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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12월호

뮤지션 하림 음악의 이유
하림은 스스로를 공연, 음악, 대중음악계에 걸쳐져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2004년 2집 <Whistle in a Maze>를 발표한 이후 15년째 음반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공연 브랜드에서 음악 작업을 하며, <비긴 어게인> 같은 음악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한다. 음악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음악을 통해 세상에 대해 알아가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음악가의 삶이라는 하림을 만났다.

수요일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왔다. 서울시 금천구 시흥대로의 작은 건물. 우산을 탈탈 털고 올라간 4층에서 쇠문을 삐걱 여니 90m2 정도 되는 공간이 나왔다. 쌀쌀한 오전 11시, 낯선 공간에서 날 반기는 커피 향기가 못 견디게 좋았다.
이곳은 뮤지션 하림(본명 최현우)의 작업실이다. 커다란 여행용 가방 두 개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큰 것은 오렌지색, 작은 것은 빨간색. 커피 기계가 세 종류나 있다. FM 라디오는 들릴락 말락 작은 음량으로 존재를 알리고 있다. 그 밖에 멋없이 쌓여 있는 장비들. 이를테면 각종 오디오 장비와 컴퓨터, 조율기와 녹음기, CD와 LP, 가면극용 가면, 스쿠버다이버용 고무옷, 작은 피아노…. 창가에는 시타르, 마두금, 류트 같은 매우 이국적인 악기들이 도열했다.
민머리에 안경을 낀 하림이 갓 끓여온 커피 잔을 내밀었다. “너무 진하면 말씀해주세요.” 한쪽 벽에 낡은 타자기로 쳐서 붙여둔 메모가 떠올라 물어볼까 망설였다. ‘최악의 하루’에 대한 글. ‘나는 무얼 하는 사람일까’라며 맺은 글.
낮은 실내온도 탓에 잠시 몸서리를 친 뒤 사무적인 태도 약간에 친절과 진심을 섞어 하림과 대화를 시작했다. 발밑을 데우는 온열기가 고마웠다. 하림은 마치 본인이 인터뷰어가 된 듯, A4 용지를 여럿 덧댄 메모판을 가져왔다. 종이에 동그란 벤다이어그램 3개를 그렸다. 잠시 후에는 피라미드 두 개를 붙인 듯한 커다란 마름모 하나를 그 오른쪽에 그려 넣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벤다이어그램을 그려놓고 가리키며) 이것은 공연판, 이 원은 음악판, 그리고 이쪽은 방송 활동을 하는 대중적 음악판이에요. 세 개의 원이 겹치는 아주 좁은 넓이가 있는데 제가 드물게 바로 거기에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요?
“요즘은 바로 이쪽 원, 즉 공연판에 주로 많이 있어요. 여러 공연 시리즈를 무대에 올리고 있는데, 어떤 단체나 기관에서 요청이 오면 1시간에서 1시간 반짜리 공연을 만들어주는 일을 주로 하죠. 그러다 보니 음악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 것인가를 피부로 느끼고 있어요.”
돌아보면 하림은 대중음악계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천재였다. 2001년, 거의 모든 곡을 스스로 작사·작곡·편곡한 1집 <다중인격자>로 데뷔해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 <출국>, <난치병> 같은 곡이 인기를 얻었다. 두텁고 허스키하며 독특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쏟아내는 한국적 R&B, 음반 곳곳에 박힌 개성 있는 음악적 아이디어들은 범상치 않은 싱어송라이터의 출현을 선포했다. 그 이후 박정현의 <몽중인>, <You mean everything to me>를 작곡하며 탁월한 감각을 과시했다. 그러다 문득, 2004년 2집 <Whistle in a Maze>에서 월드뮤직을 들고 나왔다. 정말이지, 문득이었다.

음악을 처음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초등학교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동네 피아노학원에 갔다가 재능과 흥미를 발견했어요. 그렇게 좀 뚱땅거리다 중학교에 가서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기타를 치게 됐죠. 피아노 치며 가요도 불러보게 됐고, 중2 때부터 작곡이란 걸 시작했어요. 작곡이란 뭘 창조해내는게 아니에요. 말하는 것과 비슷해요. 남들이 다 아는 단어를 가지고 자기만의 문장을 구성해가는 것과 같죠. 음악은 아이들이 말을 배우듯이 시작하게 되죠. 자작곡을 여자친구에게 들려주다 학교에 소문이 났고 고등학교 때는 록 밴드에 들어갔어요. 음대에 가려고 입시를 준비하다 떨어진 다음에는 그냥 점수에 맞는 학교에 들어갔죠. 입학한 뒤에 고등학교 때 알게 된 음악하는 형들과 같이 음반이나 내보자고 의기투합했어요.”
