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서울국제작가축제 ‘작가들의 수다’ 경계를 허물다
‘서울국제작가축제’는 국내 독자의 문학 향유 기회를 확대하고,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이 서울을 무대로 교류하는 토대를 만들기 위해 지난 2006년부터 개최해 온 글로벌 문학 축제이다. 10회를 맞은 2021년 축제는 ‘자각Awakening’을 주제로 10월 8일부터 24일까지 온라인으로 열렸다. 국내 작가 17명, 해외 작가 16명 등 16개국에서 33인의 작가가 참여했으며 다양한 프로그램과 문학 낭독 행사가 개최됐다. ‘작가들의 수다’는 다양한 국적 을 지닌 작가들이 세계적으로 이슈가 된 여러 주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이 중 하나의 장르로 정의할 수 없는 소설에 대한 작가들 의 진솔한 대화가 오고 간 ‘경계를 허물다’ 편을 소개한다.
- 일시
- 2021년 10월 10일(일) 오후 5시
- 오은 시인
- 윤고은 소설가, 한국
- 이미예 소설가, 한국
- 예브게니 보돌라스킨Evgeny Vodolazkin 소설가, 러시아
- 맷 러프Matt Ruff 소설가, 미국
- 한국문학번역원, 서울문화재단, 서울디자인재단, 인천국제공항공사
오은
시인
윤고은
소설가
이미예
소설가
맷 러프
소설가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소설가
오늘은 장르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소설을 쓴 작가님들을 한자리에 모셨습니다. 먼저 작가님들의 인사와 축제에 참여한 소감을 들어 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윤고은입니다. 지금 코로나로 거의 2년째 많은 분의 동선이 위축되고 여러 행사가 변화를 도모하는 상황에서 멋진 이야기를 쓴 작가님들과 함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3년 출간된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이 얼마 전 대거상CWADagger을 수상했잖아요. 상을 받고 기쁘기도 했지만 다른 의미로 많이 놀라셨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사실 수상 자체는 굉장히 즐거운 놀람이었는데요. 다른 의미로는 ‘추리소설에 대한 저의 생각’ 같은 질문을 많이 받으면서 문학의 갈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어요.
아마 추리소설인지 아닌지 하는 경계에서 왔다 갔다 한 독자가 많았을 것 같아요. 옆에 계신 이미예 작가님과도 인사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소설가 이미예라고 합니다. 저는 반은 소설가의 마음이지만 절반은 독자의 마음, 즐기는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저는 작가로 산 날이 짧기 때문에 독자였던 기간이 훨씬 길고 앞으로 살날에도 독자의 시간이 더 많을 것 같은데요. 책을 쓴 사람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갑자기 많이 보니 신기합니다.
얼마 전에 《달러구트 꿈 백화점》 두 번째 이야기가 나왔잖아요. 성별이나 연령을 초월해서 많은 독자에게 받고 있는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신지 궁금했어요.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접하고 사게 되기까지 많은 우연과 선택이 필요하잖아요. 제 책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과 “이런 책을 진짜 기다려 왔다”는 깊은 얘기를 나눈 것 같아요. 취향이 맞는 사람을 단시간에 아주 많이 만난 느낌이라 설레고 감사한 기분이에요.
작가님이 독자였다가 작가가 된 것도 우연이 필연이 되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음은 미국의 맷 러프 작가님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 현장에 직접 참석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저는 매우 내향적인 사람인데 팬데믹의 영향으로 이런 축제에 참여하는 게 더 쉬워진 것 같습니다. 멀리서도 행사를 진행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는 것이 참 좋네요.
작가님의 소설 《러브크래프트 컨트리》는 드라마로도 나왔는데요. 본인의 소설이 영상화된 결과물을 봤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여쭤 보고 싶습니다.
