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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5월호

한국 서커스의 역사
‘지금, 여기’의 시선으로 서커스 다시 보기

전통 서커스가 광대와 마술, 여러 가지 곡예와 동물 묘기 등을 레퍼토리별로 나열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유지하고 있다면, 현대 서커스는 신체를 단련하여 인간의 한계와 위험에 도전하는 서커스의 기본 전제와 더불어 창작자의 메시지 표현을 중요시한다. 현대 예술의 보편적인 특징처럼 작품을 위해 필요한 모든 재료를 서커스란 범주로 제한을 두기보다는 창작자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새롭게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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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0년대 한국 서커스 공연 모습. 안충열 곡예사 외 5인. (안재근 곡예사 제공)

기억 속의 서커스

현장에서 창작 작업을 하면서 서커스에 대해 관객과 창작자가 떠올리는 이미지와 개념이 다소 거리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래서 대중은 서커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경험을 가졌는지 알기위해 면대면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터뷰를 해보니 서커스에 관한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 대중의 기억 속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나이와 지역별로 서커스에 대한 생각과 경험의 차이는 한국 서커스의 역사와 이어져 있었다. 기존의 서커스 연구가 관련 종사자들의 진술과 기억을 토대로 역사를 기록했다면, 관객의 기억을 토대로 한국 서커스의 그림을 재구성하기 위해 인터뷰를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인터뷰 대상은 창작 작업의 협력자로서 서커스 관련 국내외 종사자 33명과 관객인 비종사자 33명이었다. 국내와 국외라는 다소 넓은 범주에서부터 인터뷰를 시작했고, 비종사자의 경우 좀 더 세부적인 차이를 알기 위해 세대와 지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인터뷰를 진행함과 동시에 서커스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교차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기도 했다. 비종사자의 경우 처음에는 주제를 듣고 약간 의외라는 반응이 다소 있었지만, ‘서커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서커스에 대한 첫 기억이 무엇인지?’ 등의 질문을 던지자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1991년생인 이형주(전라, 호칭 생략)는 “…미국에 가서 카쇼를 봤다. 인디언들이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내용인데 무대 배경도 좋고 화려하고 날아다니고 줄도 타고 했다. 스토리가 있는 서커스였다. 그런 것을 본 적은 처음이라 ‘이게 서커스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했다. 1944년생인 이유순(충청)은 서커스에 대해 “…17살 때 청주 시내에 살았는데, 러시아 서커스단이 지방으로 다닐 때였다. 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서커스 구경을 갔다. 잊히지 않는 광경은 그네를 뛰면서 저쪽에서 다리와 다리로 받는 장면이다.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었다. 만화에 나오는 몸으로 날으니까 인형이 나는 것 같았다. 관중들이 박수를 치고 ‘으악!’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는 강렬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29살과 76살. 반세기의 나이 차가 나는 두 세대의 공통점이라면 해외 서커스를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의 세대는 서커스를 스토리가 있고 다양한 공연 요소가 어울려진 스펙터클한 작업으로 생각한다면, 후자의 세대에게 서커스는 보통 사람이 하기 힘든 신기한 기술, ‘몸에 달라붙는 옷’과 ‘진한 화장’ 등 1960년대 한국 사회에서는 낯설었던 모습이다. 우리와 다른 존재를 보는 놀라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는 한국 서커스의 전성기였다. 한국전쟁 이후 신광, 동명, 태백, 동춘, 서울 등 많은 공연 단체가 존재했다. 기록에 따르면 서독 서커스 내한 공연 당시 “일요일 오후 시청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공중 외줄 묘기, 공중 오토바이 묘기 등 국내에서 볼 수 없었던 진기한 서양의 서커스를 만끽할 수 있었다”1)고 할 정도로 서커스는 당시의 일상 곳곳에 존재했다. 서커스단의 공연 형태는 마술, 여성 국극, 서커스, 풍물, 마임 등 다양한 볼거리와 오락거리를 쉴 새 없이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동춘서커스’ 단장 박세환의 말처럼 당시의 서커스단은 한국의 대중예술을 끌고 가는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의 집합체였다. 1944년생인 이유순(충청)의 언니는 여성국극을 좋아해서 그것을 주로 보러 다녔고 본인은 서커스를 좋아해서 수차례 한국 서커스와 러시아 서커스 공연을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1946년생인 송희은(충청)은 “…우리 동네는 10가구 정도의 두메산골인데 서커스가 들어와서 강변에 포장을 치곤 했다. 천막에 놀러갔다. 서커스단이 어깨 위로 올라가는 것이 신기하고 위험해 보여서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1957년생 김경희(경상)는 “…경주 시장에 가면 배 위에 돌을 놓고 돌을 깨기도 하고 무좀약, 버짐약을 팔기도 했다. 철근도 휘게 하고 옛날 음악도 흐르고, 두세 명이 다니면서 했다. 시장에서 차력하는 사람을 직접 보았다…”라고 했다. 이렇게 화려한 해외 서커스단을 경험한 이들도 있었지만, 두메산골, 시골 장터, 운동장, 공터, 강변 등 천막을 칠 수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다니며 제법 규모가 있는 천막 극장을 짓고 보름에서 한 달 정도 공연하는 서커스단도 있었다. 또 시골 장터나 강변 등에 임시로 극장을 짓고 짧게 공연하며 물건을 팔고 금세 떠나는 형태도 있었고, 극장이 아닌 길 위에서 소소한 마술이나 차력으로 시선을 끌고 물건을 파는 형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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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80년대 한국 서커스 공연 모습. (인천일보 유동현 사진)
3 1990년대 동춘서커스. (국수용 사진)
4 1960. 9. 4 서독 서커스 내한공연. <서울, 폐허를 딛고 재건으로 I: 1957-1963> 2011, 68쪽. (서울역사아카이브)