그렇게 1년간 작업해서 낸 음반이 1996년 3인조 그룹 ‘벤’(VEN)의 1집이다. 그는 리드보컬이었다.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하림이 음악판에 본격적으로 몸을 담는 데 주춧돌이 돼줬다.
“‘벤’ 활동을 하면서 제 재주를 팔아서 드라마 음악을 만들고 남들에게 곡도 주면서 조금씩 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가난한 20대를 보냈죠. 예술의 기쁨이 10대, 20대 때 가장 크다고 학자들이 얘기하더군요. 힘들어도 재밌었죠. 그러다 입대를 했고 그간의 경력을 토대로 공군 군악대에서 군 홍보 영상이나 방송에 들어가는 음악을 만들고 악보를 복사하고 군가를 편곡했어요. 머잖아 홍보관리소라는 곳에 지원해서 갔더니 (윤)종신이 형이 선임으로 있더라고요. 형이 ‘제대하고 뭐 할래?’ 묻더군요. ‘가수 해야죠’라고 답했더니 ‘그럼 나랑 하자’고 하더군요.”
윤종신은 말년 휴가를 다녀오면서 계약서를 써왔다. 하림은 내무반에서 그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계약 조건 중 하나는 ‘제대 후 석 장’.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2004년 2집 이후 15년째 3집이 없으니 말 그대로 ‘종신 계약’이 될 판이다.
혹시 새 음반을 낼 계획은 정말 없나요?
“종신이 형과 계약이 한 장 남아 있는데, 저는 아무래도 가요계에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3집) 안 내고 그냥 이렇게 사는 거죠. (주류 가요에 대한) 감도 좀 잃은 것 같아요. 최근에 성시경 씨가 (작곡을) 부탁해서 피아노 앞에 몇 시간씩 앉아 있는데 도통 감이 안 잡히더라고요. 어쨌든 이러나저러나 저는 음악이란 걸 계속하고 있잖아요. 이제는 앨범을 내고픈 생각도 좀 없어졌어요. 앨범을 낸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음악 활동에 있어 되게 작은 부분이구나, 하는 걸 느껴요. 가수 활동보다 음악이란 것의 범위가 훨씬 더 넓은 것 같아요. 요즘 제가 동료들과 하는 스토리텔링 음악 공연에는 팬덤이 있는 가수의 콘서트에서는 느낄 수 없는 뭔가가 있어요. 푯값 5,000원을 내고 평생 처음 공연이란 것을 보러 오신 어르신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일, 너무 뿌듯해요.”
요즘 하림이 가장 애정을 갖고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할머니의 바다’다. 전남 해남군, 하림은 자신의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남은 빈집에 음악가들의 레지던시를 만들려고 한다. 이는 몇 년 전부터 진행한 ‘도하(渡河) 프로젝트’의 연장선에 있기도 하다. 2012년 홍익대 인근의 부동산값이 폭등하며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하림이 아이디어를 내 실행에 옮긴 프로젝트다.
“금천구의 빈 건물에 예술가들의 작업공간을 마련하는 일이었죠. 하필 그곳이 옛날에 육군 도하부대가 있던 자리였어요. 홍대에서 강을 건너서 온 셈이기도 하니 여러모로 ‘도하’가 말이 됐죠.”
‘할머니의 바다’라고 하니 강에서 바다로 간 건가요?
“네. 시골 폐촌에서 음악가들이 뭔가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했어요. 서울을 중심으로 모든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 피로감이 온 것 같기도 했죠. 서울은 사람도 많고 할 것도 많은데 지방은 몇몇 공연장을 빼면 문화 사각지대가 많더라고요. 다행히 그곳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줬어요. 최근에는 해남 대흥사에서 ‘사랑나무 음악회’라는 걸 했어요. 음악은 듣는 사람들이 중요해요. 그 순간을 시작으로 제가 하는 음악이 그들, 즉 관객들의 음악이 되니까요. 그게 참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고향의 봄>을 아코디언으로 연주하면 할머니들이 막 우세요. 우시는 할머니들보다 더 어린 할머니가 그걸 보며 참 신기하다고 하세요. 저 할머니 우는 걸 처음 본다고. 무엇이 그분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일까요.”