먼저 상상하시는 만큼 좋습니다. 저는 영화가 책의 모든 내용을 그대로 포함해야 한다는 작가는 아니지만, 작품을 실제로 보기 전에는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으니까요. 마침내 작품을 직접 보게 됐을 때 책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돼 정말 기뻤습니다. 각각의 사건과 등장인물을 알아볼 수 있었지만 또 다른 방법으로 각색돼 있어서 제 이야기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작가님은 《러브크래프트 컨트리》 후속 편도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속편을 내고 싶긴 한데요. 소설을 두세 권 정도 더 쓰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요. 제가 글을 매우 천천히 쓰는 편이라, 출판사의 생각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쓸 가치가 있는 책은 영감을 준 아이디어를 온전히 사용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속편을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에 대해 아직 할 말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업을 더 하고 싶습니다.
작가님의 독자분들은 후속 편이 나오기를 기다릴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작가님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이 행사는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문화의 교류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작품은 보통 ‘내부적으로 쓰는 산물’이고 민족을 위해 쓰입니다. 좋은 문학은 선동하는 내용을 포함하지 않고 민족의 영혼을 반영하기 때문에 저는 독자에게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고 TV를 끄고 신문보다 문학작품을 읽으라고 권합니다.
작가님께서는 수년간 고대 러시아 문학을 연구하고 계신다고 들 었습니다. 이 일이 작가님께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저는 작가로 살면서 현대 러시아어보다 고대 러시아어를 더 많이 읽어왔는데요. 어느 날 러시아어보다 고대 러시아어의 세계를 더 좋아하는 것을 깨닫고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소설 《라우러스Laurus》를 썼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현대 독자가 고대 러시아의 분위기와 음악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창작자는 장르를 정하지 않는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한 권의 책을 써도 사람들마다 찾아내는 것이 다릅니다. 누군가는 로맨스, 누군가는 미스터리, 누군가는 현실성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네 분의 작가님께서는 하나의 작품이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5살 때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저에게 장르를 혼합할 수 없다고 말해 주지 않았죠. 크면서 스스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을 깨우쳤고, 어떤 장르나 전통을 혼용하는 것에 거리낌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첫 소설 《언덕 위 바보Fool on the Hill》를 쓸 당시 저는 네 권의 소설에서 각각 다른 아이디어를 떼어 와 한 권으로 합쳤습니다. 대실패를 할 수도 있는 방법이었지만, 다행히도 저는 특이하고 다양한 줄거리를 이어서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야기를 쓰는 방식입니다. 운 좋게도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끔 도와준 출판사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점은 작가로 활동하며 한 장르만 고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 책들은 서로 매우 다릅니다. 항상 제가 쓰고 싶은 대로 글을 썼습니다. 출판사의 홍보담당자들은 이런 제 방식을 좋아하진 않을 겁니다.(웃음) 그래도 저는 아주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로서 쓸 수 있는 것에 대한 인위적인 경계를 설정하지 않을 때 그 결과물은 정말 놀랍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장르를 선택해서 그 장르의 글만 쓰는 건 재미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장르에 다른 장르를 추가하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이런 예시로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추리소설이지만 실제로는 철학적이고 심리학적 소설입니다. 제 소설 《라우러스》도 형식적으로 역사소설이지만 레르몬토프Mikhail Lermontov의 표현을 빌리 자면 실제로는 ‘영혼의 역사’에 대한 소설입니다. 그래서 아예 책 표지에 ‘비역사 소설’이라는 문구를 추가했습니다. 그리고 《비행사The Aviator》라는 판타지소설은 역사, 인간의 영혼, 회개의 필요성 등 SF소설과 거리가 먼 내용입니다. 따라서 저는 장르 혼합이 대단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소재가 먼저 떠오르고 나면 거기에 살을 붙여 이야기를 만드는 편인데요.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때는 사실 장르를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처음 하게 된 계기는 공모전 같은 것을 찾아 보고 나서였는데요. 제가 등단을 포기했던 이유 중 하나가 어느 분야에 내야 할지 몰라서였어요. 장르는 쓰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 설명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팀버튼의 영화’라고 하면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렇게 되는 것이 가장 좋은데 나는 그럴 수 없으니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예상했던 판타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떨어질 수 있겠다는 공포가 있었어요. 장르는 어떻게 보면 창작자를 옥죄는 면도 있어요. 창작자는 장르에 국한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고요. 장르가 자연스럽게 섞이면 보는 분들이 신선하게 봐주는 것 같아요.
