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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

서울의 역사를 담은 ‘백년가게’
소중한 것은 시간을 넘어 이어진다

도시는 매일같이 변화한다. 사람이 나고 죽듯이 어느 가게가 문을 닫으면, 어디선가 또 다른 가게가 신장개업을 알린다. 도시 생태계는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잘 눈치채지 못한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변화의 윤곽이 의식된다.

서울 마포구 만리동 고갯길에 자리한 한겨레신문사 사옥 앞에는 ‘육교식당’이라는 백반집이 있었다. 육교 밑에 있는 이름 없는 동네식당이었는데 새로 이사 온 한겨레신문사 직원들이 육교식당으로 부르면서 진짜 육교식당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20년쯤 세월이 흘러 도시정비사업으로 육교가 철거되고 육교식당만 남았다. 새로 입사한 사원들은 육교식당이라는 이름을 보고 육교의 존재를 짐작했다.
또 세월이 흘러 몇 년 뒤 육교식당이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 10여층짜리 오피스빌딩이 들어섰다. 처음 그 이름을 불러주었던 이들은 정년퇴직을 하기 시작했고, 새로 들어온 직원들은 육교식당을 알리가 없다. 동네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그 존재는 흐릿해져간다. 그렇게 사라져간 것이 어디 한둘인가. 지난 반세기, 어마어마한 속도로 내달려온 초고속 도시 서울에서야.
필자는 얼마 전 <서울백년가게>라는 제목으로 서울의 오래된 가게들을 다룬 책을 냈다. 몇 쇄를 찍고, 우수도서로 뽑히는 등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이 꼭 제목이 그럴듯해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6.25 전후 복구를 기점으로 서울이란 도시가 재건의 삽을 뜬 지 60여 년을 훌쩍 넘긴 지금, 국민소득 3만 달러로 선진국 문턱에까지 이르렀다는 요즘, 사람들은 비로소 사라져간 것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그 긴 시간의 풍상을 버텨내고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서울시가 몇 년 전부터 서울의 역사 깊은 상점이나 생활시설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해 ‘살아 있는 문화재’로서 대접하고 널리 알리고 있는 것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런 흐름이 미약하다면, <서울백년가게>와 같은 책이 출판의 기회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도시와 상점은 불가분의 관계다. 지금도 상점이 즐비한 종로는 본래 왕조에 의해 계획적으로 조성된 시전거리였다. 종로 시전거리는 조선 태종 때 그 틀이 짜여졌다. 1,360칸 이상의 점포를 지어 상인들에게 세금을 받고 ‘분양’했다. 만약 우리나라가 식민지와 6.25 전쟁을 겪지 않았다면, 종로 시전거리는 아마도 일본 교토의 기온거리처럼 왕조시대의 전통상점거리로 보존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듯이, 서울에서 왕조시대의 상점은 사라진지 오래다. 종로 시전거리의 뒷골목이었던 피맛골도 2009년 도시정비로 사실상 사라지고 이름으로만 남게 된 게 현실이다. 이처럼 서울에서 오래된 가게의 역사는 1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기 힘들다. 1904년 문을 열었다고 알려진 설렁탕 집이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을 정도다.
서울시의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137곳의 가게와 생활문화시설을 살펴볼 수 있다. 그 가게들을 소개하는 글을 찬찬히 읽다 보면, 지난 100년의 서울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서울의 오래된 가게, 이름하여 ‘백년가게’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서울이 지나온 한국 현대사의 편린을 만날 수 있다. 현대화, 산업화, 서구화 같은 코드가 가게의 시공간을 이룬다. 그런 가게들을 몇 군데 소개해본다.

왕조에서 근대의 도시로

개화기의 근대적인 상점들은 상당수가 일본인에 의해 개업됐다. 이들 상점 중 일부는 해방과 함께 한국인이 그 명맥을 이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는 가게 중 하나가 인사동의 구하산방(1920년대 개업. 이하 괄호 안은 개업 연도)이다. 1920년대 초 일본인이 문을 연 유명한 지필묵 가게이자 골동품 상점이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초등학교를 마치고 이 가게에 점원으로 들어간 가난한 소년이 일본인 주인에게 전문지식을 배워 유명한 골동품 상인이 되고, 해방 후 가게도 넘겨받아 오늘날의 인사동 지필묵 가게로 이어져온 과정은 우리나라가 겪어온 지난 100년의 근대사를 응축하고 있는 듯하다. 낙원동의 낙원악기상가(1970)도 그 바탕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망국의 역사와 마주친다. 낙원동은 왕실악대가 있던 곳. 조선왕조가 망하면서 악대는 뿔뿔이 흩어져 민간 속에서 악사로, 교습소로 명맥을 이었고 그것이 피아노거리(지금의 탑골공원 주변 아케이드에 피아노를 비롯한 악기상점이 있었다)와 1980년대 밤무대 악사들의 인력시장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악기전문상가가 되었다. 서구음악의 본고장이라는 런던이나 뉴욕에도 없는 대규모 악기전문상가가 어째서 서울 한복판에 존재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는 곳이다.

