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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6월호

국악 명인 김덕수장구쟁이의 신명으로, 장구재비의 경륜으로
중요한 업적을 남긴 명인·명장의 생애는 종종 그가 몸담은 분야의 역사와 포개지곤 한다. 한국 전통음악, 그중에서도 타악의 현대사 일부는 아마 이 사람의 인생과 포개질 듯하다. 예순아홉 인생 중 65년을 국악 장단과 함께한 김덕수. 남사당패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무대의 신명과 환희를 처음 맛보고 이후 몸과 마음, 삶 구석구석을 음악으로 채운 그는 세계 무대에서 전설적인 아티스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국 음악을 세계에 알렸다. 드라마에 비할 바 없는 그의 음악 인생이 지난 5월 말 음악극 <김덕수전傳>으로 무대에 올랐다. 두 시간의 극에 꾹꾹 눌러담고도 여전히 넘치는 그의 음악 인생은 아직 갈증이 가시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다. 특별한 공연을 앞두고 바쁜 5월을 보내던 김덕수 명인을 만나 그의 65년 음악 인생에 대해 먼저 입담을 청해 들어보았다.

5월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에 소나기가 무섭게 쏟아졌다. 근처 카페에서 세종문화회관까지 3~4분간 걸었을 뿐인데 접이식 우산이 물기를 머금어 묵직해졌다. 우산을 탈탈 털고 들어선 세종문화회관 사무동에서 평생 폭우를 제조해 온 이가 필자를 반갑게 맞았다.
김덕수 씨. 사물놀이에서 꽹과리가 천둥이라면 장구는 비를 맡는다. 투두둑, 투두둑 쏟아지는 비처럼 쉴 새 없이 후려치며 장단을 쏟아낸다. 김 씨는 올해 우리 나이로 예순아홉이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 특히나 거침없는 입담이 그를 더 뜨겁게 만든다.
“젊었을 때는 진짜 근육 파워로 (연주를) 했어요. 내가 차범근씨보다 근육이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죠. 근데 지금은 그 나이를 지나왔잖아요. 세계적인 스포츠 선수들이 그렇듯 저도 이제는 호흡을 이용해 좀 더 편안한 자세로 연주하게 됐지요. 근육도 필요없는 것들은 사라지고 전체적으로 동글동글 부드러워졌고요.”
단신에 단단한 체구. 사각형 얼굴에 위로 올려붙인 머리칼. 이 사람은 지금 거의 레고 블록 같아 보인다. 음악극 <김덕수전傳>(5월 28~31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은 바로 그의 인생을 다룬 무대였다. 사물놀이 창시자로 알려진 그의 생은 드라마, 그 자체였다. 극(劇)적이었고 영화 같았지만 전기(傳記)나 전기(傳奇)로 다룬다 해도 손색없다.

한국의 장단으로 세계 무대를 호령하기까지

“첫 무대. 그 환희적 경험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 없었을 겁니다.”
김 씨가 겨우 다섯 살 때였다. 남사당패였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새미(어른 어깨 위에서 춤추는 무동)로 처음 청중 앞에 선 것이.
“(충남) 조치원 난장이었죠. 어른 어깨 위에서 재주 펴는 것은 다섯 살짜리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었어요. 어른 세 명 위, 그러니까 거의 건물 4층 높이에서 아래를 내려다봤어요. 천하가 다 내 아래 있는 느낌이었죠. 그때의 감각이 지금도 아롱아롱하네요. 내 청춘, 내 시간…. 바로 (무대에 오르는) 그 순간을 위해 지금껏 바친 셈입니다.”
김 씨는 강렬한 첫 경험 이후로 그런 경험을 수도 없이 더 했다고 했다. 그 누구도 맛보지 못하는 연주자의 울림과 환희. 그는 “연주하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고 사는 것”이라고 했다. 남사당은 김 씨 예술의 근간이 됐다. 인형극, 줄타기, 땅재주, 탈춤, 풍물…. 전통문화의 맥이 끊기기 직전, 마지막까지 우리 백성들과 애환과 한, 기쁨을 함께한 것이 남사당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 레퍼토리 자체가 내게는 평생의 영양소가 됐다”고 털어놓는다.
남사당패의 일원으로 갖은 재주를 부리며 사랑을 받던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며 신명의 세계를 열어준 아버지와 이별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남사당놀이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공연이 부자가 함께한 마지막 무대였다. 서울의 국악예술학교(현재의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6년간 국악 전반을 배우고 익혔다. 그러나 그의 교실은 학교 안에만 있지 않았다. 세계가 그의 교정이요, 교실이 됐다.