저도 최근에 장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는데요. 한동안 유행한 MBTI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밤의 여행자들》이 지난해에 영어로 번역 출간된 이후 부여된 수식어에는 다양한 장르가 들어가 있어요. 대거상은 영국 추리작가협회에서 주는 상이기 때문에 ‘추리 소설적 요소가 있나’ 하는 시각으로 보게 됐고요. 판타지 문학상 후보에 올랐을 때는 판타지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에코 스릴러’라는 수식어는 처음 들어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저에게는 장르가 재미있는 장치, 기능을 가진 구분법으로 느껴졌죠. 또 재미있는 건 제가 《밤의 여행자들》을 쓴 건 7~8년 전인데요. 공간 이동을 한 이야기지만, 다른 언어로 출간되면서 시간 이동을 한 셈이기도 하거든요. 시차가 7~8년 벌어진 상황에서 다시 많이 읽히다 보니 장르 구분에 시대 흐름이 반영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를테면 이 책은 코로나 상황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거죠.
한 권의 책을 열 명이 읽었을 때 좋았던 부분을 다 다르게 이야기 할 수 있잖아요. 그게 바로 문학이 가진 매력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어요. 모든 작가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자신의 이름이 장르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가들만의 소설을 쓰는 여정
이제 독자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작품 속 인물과 관계도는 어떻게 만드는지”와 “작가님을 소설로 표현한다면 어떤 장르의 어떤 캐릭터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왔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산책 나간 강아지이고 장르는 코미디 같아요. 처음 산책을 나갔기 때문에 세상이 신기하겠지만 겁도 많겠죠. 그렇다 보니 우당탕탕 여러 사건이 벌어질 것 같고, 장르는 시트콤에 가까운 코미디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소설을 쓸 때 인물 구상을 엑셀에 정리하는 걸 선호해요. 엑셀에 챕터별로 정리하고 그다음에 엮으면서 단락의 위치를 몇백 번은 바꾸거든요. 인물들은 특정 배우의 사진이나 외모가 비슷한 만화 캐릭터를 가져오기도 하고, 옷 사진을 붙여 넣고, 대사나 하루 루틴을 적어놓거나 이름·나이, 즐겨 듣는 음악까지 하나씩 정리해 놔요. 엑셀에 정리하면 뽑아 쓰거나 고치기도 편해요. 이렇게 주변 인물들의 특성이나 제가 가진 면에서 하나씩 뽑아서 인물들에게 부여하는 식으로 다채롭게 만들려고 해요.
제 인생은 조금 밝은 느낌의 미스터리이고, 저는 그 속에서 자기가 주인공인 줄 착각하고 있는 단역이에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자기가 단역인 걸 모르고 뒤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데 배경으로만 묘사되고 끝나는 거죠. 그래도 그 사람, 그 사람의 삶이 있잖아요. 제 인생이 그런 것 같아요. 주인공인 것 같고 여기 나와서 얘기하니까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지만 집에 가면 금방 잊히는 기억이거든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속도가 빠른 것 같아요.
작가님 얘기를 들으니까 저랑 너무 반대인 것이 많아요. 일단 저는 엑셀을 써본 게 20년 정도 전이고요. 인물 관리가 안 되는 유형이에요. 인물에 대해 떠오르는 기억을 모아두고 메모하고 옮기긴 하는데 가끔은 메모마저 관리가 안 되거든요. 그래서 분명 엄청난 메모가 있었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훔쳐 갔다고 혹은 사라졌다고 의심하면서, 그 엄청난 조각은 늘 한 번도 작품에 넣어본 적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아무튼 저는 선택의 기로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주변 사람들에게 선택의 지점에 대해 물어보는 것을 즐기면서 인물을 만드는 편이고요. 저의 장르 역시 시트콤인 것 같습니다. 오은 시인님이 출연하신 시트콤에 저도 같이 들어가 있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떤 캐릭터로 등장하고 싶으세요. 저는 강아지인데 견주를 하시겠습니까.
저는 그 옆에 첫 산책을 나온 다른 강아지로 하겠습니다. 첫 산책을 나오자마자 삐끗하고 슬랩스틱 코미디를 하는.
서로 경계하면서도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이 그려집니다. 다음으로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작가님의 답변 들어보겠습니다.
