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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1월호

거침없는시도와 무한한상상
제1회 서울희곡상

지난 8월 시작한 5개월의 여정이 드디어 끝에 이르렀다. 그 끝에는 이제 막 시작하는, 반짝이는 이야기를 가진 주인공이 있다. 올해 처음 시작한 창작희곡 공모 ‘서울희곡상’ 이야기다.
서울희곡상은 새롭고 우수한 창작희곡을 발견해 연극 생태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극작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창작 활동을 독려하는 의미에서 시작됐다. 희곡이라는 텍스트는 무대를 전제로 하고 쓰이기 때문에, 발견한 이야기를 공연으로 발전시켜 관객에게 선보이는 것까지 목표로 잡았다.
지난 8월 서울희곡상 공고가 시작됐고, 11월부터 희곡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응모 자격과 소재, 분량의 제한 없이 미발표 창작 장막 희곡이라면 공모에 응할 수 있도록 했다. 공고가 발표되고 2주 동안 희곡 178편이 접수됐다. 최근 여타 희곡상이나 지원 제도와 비교해도 적지 않은 수의 작품이 서울희곡상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극작가 겸 연출가 김명화, 극작가 김은성, 배우 남명렬, 극작가 겸 연출가 박근형, 연출가 박정희 총 5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가 한 달여간 희곡을 검토하고 최종 심사에 21편을 올렸다. 접수된 작품은 모두 각각의 미덕을 지니고 있었기에 최종 선정작 한 편을 꼽는 데 난항이 있기도 했다. 심사위원회는 “그동안 한국이라는 특정 장소에 국한되던 희곡의 지평은 이제 전 세계로 확장되고 있으며, 등장인물 역시 동물과 AI로까지 확장되고 있다”며 “변화무쌍한 세상의 흐름에 한국 희곡이 역동적으로 반응하고 발언하는 중인 것으로 보인다”고 작품을 검토한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다채로운 작품 중에 심사위원회의 중지가 모인 작품은 이실론 작가의 ‘베를리너’다. 작품은 내전으로 봉쇄된 공항 안에서 캐리어를 기다리는 우희와 태조, 그리고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하는 난민 잉그리드와 클라우스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작가는 작의를 통해 “지구에 인류가 나타난 이후로 계속해왔던, 아마 인류가 끝날 때까지 계속될 이야기들이 있다. 이번 작품 ‘베를리너’를 통해 우리가 말하고 앞으로도 계속 말해야 할 주제를, 완벽하지 않더라도 늘 추구해야 할 자유와 평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심사위원회는 이번 수상작에 대해 “경계에 대한 다각적 탐색을 정교하게 세팅한 작가의 노력이 돋보인 수작으로, 세상 도처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고통을 성찰하게 해줬다”며, “간결한 대사와 구조를 통해 우회적으로 세상을 응시하고 성찰하게 하는 가능성을 보여줬으며, 작품 속에 마련한 여러 연출적 기호 역시 대학로극장 쿼드에서의 공연과 잘 어울릴 것이라고 기대해본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수상자인 이실론 작가는 희곡을 쓰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고, 올해 4월 창작극 <마하>를 공연했다. 작가는 서울희곡상 수상 소식에 이러한 수상 소감을 전했다.
“제 필명은 예상하셨듯 홍차의 이름입니다. 매일 차를 마시고, 매일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의미 있는 글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요. 단 한 번도 명쾌한 답을 내린 적 없고, 앞으로도 그렇겠지요. 영원히 답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문득 불안해집니다. 그런 불안에서도 우러나는 무언가가 있을까요. 그럴 거라 믿으며 쓰겠습니다. 내내 쓰겠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이실론 작가에게는 상금 2천만 원과 상장이 수여됐고, 희곡 ‘베를리너’는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 프로덕션 과정을 거친 후 2024년 하반기 공연으로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이실론 작가가 지키고 싶었던 언어들로 직조해낸 세계가 무대를 만나 관객 앞에서 숨 쉬게 될 날을 기다려본다.