“중학교 1학년이던 1965년, 문화예술단의 일원으로 전 일본 투어를 한 게 시작이었어요. 도쿄·나고야·오사카·후쿠오카·홋카이도까지 민단 조직이 있는 곳은 다 찾아갔습니다. 공연의 1부는 국악, 2부는 가요로 꾸며졌죠. 그래서 고복수·황금심·김정구·고운봉·장세정 같은 어른들과 함께 다녔어요. 나중에는 위키리·남일해·남상규·오기택·이미자·박재란 같은 분들과도 다녔죠. 매년 갈 때마다 조금씩 출연진이 바뀌었거든요.”
1968년부터는 리틀앤젤스예술단과 함께 월드투어를 다녔다. 국악의 현대화에 대한 의지와 감각을, 김 씨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머리가 아닌 몸과 마음으로 체득해 갔다.
“에드 설리번과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가 진행하는 쇼에 출연했죠.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인기 피아니스트 리버라치의 힐튼 호텔 쇼에 오프닝 게스트로 서서 공연했고요. 우리 다음 쇼가 엘비스 프레슬리였는데, 당연히 프레슬리 옆에서 밥도 먹고 연습하는 광경도 다 지켜봤죠.”
어린 나이였지만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쇼 프로모터들이 어떤 공연을 원하는지, 다양한 관객의 혼을 어떤 것이 쏙 빼놓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고찰했다. 전통의 본질과 가치를 철두철미하게 지키면서 우리 문화만이 가진 매력을 세계 대중에게 어떻게 호소할까 고민했다.
“우리 조상들이 만든 천체학에서 출발합니다. 하늘·땅·사람에 관한 원리.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어가 있죠. 한국어의 구조·억양·어법과 가장 흡사한 것이 우리의 장단입니다. 어느 나라 음악이든 리듬이야말로 그 민족의 근본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라고 저는 알아요. 그것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느냐가 ‘답’일 수밖에 없는 거지요. 브라질 축구를 그냥 브라질 축구라고 안 하고 왜 ‘삼바 축구’라고 할까요. 모든 것은 리듬입니다.”
1978년 사물놀이를 시작했다. 2~3년간 웃다리 풍물의 가락을 음악적으로 긴장감 있게 구성해 갔다. 함께 실험할 사람이 있었고, 그것을 풀어낼 공간이 있었다. 1970년 오사카 엑스포를 인연으로 만난 건축가 김수근 선생이 ‘공간 사랑’을 선선히 내준 덕이다. 서서 휘몰아치던 것을 들어앉아 양껏 두드리니 기존의 서구식 공연에 익숙한 이들까지 혼이 나가듯 사물놀이에 빨려들었다. 광복 이후 정악과 아악에 치여 무시당하던 민속악, 타악이 다시 조명을 받게 됐다. 노동요·군악으로 우리 삶에 밀접하게 자리했던 그 장단들이 도깨비 떼처럼 다시 쏟아져 나와 세상을 호령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일으킨 파란은 해외까지 큰 물결이 돼 이어졌다. 1983년, 워너뮤직 산하의 유명 레이블 ‘논서치’에서 사물.놀이의 사실상 첫 녹음물인 <Drums and Voices of Korea> 앨범이 나왔다. 1993년에는 독일의 세계적 음반사 ECM이 사물놀이와 오스트리아 그룹 ‘레드선’의 합작 음반을 제작해 내놨다.