등장인물의 창조는 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것과 비교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작은 데미우르고스Demiurge, 창조자고 신이 인간을 흙으로 창조한 것처럼 작가는 단어라는 흙으로 캐릭터를 창조 합니다. 캐릭터는 작가가 생기를 불어넣을 때 살아나고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때가 작가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등장인물들이 살아 있으면 소설이 잘된 것이고, 영혼이 없는 자로 남아 있다면 잘 안된 것입니다.
저의 장르는 코미디·드라마·심리스릴러 등 여러 장르가 섞여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잘 아는 인생에 대한 작품이고 여기에 모든 장르가 반영돼 있습니다.
저는 엄청나게 복잡한 아이디어도 제 머릿속에서 정리하려고 노력합니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등장인물과 그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가 머릿속에 정해져 있습니다. 이야기에서 등장인물이 무언가를 해야 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등장인물이 해야 할 일을 저는 알고 있지만 등장인물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등장 인물이 이 행동을 할 동기를 생각해 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러브크래프트 컨트리》에서 1950년대 흑인 여성 레티샤는 백인 동네에서 귀신이 들린 집을 좋은 가격에 구입합니다. 그녀를 내쫓고 싶어 하는 이웃들과 그녀를 싫어하는 귀신과도 대치하는 상황에서 저는 레티샤가 이 집에 계속 사는 이유를 생각해 내야 했습니다. 하나는 당시 흑인들은 담보 대출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집을 사기 힘들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사실은 그녀가 하나님을 자신의 영적인 보호막으로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이 집을 사길 원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이런 식으로 책을 쓰며 등장인물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여러분이 마침 강아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비공식적인 제 첫 소설에 러프라는 개가 등장합니다. 매우 작은 역할이지만 그게 저에겐 일종의 카메오 출연이었죠. 제 소설에서 저는 주인공이 아닌 다른 등장 인물을 지켜보는 조연으로 등장할 것 같습니다. 저에게 소설의 재미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쓸 수 있다는 것이거든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보면, 작가님들이 세계관을 만드는 방법이 궁금하다고 하셨는데요. 부연하자면 윤고은 작가님의 ‘무이’, 이미예 작가님의 ‘꿈 백화점’, 맷 러프 작가님의 ‘아덤’,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작가님의 ‘냉동인간인데 깨어난 낯선 병원’, 이 모든 공간이 이 세상에 없는 창조된 공간입니다. 이런 세계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말씀해 주시면 자연히 궁금증이 해소될 것 같습니다.
저는 그냥 그 글하고 같이 살아가는 것 같아요. 저는 굉장히 낯선 두 가지가 충돌하듯이 같이 웅크리고 있을 때 호기심을 느끼거든요. 《밤의 여행자들》에서 재난과 여행을 결합한 방식이죠. 호기심을 느끼고 나면 그걸 계속 생각하면서 일상을 살아가요. 그러던 중 동일본 대지진이 난 것을 미디어를 통해 봤고 그 상황에서 제 머릿속의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어요. 제 안에서 무수히 많은 갈래가 마침내 어느 지점에 와서 갑자기 저를 부추기면서 쓰게끔 만드는 시기가 오는데요. 그것은 작품마다 다릅니다. ‘무이’라는 공간도 마찬가지의 과정 을 거쳤죠.
제가 ‘꿈 백화점’을 생각한 건 저를 위해서였어요. 어릴 때부터 저는 사람이 잠을 자고 꿈꾸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8시간을 자기 때문에 인생의 3분의 1인 거죠. 그래서 저를 위해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어요. 아이디어를 생각하다 어느 시점에 가니 꿈을 사고파는 것이 굉장히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가 만든 세계는 잠이 들면 스스로 꿈을 살 수 있는 꿈 상점이 있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완전히 똑같진 않아도 비슷한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다고 믿어요. 그렇게 믿음으로써 제 삶이 풍성해졌기 때문이에요. 여기에 많은 분이 공감해 주시는 걸 보면서 글로 쓰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믿어주면 제 믿음도 커지잖아요. 지금은 제가 정말 만들어낸 세계인지, 있는 것을 간접 체험하고 기억에 남은 것을 쓴 건지 혼동되는 정도까지 온 것 같아요.