제1회서울희곡상 수상작가 이실론과의대화

제1회 서울희곡상 첫 번째 주인공입니다. 솔직한 수상 소감을 부탁드리며, 지금 기분은 어떤가요. 시상식 날 단상에 올라 수상 소감을 말하던 모습을 동생이 찍어줬어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큰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이런 기회를 마련해주신 서울문화재단·서울연극센터, 그리고 연극을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연극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뵙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꿈꾸는 분들이 심사를 맡아주셨습니다. 정말 놀랐어요. 저한테도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던 여러 선생님께 제 글을 보여드릴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영광입니다. 앞으로 더 꾸준히 쓰는 모습으로 이 마음을 이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희곡을 쓴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연극 관련 전공자도 아니라서 희곡이 무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실 아직 잘 모릅니다. ‘베를리너’를 쓰면서도 ‘이게 무대가 될 수 있을까? 언제쯤 될 수 있을까? 3년이 걸릴까 5년이 걸릴까? 아예 안 될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했습니다. 지인들이 ‘오, 상금!’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요. 저는 ‘베를리너’가 무대에 올라가는 게 가장 기쁩니다. 그리고 제가 꿈꿨던 극장인 쿼드라서 더 기쁩니다. 공연이 올라가면 그때야 실감이 날 것 같아요.
희곡이 다른 장르보다 좋은 건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이 모두 텍스트를 열심히 읽기 때문입니다. 연출도, 배우도, 연극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제가 쓰면서 공들인 마음 이상으로 희곡을 읽어주십니다. 그게 언제나 참 따뜻한 것 같습니다.
멋지게 쓰려고 하지 않고 진실하게 쓰겠습니다. 화려하게 쓰려하지 않고 진심으로 쓰겠습니다. 저는 확실히 보편적인 주제들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생각했고 앞으로도 생각했던 자유, 정의, 신념, 사람, 사랑, 이렇듯 보편적이어서 계속 말해야 하는 것들을 쓰려고 합니다. 트렌디trendy보다는 스테디steady를 추구하며 쓰겠습니다. 무엇보다 내내 쓰겠습니다.
글을 쓰는 저를 재촉하지 않고, 어떤 성과도 내지 못하는 날들을 묵묵히 기다려주신 부모님. 우리 가족. 감사합니다. 저의 지난날과 앞길을 응원해줄 친구들, 제가 연극을 하면서 만났고 만나게 될 모든 사람들, 제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과 사물에 감사를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제 글 속의 인물들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데 해준 것이 없어서 참 미안합니다. 그래서 ‘베를리너’에게 고맙습니다.”
지금의 기분은 기쁘고 무섭습니다. 저는 데뷔작이 마지막이 되는 작가들을 많이 봤습니다. 저는 무대를 정말 사랑합니다. 헤어지기 싫어요. 그래서 차이지 않도록 다음 작품을 빨리 써야 한다는 조바심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기도 해요. 불과 지난주까지만 해도 연극을 보면서 아, ‘베를리너’에게도 무대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서울희곡상 공모는 어떻게 알게 됐고, 어떤 마음으로 응모했나요? 공고가 나고 바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2023년 상반기에 웹진 [연극in] 희곡 공개 모집에 지원했는데요. 그 후 서울연극센터에서 보내주는 이메일을 계속 받아보았고, 인스타그램도 팔로우하면서 자연스레 소식을 알게 됐습니다. 부끄럽지만 [연극in]에 세 편의 글을 보냈는데, 모두 장렬히 낙방했습니다. 심사평에 ‘베를리너’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당시에는 분량도, 형식도 희곡이라기에는 확실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심사평에 언급됐다는 것 자체에 감사했고, 주제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썼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마치 설욕하기 위해 응모한 것 같지만, 그런 건 전혀 아니고요.(웃음)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공연한다’는 문구 때문에 응모하게 됐습니다. 만약 ‘베를리너’가 실연될 무대를 선택할 수 있다면 제게는 쿼드가 단연코 1순위거든요. 희망찬 상상은 자유니까요.

당선작은 공모를 위해 집필한 것인지, 아직 발표하지 않은 작품인지 궁금합니다.
이번 공모를 위해 집필한 것은 아니고, 앞서 말씀드렸듯 A4 4장 분량의 짧은 단상으로 써두고 반년 정도 묵혀둔 글입니다. 여러 바쁜 일이 있어서 올해 9월 4일에서야 집필을 시작했고, 10월 18일에 초고를 완성했습니다. 올해 쓴 작품이라 다른 공모전에는 전혀 내지 않았고, 서울희곡상이 첫 응모였어요.

