 ‘장애와 비장애가 공존하는 문화예술의 미래 포럼 <같이 잇는 가치>’의 경우 장애인의 창작 활동과 관련한 우수 사례를 콘텐츠 중심으로 열거하지 않고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장애인 당사자 중심으로 소개했다. 이러한 공론의 장이 지속될 경우 장애인을 ‘위한’ 제도의 설계를 넘어 장애-비장애의 공존 방식을 다채롭게 모색하는 시도가 힘을 얻을 것이다.
잠실창작스튜디오는 ‘서울형 장애아동·청소년 예술교육 운영단체지원사업’을 새롭게 진행했는데, 6월 3일 참여단체를 선정, 발표했다. 이 사업은 교육 대상자를 장애아동·청소년으로 한정지었다. 이러한 시도가 장애, 비장애를 구분 짓지 않으면서도 예술교육에 대한 생산적 논의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선정된 단체뿐만 아니라 재단의 역할도 중요할 것이다.
또한 잠실창작스튜디오, 금천예술공장, 신당창작아케이드의 입주 작가들이 참여하는 상호티칭워크숍도 진행되고 있다. 장애 예술가를 위한 지원이 아니라 다른 감각 간의 교류와 만남을 지원하는 이러한 시도가 사업적 성과를 넘어 문화예술 분야에 확장된 질문을 던지기를 바란다.
예술 현장에서는 비장애인 관람객 중심으로 발표되던 공연을 배리어프리 방식으로 진행하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사업이나 행사를 단체나 기관이 주도할 경우 사회적 파급력이 커지고 정치적으로 활용될 여지가 많다. 따라서 불편하지 않은 목표를 설정하고 익숙한 방식을 선택하기보다 재단이나 개별 단체, 기획자들이 낯설더라도 ‘현재 가능한 시도’가 무엇일지를 지속적으로 살펴야 할 것이다.
3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오른 <7번 국도> 배리어프리 공연 모습.
장애 예술가의 창작에 대해
한편으로 공공과 민간 영역에서 장애 예술가의 활동을 다양화하고 장애-비장애인의 경계를 줄이는 문화예술 현장을 만들려면 어떤 방향성을 추구해야 할까. 이 광범위한 질문에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술이 장애 예술가의 사회 참여 기회로만 기능하지 않아야한다. 장애인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채 살아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힘든 삶에 대한 해결책으로 예술이 기능할 경우, 장애인은 예술 영역 안에서 더욱 고립되거나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머물 것이며 비장애인 중심의 예술 영역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또한 예술에 대한 확장된 의미와 가치를 실험해보는 기회가 더욱 축소될 것이다.
둘째, 장애 예술가의 창작 활동이 몇 가지 유형으로만 고정되지 않아야 한다. 특히 최근 장애 예술가의 창작은 사회나 타인과의 관계성보다 개인의 고유성에 집중하거나, 몇 가지 매체를 주로 다루는 방식으로 유형화되고 있다. 타 분야와의 컬래버레이션이나 새로운 매체에의 탐구가 지속되는 동시대 예술 안에서 이러한 현상은 자칫 누군가의 창작을 장애의 관점으로만 해석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셋째, 장애-비장애, 장애인-창작 활동, 장애-사회 등을 매개하는 사람들의 활동이 단절되지 않아야 한다. 기존에 이러한 역할을 해왔거나 현재 하고 있는 사람들의 활동은 ‘장애인이나 사회를 위해 필요한 활동’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들의 활동이 예술적 실험으로 나아가거나 전문화될수록 오히려 사회적으로 이것을 설명할 언어가 부족해지기도 한다.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의 활동 근거를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개별 경험을 통해 전문적 역량을 보유한 매개자이자 창작자이자 기획자인 이들의 역할은 장기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들의 기회가 단절되지 않을 공식화된 장치가 필요하다.
넷째, 장애의 요소를 사회적인 주제로 만나는 기회만 마련되지 않아야 한다. 장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사회적인 주제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쉽게 해석된다. 그러나 장애는 우리의 일상과 그리 특별하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하기에 장애를 특별한 주제로 부각시키는 문화적 기획을 늘리는 대신 서로의 삶이 얼마나 다층적으로 연결돼 있는지를 살피는 기회가 마련되어야 한다.
앞의 네 가지 의견은 대부분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 이전에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는 어떤 목표를 이룰 것 같은 희망과 더욱 거리를 두기 위함이자,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더욱 어렵고도 필요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에 대한 관심을 넘어 문화 다양성의 맥락으로
이 모든 것은 장애인의 창작 및 문화향유 기회를 위해서라기보다 문화 다양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하다. 어떤 대상을 위한 문화가 아니라, 문화 자체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장애인‘도’, 장애에 대해 관심을 가진 ‘누구든지’ 각자의 문화적 경험을 만들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예술이 장애인에 대한 사회 참여 기회로 기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또다시 연결된다.
그리고 문화가 다양해지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전략 수립과 실행 이전에 우리의 인식이나 태도가 더욱 중요함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은 효율성을 전제로 접근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효율적’이라는 것은 ‘들인 노력에 비해 얻는 결과가 큰’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더욱 문화예술적인 방식과 거리가 있다. 우리는 효율적인 방안이 다급한 상황 안에 있지만 그렇다고 비효율적인 실험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장애, 비장애,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들이 공존하는 문화적 다양성을 위해 우리는 효율적일 수 없는 방식을 찾아보아야 한다. 문화나 예술은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돌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렇게 불안하고 바쁜 상황에서도 다른 속도로 서로를 만나며 다른 시선을 찾는 순간에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문화와 예술이 시작될 것이다.
- 글 최선영_창작그룹 비기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