TV 속의 서커스

그렇다면 이렇게 서커스를 다양한 장소와 모습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대째 곡예사인 안재근은 1970~1980년대 한국 서커스가 약장수, 차력, 버짐약, 회충약 등 여러 가지 기억과 이미지가 뒤섞이게 된 배경을 이야기해주었다. 당시 곡예사들은 정식 서커스단 외에는 일할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공연 단체가 줄어들고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점차 곡예사들은 입장료를 받지 않고 약이나 건강식품 등을 파는 일명 ‘데끼야’(일본식 은어)로 넘어가거나, 신체 기술이 뛰어나 건설업 쪽으로도 많이 갔다고 한다. 반면 본인처럼 공연을 위해 서커스단에 남거나 다른 공연 무대를 찾아 곡예를 계속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는 소수였다고 한다. 1970년대 TV의 보급과 영화의 대중화, 새마을운동 등 도시화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다양한 볼거리가 생겼다. 서커스단의 구조와 내용이 사회 경제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변화한 지점을 서커스에 대한 다양한 기억들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1977년생인 정효숙(전라)은 “…TV로 많이 접했다. 흰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다리를 얼굴로 감싸며 예쁜 척을 했다. 입에 니은 자로 된 칼을 물고 접시를 그 위에 올리고… 너무 충격적이었다…”라고 했다. 1984년생인 김광현(전라)은 “TV에서 방영했던 것이 떠오르고 특별히 천을 붙잡고 공중에서 하는 영상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침대에서 사촌동생들과 따라 하면서 놀았다”라고 하면서 어린 시절 서커스를 흉내 내면서 논 기억이 많다고 했다. 이 시기에는 명절 때 TV에서 서커스를 본 기억이 좀 더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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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커스 전문가 양성 과정.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 제공)

서커스의 가능성

지금까지 대중의 기억 속 이미지를 통해 서커스의 모습과 변화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서커스란 용어는 어떻게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을까? 여러 연구 자료2) 에 의하면 서구 서커스의 형태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그 시기에는 러시아와 이탈리아의 서커스단도 국내에서 순회공연을 한 기록이 있다. 요양원에 있는 1927년생 한채원 할머니(충청)는 “알지, 곡마단에 서커스!”라면서 곡마단과 서커스를 동일시하기도 했다. 사실 ‘곡마단’은 일본에서 초기 서커스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페스티벌 디렉터인 대만의 유 룬 치앙(Yu lun Chiang)에 의하면 중국과 대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마희’라고 칭하며, 북한은 1950년 초부터 ‘곡예’를 ‘교예’라고 칭한다. 이렇게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용어가 존재하기에 서커스의 개념과 형태에 대한 폭넓은 연구가 필요하다.
1864년 일본은 미국 서커스를 통해 서구의 서커스를 먼저 경험하면서 ‘말’을 이용한 다양한 기술을 적용했고, 식민지였던 한반도에 ‘곡마단’이라는 용어를 이식시켰다. 하지만 한반도에는 이미 신체를 이용한 다양한 기술이 존재했다. 오래전 고구려 시대부터 말 위에서 서서 달리고, 옆으로 매달려서 달리고,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는 마상기예가 있었다. 줄타기나 솟대타기, 죽방울놀이 등도 현재의 서커스 기술과 본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없다. 오히려 남사당패, 솟대쟁이패, 대광대패 등 단체의 성격과 기술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냈던 기예 창작자들이 ‘곡마단’, ‘서커스’라는 용어로 인해 하나의 체계 안으로 줄 세워진 면도 있다. 이미 세계 여러 문화권에 유사한 기술이 존재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서구의 ‘서커스’나 일본의 ‘곡마단’이라는 용어와 개념에 굳이 갇힐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모든 신체와 관련된 훈련, 기술, 표현으로 확장해 생각한다면 서커스에 대한 상상과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우리에게는 현재 전통 서커스의 형태를 유지한 ‘동춘서커스단’이 있고,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워크숍을 통해 서커스의 개념을 확장하고 창작 능력을 배양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다양한 개념과 형태의 서커스가 공존하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기존의 시선에서 벗어나 서커스를 다시 보려는 이유는 역사 속에서 줄 세우고 확정하는 방식으로 서커스를 이해하기보다 ‘지금, 여기’라는 동시대적 시선에서 출발해 상상력과 가능성을 최대치로 열어 새로운 한계와 위험에 도전하는 작업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다.

  1. <서울, 폐허를 딛고 재건으로 I : 1957-1963>, 2011, 68쪽
  2. 신근영, <일제강점기의 곡마단 연구>, 고려대 대학원, 2013 / <20세기 전후 부산의 외래 공연예술>, 인문사회과학연구 제18권 제1호, 2017
글 이미경_창작그룹 노니 리서처
사진 출처·제공 안재근 곡예사, 인천일보,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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