하림의 눈시울이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1 월드뮤직을 엮어 이야기가 있는 공연인 <집시의 테이블>을 만들었다.
2 아랍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국경 없는 음악회’에서 노래를 하고 선물을 받고 있다.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더 있죠?
“‘국경 없는 음악회’가 있어요. 이주노동자들의 무료 진료소인 라파엘 센터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씩 여는데, 환자분들에게 직접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공연이에요. 저도 한 곡 정도는 부르지만 제 공연은 결코 아닌 셈이죠. 이주노동자들이 자기 노래를 하고 마음 편히 모국어를 쓸 수 있는 장을 만들어드려요. 3년 정도 해왔는데 앞으로 여건이 되면 노래자랑 1등한 분은 고향도 보내드리고 가족들이 오면 호텔 숙박도 챙겨드리고 하면 좋을 것 같아요. ‘국경 없는 음악회’를 하면서 느낀 것은, 음악이 저 사람들의 눈빛을 순식간에 변화시키고 한순간에 고향으로 데려갈 수도 있구나, 하는 거예요.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그들의 고국은 대개 가난하지만 역사가 오래된 만큼 유구한 전통문화를 가진 곳이 많아요. 몸짓 하나, 춤사위 하나에 그런 DNA와 자부심이 배어 있다는 것을 무대 위 그들에게서 볼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일하면서 그런 것들을 못 꺼내놨던 거죠. 무시당하니까,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음악가로서 자신에 대해, 또 사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인 것 같아요.
“고민이 엄청 많아요. 어떤 일이든 이유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스타일인 것은 맞아요. ‘나는 이것을 왜 하고 있는 걸까.’ 예전에는 제가 주도적으로 음악을 했다면, 지금은 음악을 통해 세상에 대해 알아가는 것 같아요. 음악은 오래됐고 늙지 않잖아요. 같은 형태로 수천 년 동안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음악의 존재감을 느끼면서 좀 더 겸손해지기도 해요. ‘내가 음악을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구나. 음악이라는 커다란 강물 안에 나라는 사람이 잠깐 발을 담갔다 나오는 거구나. 난 그냥 재주 부리면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만들어가는 존재구나. 그게 내 삶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죠.”
거의 해탈한 것 같네요.
“그냥 음악이 제 옆에 있다는 게 감사해요. 저는 과학자들이 연구한 음악에 관한 책을 많이 봐요. 뇌과학, 고고학, 진화생물학 등 여러 관점에서 음악의 의미를 정리해놓은 책들을 좋아해요. 예전에 제가 가요를 하는 사람으로서 가지고 있던 스스로 특별하다는 생각, 연예인이라는 생각이 그런 글들을 읽다 보면 점점 사라져요. 무대에 서면 내가 멋지게 연주하는 것보다 여러 관객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한두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게 정말 기적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순간이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인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것. 특별한 것은 그거예요.”
무대 위에서 가장 행복해지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고마움을 느끼는 정도죠. 예전에는 예술가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어요. 예술가는 특별하고 멋있고 위대하다고 배우잖아요. 그게 무너지죠. 무대에서 행복하다는 생각마저도 우월감일 수 있어요. 무대에서 느끼던 예전의 행복감이란 진짜 행복감이라기보다는 음악에 기대어 내가 완성됐다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학자들이 행복이란 크기가 아니라 빈도가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어떤 위대한 행복이 있어서 거기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자꾸 자주 오는 게 좋은 거라고. 음악을 벗어나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를테면 일상에서도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 결혼(올해 5월)도 한 것 같아요.”

3 폐군부대 목욕탕을 개조하여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대안공간을 운영했다.

음악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데 어떤 책이 도움을 줬나요?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음악본능> 같은 책이요. 제가 하는 일에 대해 잘 이해하는 것이 참 중요하더라고요. 어차피 사람들은 시장의 논리로 살죠. 그 논리가 너무 달콤해서 시장 이전의 생각은 모두 그 달콤함에 잠식당하고 점령당해버리지 않았나 싶어요. 최초의 인간이 음악을 한 흔적이 있는데 4만 5,000년 전 뼈피리라고 해요. 그때는 도시도 없고 돈 문제에 골머리를 썩던 시절도 아니었는데 피리의 구멍이 6개였더라고요. 지금처럼 똑같이 6개….”
