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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6월호

침묵의 화가
윤형근

“평생 진리에 살다 가야 한다, 이거야. 플라톤의 인문학에서는 인간의 본질인데, 진선미. 진실하다는 ‘진’ 자 하고 착할 ‘선’ 자하고 아름다울 ‘미’ 하고인데, 내 생각에는 진 하나만 가지면 다 해결되는 것 같아.”(RM ‘Yun’)

방탄소년단 RM이 지난해 발매한 솔로 앨범 <인디고Indigo>는 윤형근1928-2007 화백의 육성으로 시작한다. RM은 윤 화백이 남긴 육성에 “그는 말했지 늘, 먼저 사람이 돼라/예술 할 생각 말고 놀아 느껴 희로애락”이라며 “사선을 오갔던 생과/ 당신이 마침내 이 땅에 남긴 것들에게/나 역시 그저 좀 더 나은 어른이길”이라고 노래한다. 앨범 재킷 사진도 윤형근의 <청색>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후 공개된 RM의 집 침실에도 그의 작품이 걸려 있어 윤 화백 작품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과시한 바 있다.

하지만 윤 화백의 그림은 쉽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누리끼리하고 어둡고 조용한 작품으로 ‘과연 이게 그림인가?’ 할 정도로 단순하다. 어렵게 보이는 그의 작품에 대해 RM은 “서양과 동양, 아시아와 한국 스타일의 완전한 조합”이라며, “가끔 피곤하거나 힘들 때 작품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RM의 미술 안목과 삶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젠 ‘RM이 좋아하는 화가’로 더 유명해진 윤형근 화백은 미술계에서는 ‘침묵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대규모 전시를 연 이후 미술계에서 집중 조명됐다. 2019년 정부에서 이탈리아 베니스로 수출한 첫 국내 전시로도 기록됐다. 당시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와 맞물려 전 세계 미술인에게 ‘한국의 단색화’로 각인된 전시였고, RM은 바쁜 활동 중에도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전시를 관람해 화제가 됐다.

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왜 이렇게 어둡게 그린 것인지 좀처럼 알 수 없는 그림은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에서 그 배경이 공개됐다. 누렇게 변한 작가 노트와 일기가 처음 전시되면서 그림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내 그림은 나의 똥이요 몸이요 얼굴이요 가슴이다. 화가 극도로 났을 때 독한 내 무엇이 십분 화면에 배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일기를 쓰듯이 그날그날 기록해보는 것이 내 그림이요 흔적이다.”(윤형근, 1984)

생전에도 말이 없는 작가였던 그의 삶은 그대로 한국 역사다. 점잖고 진중한 이미지와 달리 어두운 시대 울분과 서러움을 삭이며 삶을 살아냈다. 1928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6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등 참혹한 역사적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 파평윤씨 문정공파 대장손으로 아버지 윤용한은 경성고보 출신 지식인이지만 식민지 시기에 낙향해 서예와 사군자를 그린 문인화가였다. 어쩌면 금수저 출신이지만 식민지 탓에 군국주의를 경험하며 녹록지 않은 인생이 이어졌다. 1945년 청주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미원금융조합에 취직했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어 사직서를 내고 지나가는 트럭을 잡아 가출하듯 서울로 상경했다.

194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제1회 학생으로 입학했지만, 미군정이 주도한 국대안 반대운동에 참가했다가 구류 조치 후 제적당한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에는 학창시절 시위 전력으로 보도연맹에 끌려가 학살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기도 했다. 전쟁 중 미술동맹에서 스탈린·김일성 초상화 등을 그려 돈을 벌었고, 피란 가지 않고 서울에서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1956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유신 체제가 한창이던 1973년 숙명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중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중앙정보부장의 지원으로 부정 입학한 학생의 비리를 따져 물었다가, 레닌 모자를 쓴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세 번의 복역과 한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극도의 분노와 울분의 경험은 그를 화가로 이끌었다. 미술교사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작품을 시작한 건 그의 나이 만 45세였다.

그의 그림은 참고 건너온 삶처럼 묵직하다. 형상을 절제한 채 짙은 청색과 다갈색을 기조로 수평 혹은 수직의 획만을 허용한 작업은 무겁고 조용하지만 묘하게 현대적이다. 면포나 마포 그대로의 표면 위에 하늘을 뜻하는 청색과 땅의 색인 암갈색을 섞어 만든 오묘한 검정을 큰 붓으로 푹 찍어 내려 그은 것들이다. 누리끼리하고 검은 화면의 그림을 작가는 스스로 ‘천지문天地門’이라고 명명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블루blue는 하늘이요 엄버umber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라 했고 내 그림의 구도는 문이다”라고 했다. 처음부터 어두운 작업은 아니었다.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수화 김환기1913-1974의 영향을 받아 밝은 색채를 사용했다. 작업이 변한 건 1973년, 반공법 위반의 누명을 쓰고 서대문형무소를 다녀온 후 색채를 잃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화가’ 김환기와 윤형근은 특별한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 윤형근이 처음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입학시험을 보러 간 날 시험감독관이 김환기였다. 그 후 윤형근이 서울대에서 제적당하고 홍익대학교로 편입할 때도 홍대 교수였던 김환기가 그를 이끌었다. 1960년 윤형근이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결혼했고, 두 사람은 장인-사위의 관계가 되었다.

윤형근은 김환기를 넘고 싶었다. 김환기의 그림이 밝고 서정적이면서 세련됐다면, 그의 작품은 한결같이 수직으로 가른 검은 기둥이 꼿꼿한 추상 작품이다. 윤형근은 생전 “내 그림은 잔소리를 싹 뺀 외마디를 그린다”고 했다. “화폭 양쪽에 굵은 막대기처럼 죽 내려 긋는다. 물감과 널찍한 붓 그리고 기름, 면포나 마포만이 내 작품의 소재다.” 누렇고 검은 그림은 천조차도 평범한 마포나 면포일 뿐이다. 불투명한 백색 도료를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표면에 슬쩍 발랐다. 후기 작품은 한층 더 간결해져 색채는 미묘한 차이가 제거된 순수한 검은색으로 변했다.

미니멀한 조형미와 순수예술성이 극진한 작품은 해외에서도 인기다. 2017년 세계 최정상급 갤러리인 뉴욕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 갤러리에서 연 개인전에서 완판된 데 이어 올해 파리에서 열린 데이비드 즈워너 새해 첫 전시도 대박이 터졌다. 아트페어도 아닌 개인전 개막식에 1천여 명이 방문해 이례적이라는 호평과 함께 성황리에 열렸다. 그의 100호 작품은 현재 미술시장에서 4~5억 원 선에 시세를 형성하고 있다. 윤형근은 그의 장인 김환기 화백의 죽음에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고, 허무할소다”라고 일기를 썼는데, 그도 79세인 2007년 12월 28일 담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박현주 뉴시스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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