“우리 장단을 치면 신기하게 흑인도 백인도 다 이렇게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덩실대는 신명이 우리 신명인 셈이죠. 그것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말마따나 “쟁이는 쟁이를 알아준다.”
“음악가들끼리는 하나입니다.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상대가 갖고 있을 때 손 내밀고 악수하는 것입니다. 장르는 필요 없죠. 한 아티스트만이 갖고 있는 어떤 영적인 에너지, 그것을 느꼈을 때 상대가 누구든 ‘콜’을 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주고받기가 이뤄집니다. 우리 장단의 신명과 맛을 그 친구가 갖게 되는 거죠. 그것을 언젠가 어떤 음악에서 표출하겠지요.”
1987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축제 ‘라이브 언더 더 스카이’는 재즈의 전설들이 모인 자리였다. 당시 김덕수 사물놀이는 마일스 데이비스·웨인 쇼터·잭 디조넷 같은 거장들과 같은 무대에 섰다. 올림픽을 비롯한 세계적 행사에 숱하게 출연한 김 씨 자신도 “지금도 생각하면 꿈같다”고 술회하는 공연이다. 2010년 스티비 원더 내한 공연 찬조 출연도 잊지 못할 쇼.
“공연이 끝난 뒤 스티비 원더가 제 분장실로 찾아왔어요. 고맙다고 인사를 하러 와서는 한 30분 동안 같이 놀았죠. 즉흥 음악으로요. 입으로 외치고 손으로 집히는 대로 때리면서요. 그걸 누가 말려요? 너무 좋아서 그러는 건데.”
재즈는 사물놀이에 끝없이 구애의 메시지를 보냈다. 힙합·록과도 그는 수시로 놀았다. 몇 년 전부터는 헤비메탈 밴드와 결합한 ‘일렉트릭 사물놀이’로도 활동 중이다. 그는 “우리 세대가 록 세대”라고 잘라 말했다.
“젊은 시절, 아침에 일어나면 록음악부터 틀었죠. 엘비스 프레슬리·지미 헨드릭스·핑크 플로이드·밥 딜런…. 그런 세계의 조류와 함께 숨 쉬면서 세계의 감각이 시나브로 몸에 뱄을 것입니다.”
김 씨는 사물놀이가 여러 장르와 두루 화합할 수 있는 비결을 자신의 재주보다 우리 장단이 품은 원초적 개성과 매력으로 본다.
“제가 모든 장르와 작업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장단의 신명이 독특하며 우리만 가진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수백 종의 전통 리듬 패턴이 있어요. 한글이 포용력이 강하다고 하듯, 우리 장단은 비트에 메트로놈을 갖다놓고 맞추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프레이즈가 길고, 혼합박이죠. 장단인데 선율 같기도 하고요. 서양이라면 3박과 2박이 결합하면 머리가 둘인 셈이지만, 우리는 5박 전체가 하나의 머리와 꼬리를 갖죠. 극적인 기승전결이 한 프레이즈 안에 90% 이상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 대단하죠.”