공연 브랜드들이 더 있죠?
“<천변쌀롱>은 1930년대 음악으로 스토리를 구성한 음악극이에요. 2009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가서 음악극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 이런 종류의 공연들을 시작했어요. <집시의 테이블>은 2010년에 시작했으니 내년이 10주년이에요. 아프리카에 가서 만들어온 1, 2분짜리 짧고 장난스러운 노래들을 기반으로 만든 공연 시리즈로 <아프리카 오버랜드>도 있죠. <해지는 아프리카>라는 인형극도 거의 10년 했어요. 최근에는 국악 음악가들과 교류하는 밴드 ‘블루카멜앙상블’과 <먼 아리랑>이라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100년 전 독일에 포로로 끌려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기록한 <아리랑> 이 있다는 얘기를 3년 전쯤 들은 적이 있어요. 독일부터 한국까지 루트를 그려서 도상에 있는 음악을 다 넣고 음악극을 만들어 그분들의 <아리랑>을 우리나라까지 데려오자는 생각을 했어요. 아랍, 발칸 등 각 문화권을 대표하는, 소리가 좋은 악기들을 섞어서 작업해요. 역사를 보면 보통 전쟁에서 이긴 자들이 많은 것을 차지하잖아요. 그렇지만 진 사람들의 음악이야말로 결국 세계로 퍼져나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국의 흑인, 그리스, 터키, 또 집시들의 음악….”
R&B로 데뷔했는데, 월드뮤직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1집을 낸 뒤 사람들로부터 어떤 음악가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스티비 원더, 브라이언 맥나잇…. 답하다 보니 근데 그 사람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음악을 찾아서 떠나보자는 생각에 무작정 배낭을 메고 2004년에 월드뮤직 엑스포 ‘워멕스’를 보러 독일에 갔어요. 특유의 음악이 좋기로 이름난 나라를 차례로 돌았죠.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낯설고 신기한데 울림이 있더라고요. 관객이 많지도 않은데, 연주가 특별히 대단하지도 않은데, 참 행복하게 음악을 하더라고요. 궁금했어요. 그들을 따라 버스킹을 시작했어요. 2005년에 홍대 길거리 공연을 시작했죠. 무대가 높은 이유는 음악가가 잘나서가 아니라 관객들이 잘 보이게 하기 위한 거구나, 깨달았죠. (메모장에 그린 마름모를 가리키며) 이 꼭대기에 있는 시장에 따라서 음악계 전체가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중요한 건 이 아래예요.”
JTBC <비긴 어게인>에 출연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박정현 씨가 같이하자고 하더라고요. ‘버스킹 하면 하림이지’ 하고 생각했대요. 매니저가 따라가는 게 아니라 ‘리얼’로 고생하는 프로그램이었어요. 박정현 씨 소속사 대표님이 저한테 ‘정현이 좀 잘 챙겨줘’ 하고 부탁하더라고요. 가서 함께 고생하면서 정말 더 친해졌어요. 포르투갈의 파두 하우스가 굉장히 좋았어요. 이탈리아에서 계단에 앉아 <배낭여행자의 노래>를 불렀던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죠. 사람들이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 그 광장이 소리가 울리는 구조여서 정말 아름다웠어요. 환상적이었죠.”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루잖아요. 몇 가지나 연주할 수 있나요?
“글쎄요. 저는 컴퓨터 음악으로 시작했어요. 그전에는 피아노 정도 쳤고요. 신시사이저나 컴퓨터에 내장돼 있는 소리의 실제 악기들을 여행 다니면서 보는 게 저한테는 엄청난 일이었어요. 공학자들이 ‘샘플링’으로 뜬 소리들은 연주를 고려하지 않은 소리였어요. 아랍의 우드, 그리스의 부주키, 스웨덴의 니켈하르파, 몽골의 마두금, 인도의 시타르…. 외국어를 하나씩 배워가듯, 하면 할수록 매력이 있더라고요.”
뜨거운 커피 잔은 어느덧 식었지만 대화의 기운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어쩐지 이곳에 이렇게 앉아 있은 지 아주 오래된 것 같았다. 창밖으론 여전히 비가 내렸다.
글 임희윤_동아일보 기자
사진 손홍주
사진 제공 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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