본토 콤플렉스에서 토착화로

많은 전통이 단절되고, 외부에서 들어온 외래문화도 직접적인 검증이 어려웠던 ‘못살고 폐쇄된’ 시절에는 ‘원조’와 ‘본토’가 행세를 했다.
너도나도 원조, 본토라는 간판을 놓고 경쟁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 자체가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시청 옆 을지로 입구의 라칸티나(1966)는 진짜 서양음식을 맛보기 어려운 시절에 생긴 최초의 전문적인 이태리식당이라고 할 수 있다. 맛으로 말하면 한국화된 파스타의 선구격이다. 라칸티나의 스파게티는 중국 산동성의 자작면이 한국에 와서 자장면이 되었듯이 어쩌면 이미 서울 사람 들의 서울 음식이 되었는지 모른다.
남영동의 부대고기 집 황해(1973)는 또 어떤가. 전쟁이 낳은 대표적인 혼종음식이 부대고기와 부대찌개다. 전쟁이 없고 미군부대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음식이다. 미8군기지와 가까운 남영동에 한때 수십 곳의 부대고기 집이 성업했다. 미군부대에서 ‘빼낸’ 냉동육과 햄, 소시지 같은 귀한 가공육을 철판에 굽는 음식으로 ‘한때는 청와대에서 대통령 빼고 다 와서 먹었고’, ‘미군도, 일본 관광객도 미치게 좋아했다’는 가장 한국적인 고깃집이다.
이태원의 재즈클럽 올댓재즈(1976)도 기억해야 한다. 1975년 뉴욕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시카고>가 대히트를 한 이듬해, 그 주제곡 <올 댓 재즈>를 클럽 이름으로 내걸고 발 빠르게 등장한 한국 재즈의 산실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미군 또는 외국인 전용이었지만, 40여 년이 흐른 지금은 주말이면 내외국인 할 것 없이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분단이 낳고, 강남이 키우고

북한 땅에 원류를 두면서 남한에서 독자적으로 남한 음식화에 성공한 것이 냉면이다. 서울의 유명 냉면 집이 저마다 이북과의 연고를 내세우지만, 실제로 그런 집은 드물다. 주방의 출신이 맛을 보장하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서울 마포구 염리동 을밀대(1976)의 1대 주인 고(故) 김인주는 부모가 평안도 사람이지만 경북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평양냉면을 배웠다. 을밀대의 냉면은 대구 음식인가? 평양음식인가? 필자에게 을밀대의 냉면은 서울 음식이다. 오장동의 함흥냉면(1954)은 함경도 사람들이 즐겨 먹던 농마국수가 1.4후퇴 이후 서울에 정착한 함경도 사람에 의해 비빔냉면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함흥에는 함흥냉면이 없다는 말은 그런 점에서 사실이다.
고급 국수를 대중화시킨 안동국시는 또 어떤가. 안동국시의 출생지는 본적지 안동이 아니라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이다. 국수 문화가 발달한 대구 출신의 한 여성이 1980년대에 서울 압구정동에 소뼈(사골)로 육수를 내는 국숫집을 차리고 내건 이름이 안동국시(1985, 현재 소호정의 전신)였다. 강남에 사는 성공한 경상도 사람들이 즐겨 찾으면서 일약 유명해졌지만, 고급 국수를 즐길 수 있는 중산층의 형성이 이 음식을 빠르게 대중화시켰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서울은 그 안에 평양도 들어오고, 함흥도 들어오고, 안동도 들어와 제각기 뿌리를 내리고 또 얽히면서 만들어진 ‘이민자’들의 도시다.

소수 엘리트문화에서 대중문화로

이렇다 할 젊은이들의 문화가 없던 1970년대 이전에는 대학생이 청년문화를 대표했다. 그 흔적은 오래된 카페에 남아 있다. 대학로 학림다방(1956)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다방으로 인정받는다. 서울 문리대가 있던 시절에 학림다방은 숱한 문학과 예술, 인문학의 아지트였다. 대학이 옮겨간 뒤 연극의 중심지가 되면서 점차 엘리트 문화에서 드라마, 가요와 얽힌 대중문화의 흐름 속으로 편입되어갔다. 신촌 연대 앞의 원두커피 집 미네르바(1975)는 지금도 생소한 사이폰커피라는 독특한 방식의 커피로 취향이 분명한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변화무쌍했던 신촌거리에서 이 조그만 카페가 죽지 않고 이토록 오래도록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안국동의 브람스(1985)도 마찬가지다. 30여 년 이상 안국동로터리 한쪽 모퉁이의 2층을 지키고 있는 이 ‘길모퉁이 찻집’은 다방에 들어가보지 않은 사람들도 오가며 눈길에 담을 정도로 우리 가까이 존재하는 옛 ‘인사동 시대’의 유적이다.

개발에서 재생으로

개발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보통의 생각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이익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개발만능주의가 낳은 폐단 때문에, 우리는 지금 재생을 또 다른 방식의 진보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갤러리와 게스트하우스 등을 겸한 서촌의 복합문화공간 보안여관(1942)은 1930년대 문을 연 여관을 헐지 않고 갤러리로 활용하는 특이한 방식의 재생을 시도했다. 문화적 안목이 높은 한 개인의 투자로 만들어진 공간으로, 도시재생에 관한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반면에 세실극장(1976)은 폐관 위기에 놓인 민간극장을 공공이 개입해 되살린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시민의 힘으로 파괴를 면하고 역사를 이어가게 된 가게도 있다. 신촌의 홍익문고(1957)는 재건축사업으로 헐릴 뻔했지만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변 시민들의 힘으로 지켜졌다. 한때는 서울의 3대 약속 장소로 손꼽힐 만큼 많은 서울시민들의 추억이 묻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다시 백년가게의 역사를 이어가게 된 홍익문고, 보안여관, 세실극장 등은 시민과 정부, 각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사례들이다. 홍익문고가 창업 60주년을 기념해 내건 표어는 이 서점 뿐 아니라 많은 백년가게들을 응원하는 시민들의 마음이기도 했다.
“소중한 것은 시간을 넘어 이어진다.”

글 이인우_한겨레 선임기자. 쓴 책으로 서울의 오래된 가게들을 취재해 소개한 <서울백년가게>(2019), 공자의 삶과 <논어>의 내용을 소설 형식으로 소개한 <삶의 절벽에서 만난 스승, 공자>(2016) 등이 있다.
일러스트 김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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