국악 교육과 레퍼토리 개발이라는 과제

사물놀이를 들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볐지만 그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국악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향해 갈 길이 굽이굽이 멀다고 본다. 첫째도, 둘째도 교육이 중요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우선, 국내 유·초등 교육을 바꿔야 합니다. 초등학교에 가면 제일 먼저 가르치는 국악기가 단소죠? 소리 내다가 끝납니다. 그러지 말고 타악부터 가르쳤으면 해요. 세마치 장단을 ‘덩덩따궁따’의 글자로만 말고, 노래로 춤으로 즐겁게 가르쳐야 합니다.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에게 전통적 유아교육학이 있었겠죠. 끊어진 그 맥을 한번 다시 살려봐야 합니다.”
국악의 해외 보급 역시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세계의 음악학 논문은 물론 교과서에도 국악이 실려야 하는 시점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사물놀이 창단이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영국의 일반 음대에서 사물놀이 강의를 시작했다는 것을 그는 의미심장하게 본다.
“백번 이야기하지만 교육입니다. 한국이 살길은 그것입니다. 저들이 갖지 않은 꽹과리·징·장구·북만 그곳 교실에 들어간다면 우리 청년들도 들어가게 되고 자연스레 가무악을 함께 가르치게 돼 있어요. 우리만이 가진 흔드는 맛과 멋이 있어요. 현악기는 농현을 하죠. 그들이 고저장단의 특성을 이해하면 우리의 종합예술이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그 단계를 지나면 현지에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겠지요. 앞으로는 한국 음악의 특이한 멋을 어떻게 세계인들이 즐겁게 함께 공유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1998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희과 교수로 교편을 잡은 김 씨는 2018년 퇴임할 때까지 20년간 후학을 길렀다. 그 뒤에는 한국 전통 장단을 집대성한 교재를 집필하고 있다. 해외의 음악 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보편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숙제다.
환희의 폭풍 속에 살아온 것 같지만, 어디에도 완벽하게 행복한 인생이란 없는 법이다. <김덕수전傳>에서 김 씨는 그 그늘도 보여주고자 했다. 가장 깊은 계곡은 그의 지음(知音), 김용배(1952~1986)에 얽혀 있다. 죽마고우이자 사물놀이의 상쇠.
“김용배 군은 저와 그야말로 실과 바늘 같은 사이였죠. 저와 모든 음악적 성향이 같았기에 아이 때부터 매일 음악 얘기를 하며 죽자사자 붙어 다녔거든요. 그가 국립국악원으로 옮겼을 때 제겐 분노와 배신감이 컸어요. 그가 쓸쓸한 죽음을 맞게 된 뒤 밀려온 자책과 후회 등은 아직도 생각조차 하기 싫을 정도예요.”
김 씨의 눈가가 두 번째로 젖어들었다. 앞서 다섯 살 때 새미로서 세상을 바라본 기억에서 나온 것이 기쁨의 진액이었다면, 이번 것은 그 성분이 조금 다른 듯했다.
65년 음악인생의 안팎과 음지, 양지를 넘나드는 음악극 <김덕수전傳>은 김덕수 자신에게도 꽤나 큰 도전이다. “하루하루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기분으로” 해왔지만 그 모든 시간을 이제 와 하나의 공간 안에 두 시간 동안 갈무리해 돌아보는 작업은 쉽지 않다.
“국악예술학교에서 관악을 전공하던 장면, 독백하며 춤으로 스토리를 풀어내야 하는 장면, 처음 사물놀이를 만들어내던 장면…. 그때 그 시절을 돌이켜 생각하며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연주와 몸짓을 최선을 다해 제대로 재현하려고 하니 상당히 힘이 듭니다.”
김 씨는 그래도 어느새 밝은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년이면 제가 칠순인데, 옛날 같으면 고려장하고 뼈조차 없어졌을지도 모르잖아요. 이제는 뭐가 올지 모르죠. 늘 질문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 숙제는 저의 뜻만이 아니고 조상님과 하느님의 뜻 아니겠어요?”
그에겐 아직 굳센 경륜과 호흡이 있다. 단전호흡을 하듯 정중동, 동중정의 파워를 뿜어내는 게 그의 비법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언젠가 내리막길은 올 것이다. 노가수가 언젠가 무대에서 내려오듯, ‘장구재비’도 어느 날에는 채를 그만 내려놔야 할 것이다.
“가수들은 음정이 떨어진다면 타악도 비슷합니다. 득음, 즉 가진 것을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이 더는 안 된다면 그만 해야겠죠.”
교육 못잖게 그가 붙들고 있는 화두는 레퍼토리의 개발, 그리고 난장의 브랜드화다. 재즈 거장들이 자신이 지은 테마를 ‘스탠더드’로 만들어 몇 세대고 후세에 전파하며 끝없는 즉흥 연주의 물꼬를 터내듯이, 국악에서도 그런 레퍼토리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난장은 그가 오래전 대학로에서 ‘난장뮤직’을 운영할 때도 이미 염두에 둔 개념이다.
“난장이란 어마어마한 철학입니다. 이건 제가 끝까지 갖고 갈 겁니다. 한마디로 혼돈과 질서가 공존하는 장이죠.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같은 제의를 비롯해 소도 시대까지도 연결된 개념입니다. 현대로 오고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변화하면서 빠르게 사라져갔죠. 난장의 공간이던 동네에는 젊은이들이 사라졌죠. 젊은이들의 가치관마저 달라지고 있잖아요. 우리의 문화적 자긍심을 가질 만한 것이 다시 동네마다 되살아났으면 합니다.”
글 임희윤_《동아일보》 기자
사진 공간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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