저는 언제나 여러 아이디어를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요. 그것들에 대해 오래 생각하다 보면 특정 아이디어에 집착하게 되고 선택을 하는 거죠. 아이디어들이 빵처럼 구워지고 있다가 하나가 준비되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실제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 이야기의 3분의 1 정도는 꽤 확실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시작하고, 어떻게 끝날지도 이미 알아요. 이야기의 마지막 줄도 미리 생각해 둡니다. 아주 확실한 시작과 끝 사이에는 굉장히 흐릿한 구간이 있습니다. 마치 안개가 잔뜩 낀 날에 산꼭대기만 보이는 것처럼요. 이야기를 쓰기 시작해 3분의 1 지점에 다다르면 안개가 조금 걷히고 더욱 확실한 이야기가 보입니다. 다음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게 되고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어느 순간 저는 책의 처음과 마지막이 책의 끝에서 이어지는 부분을 보게 돼요. 그동안 생각해 둔 이야기가 실제로 존재하며, 끝맺을 것을 아는 순간이 저의 가장 큰 동기입니다. 글을 쓸 때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순간 중 하나입니다.
저는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먼저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지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소설 《비행사》에서 한 사람이 시간적 배경으로 고립된 것을 묘사할 때 SF장르의 요소를 사용해 그 사람을 동결시킵니다. 80년 후 깨어나서 느끼는 외로움이 표현 가능한 감정으로 바뀝니다. 주제 못지않게 시점도 중요합니다. 시점에 따라 이야기의 스타일이 달라지거든요. 1인칭 이야기는 고백적이고 주관적이며 어떤 면에서 무방비한 서술이라면, 3인칭 시점의 서술자는 모든 등장인물의 생각을 알고 등장인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작가는 다르다
마지막으로 소설가 지망생들과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님들께 한 말씀씩 부탁드릴게요.
서점이나 축제에서 작가 모임을 자주 하지만, 오늘 여러 뛰어난 작가들이 모여서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좋았습니다. 이와 같이 작가들이 비대면으로 모여 자기소개를 하고 개별 발표만 하는 게 아니라 같이 대화하는 기회가 매우 좋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작가가 글을 쓰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가장 편안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글 쓰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써야 될 것 같다고 느껴지는 주제에 대해서는 쓰지 마세요. 쓰고 싶은 걸 쓰세요. 왜냐하면 글을 쓰면서 얻는 기쁨은 이 일을 하면서 얻는 가장 큰 보상이니까요.
저는 소설가라는 직업이 사람의 인생을 낭만적으로 만드는 좋은 꿈이라고 생각해요. 자기만의 이야기를 아이디어로 갖고 있는 것도 즐거워요. 일상생활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하나씩 얻어가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고요. 저도 아이디어를 수집하는 기간이 길었지만 ‘나는 소설가가 될 거야’라는 그 상태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완성하는 기쁨도 그에 못지않아요. 지금 꿈꾸는 상태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시간을 정해서 책임감 있게 해나가는 습관을 들여보면 그것도 굉장히 뿌듯할 거예요. 혼자만의 납기를 만들어서 해보면 좋은 경험이 되고 꿈을 이루는 데 박차를 가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저는 이상하게 한 시기에 제 책장에 있는 책을 뽑아서 작가들의 프로필을 본 적이 있어요. 작가 지망생이던 시절에 뭔가 조급했던 거죠. 대기만성이라는 말을 믿고 싶고 조급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마음 먹으면서도 다른 작가들이 첫 책을 낸 시기를 찾아봤는데요. 결국 글을 계속 쓰게 만드는 것은 나만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거든요. 품고 있는 그 세계를 아는 사람은 당신 한 사람뿐이라는 얘기를 드리고 싶고요. 그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든 글로 풀어내 보여주시면 기꺼이 찾아보겠습니다.
자신의 세계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고 확신을 가져야 나아갈 수 있다는 말씀이 위로가 되고 응원이 됐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함께 해 주신 작가님들께 감사 말씀드립니다.
정리 전민정 객원 편집위원 | 사진 제공 한국문학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