창작의 영감은 어디에서 얻었나요? 쓰는 데는 한 달 남짓 걸렸지만, 영감은 한순간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왔습니다. 어느 소설책에서 동독 구경을 하려고 고민하는 서독 유학생의 얘기를 읽었고, 베를린 장벽 조각 기념품을 사서 나오다가 웬 할아버지에게 ‘그건 가짜야’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고요. 베를린 장벽이 훼손됐다는 뉴스를 보거나, 베를린이 봉쇄됐을 당시 고립된 사람들에게 구호 물품을 뿌린 비행기 조종사의 얘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베를린 장벽 관련 희생자의 사진에 대한 전시를 보게 됐고, 그동안 모인 조각이 하나로 뭉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건 오직 독일의 이야기도, 오랜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작품 의도에 이렇게 썼습니다.
“지구에 인류가 나타난 후로, 전쟁은 끝난 적이 없다. 지금도 누군가는 죽이고 죽는다. 우리는 오늘 전쟁터에 놓이지 않았을 뿐이고, 오늘의 삶은 찰나의 행운에 불과하다. 지구에 인류가 나타난 후로 계속해왔던 이야기가 있다. 아마 인류가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희망, 정의, 신념, 사랑, 그 밖의 수많은 보편적 주제들 말이다. ‘베를리너’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말해왔고 앞으로도 말하게 될 주제들. 완벽하지 않아도 늘 추구해야 할 자유와 평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고자 한다. 보편적이기에 계속 말해야 한다.”
이런 마음은 글을 쓰는 제 자신을 관통하는 테마이기도 합니다. ‘베를리너’의 주제는 아주 심플하게도 ‘자유와 평화’입니다. 여담이지만, 인물들이 베를린 장벽 조각 기념품의 진위에 대해 논하는 장면도 나오고요.

177편의 경쟁작을 제치고 당선했어요. 반짝반짝 빛나는 내 작품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솔직히 응모작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습니다. 의미 있는 작품이 정말 많았다고 들었는데요. 글쓰는 분들이라면 모두 자신의 작품이 가장 사랑스러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에게도 ‘베를리너’는 그런 희곡입니다. 객관적으로 더 잘 쓴 작품과 바꾸자고 해도 절대 바꾸지 않을 거예요.(웃음) 솔직히 열흘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고치고 싶은 부분이 없는 건 아니고, 못생긴 데도 있는데 일단 예뻐요. 그렇게 소중한 작품이라 인물들에게 거짓말을 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쓰면서 ‘이 대사가 더 멋있겠다’ 하는 생각을 몇 번 했는데요. 그렇게 쓰면 맞는 말은 아닐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거칠고 멋은 없어도 진심을 담아 썼습니다. 심사위원분들이 그런 마음을 봐주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가 의도한 바를 대부분 포착해주셨거든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봐주셔서 반짝반짝 빛나는 상을 받지 않았을까요.

공연으로 완성될 <베를리너>에 어떤 점을 기대하고 있나요. 몇 번 말씀드렸듯 저는 대학로극장 쿼드 무대를 정말 동경하는데요. 극장 환경 때문에 연출이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그런데 쿼드는 연출에 따라 극장이 바뀔 수 있는 곳이어서 정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욕심나는 것을 전부 할 수 있잖아요! 응모하기 전부터 쿼드 앞을 지나갈 때마다 ‘나 저기서 공연하고 싶어’라며 거의 염불을 외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우선 큰 기대가 됩니다. 그리고 저는 연출과 연기 모두를 믿습니다. 절묘한 감각을 지닌 분들이 정말 많아요. 솔직히 ‘베를리너’의 연출까지 제가 하라고 했다면 막막했을 거예요. 공연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것이 극작가의 길이지만, 그래도 쓰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 이거 무대 좀 어렵지 않을까. 아냐. 연출이 해줄 거야’, ‘이거 감정 좀 복잡하지 않을까. 아냐. 배우들이 해줄 거야’ 이런 생각이요. 그렇게 생각하니 과감하게 쓸 수 있었습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고 할까요? 연출과 배우를 믿고 썼어요. 그래서 무엇보다 제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 부분이 어떻게 표현될지 궁금합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우리 사회에서 연극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요. 조금 막연한 말인데요. 저는 사실 글을 오래 썼거든요. 소설도 여전히 쓰고 있고요. 이 이야기는 소설로 써야만 해, 그런 생각이 드는 글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맥락으로, 연극이어야만 하는 이야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삶은 모두 알다시피 유한하고, 인상적인 순간들은 찰나입니다. 그 찰나를 보물 삼아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많은가요. 돌이킬 수도, 편집할 수도 없지만, 그 순간을 그저 온전히 살아내는 것. 그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연극이 가장 잘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 서울문화재단 서울연극센터팀 송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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