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의 첫 교향곡에 담긴 애국적 선율
교향곡은 오늘날 콘서트홀의 꽃으로 불린다. 정의하자면 ‘여러 악장으로 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소나타’라고 할 수 있다. 이 위대한 음악 장르는 19세기 중반에 사망 판정을 받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 코마 상태에서 교향곡을 살려낸 작품이 1876년 초연된 요하네스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1824년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교향곡 9번 ‘합창’을 완성하고 3년 뒤 세상을 떠나자, 세상은 그를 ‘교향곡의 완성자’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교향곡 아홉 곡은 ‘불멸의immortal 9곡’으로 불렸다. 19세기 초중반 독일어 지역을 중심으로 도시마다 생겨나기 시작한 필하모니협회와 오케스트라들은 ‘베토벤의 위대한 교향곡과 그 밖의 작품들’을 연주하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후배 작곡가들이 베토벤의 교향곡이 가진 규모와 형식, 장엄함과 숭고함에 직접 대결하기는 힘들었다.
슈만과 멘델스존 등이 여행의 체험이나 계절감 등을 담은 교향곡으로 이 위대한 전통을 이어갔지만, 슈만이 마지막으로 발표한 교향곡 3번 ‘라인’1851을 끝으로 유럽에서 주목받는 교향곡은 사라졌다. 1870년대 초반까지 브루크너·차이콥스키·드보르자크·생상스 등이 초기 교향곡을 발표했으나 이들의 새로운 교향곡들은 베토벤의 위대한 전통에 수반하는 ‘열화劣化’ 버전 정도로 치부됐다. 후배 작곡가들의 음악 문법에 큰 영향을 끼친 리하르트 바그너는 ‘교향곡은 죽었다’고 선언한 뒤 종합예술로서의 음악극 창작에만 힘을 쏟았다.
그러나 독일인 브람스가 20여 년의 치밀한 준비 끝에 작곡가로서 원숙의 극치에 다다른 43세 나이로 교향곡 1번을 내놓은 뒤 이런 분위기는 달라졌다. 특히 지휘자 한스 폰 뷜로가 이 곡을 (베토벤의 9곡을 잇는) ‘제10번 교향곡’이라고 선언하자 유럽 음악계는 대체로 이의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 사건은 브람스 자신을 포함해 앞에 언급한 브루크너부터 생상스까지 주요 작곡가들이 한층 야심적인 신작 교향곡으로 경쟁하는 19세기 마지막 사반세기의 ‘교향곡 르네상스’를 가져왔고 말러, 시벨리우스를 비롯한 다음 세대 작곡가가 이에 합류했다.
브람스의 첫 교향곡에서 특히 감상자들을 매료시킨 부분은 마지막 4악장의 찬송가풍(코랄) 선율이었다. 많은 사람이 4박자의 이 유장하고 간명한 선율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4악장의 ‘환희의 송가’를 떠올렸다. 이 말을 들은 브람스는 ‘그런 소리는 바보도 할 수 있다’고 이를 일축했다.
바보도 할 수 있는 소리라니? 무슨 뜻일까? 이 말을 두고 사람들이 브람스가 ‘두 작품이 닮았다는 건 터무니 없는 생각’이라고 일갈한 것으로 오독誤讀한다. 아니다. 브람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런 소리는 바보나 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바보도 할 수 있는 소리’란, 너무 뻔해서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소리란 뜻이다. 두 선율 모두 4박자의 코랄이고 마지막 악장의 주요 선율이니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브람스가 ‘그런 소리는 바보도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바보도 할 수 있는 뻔한 소리 말고 더 중요한 발견을 할 수 있는데, 그걸 모르다니’라는 탄식이었을 것이다. 이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더 중요한 발견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다른 선율과의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브람스가 4년 뒤 ‘대학 축전 서곡’에 인용한 19세기 독일 학생가 ‘우리는 굳건한 집을 세웠다Wir hatten gebauet ein stattliches Haus’다. 이 노래는 1980년대 국내 중·고교 음악 교과서에 ‘어여쁜 장미’라는 제목으로 실리기도 했는데, 이 노래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가 있다. 실은 노래에 다른 가사가 있다는 것.독일 문헌학자 한스 마스만은 1820년 이 선율에 ‘나는 헌신했노라’라는 가사를 붙였고, 이 노래는 독일 애국가요로 애창됐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나는 내 마음과 손을 다해 헌신했노라. 사랑과 삶으로 가득한 내 조국 독일이여.”
이 선율과 브람스 교향곡 1번 코랄 선율이 똑같지는 않지만 두 선율은 실제 매우 닮았다. 왜 브람스는 첫 교향곡에 애국가요와 닮은 선율을 썼고 4년 뒤 그 노래를 원곡 그대로 자신의 작품에 넣었을까.
브람스가 빈으로 건너온 3년 뒤 함부르크가 속한 북독일 연방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에서 이긴 북독일 연방과 그 맹주인 프로이센의 주도로 1871년 독일제국이 수립됐다. 오스트리아인은 수치심에 떨었지만 독일인은 유럽의 새 강국으로 등장한 조국을 자랑스러워했다. 추측일 뿐이지만, 브람스는 교향곡 1번에서 독일인으로서의 희망과 애국심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에서 활동하는 그가 ‘나는 헌신하노라’ 선율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후 외교적으로 고립된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화해했고, 1879년 두 나라는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브람스가 ‘나는 헌신하노라’ 선율을 ‘대학 축전 서곡’에 직접 인용한 것은 두 나라의 적대감이 사라진 그 다음 해였다.
“브람스가 애국자였다고?” 의문이 들 수 있다. 독일이라는 국가 또는 이념에 매료된 브람스를 상상하는 일은 낯설다. 특히 예술관에 있어서 그와 반대편에 있던 바그너가 게르만 신화에서 비롯된 음악극의 금자탑을 쌓아 올렸고, 히틀러가 그 작품에 매료됐던 사실 때문에 ‘브람스의 독일 사랑’은 더욱 낯설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브람스의 생전 지인들은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그가 독일을 깊이 사랑했고, 외국 특히 독일의 통일을 원치 않던 영국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브람스가 60세가 된 1893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은 유럽 각국을 대표하는 여러 음악가를 불러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러시아의 차이콥스키, 프랑스의 생상스, 북유럽(노르웨이)의 그리그가 초청됐고 이탈리아에서는 이해 80세가 된 베르디 대신 보이토가 참석했다. 독일 대표로는 브람스가 초청됐지만, 그는 이 초대를 거절했다. 표면적 이유는 ‘뱃멀미를 심하게 해서 영국 해협을 배 타고 건너기 싫다’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떠들썩한 수여식 부대 행사가 불편하다’고도 했다. 그렇지만 진짜 이유는 영국에 대한 그의 불편한 심사 아니었을까.
3년 뒤 독일의 브레슬라우대학이 명예박사 학위를 제안하자 브람스는 이를 수락하고 수여식에 참석했다. 물론 육로로 편하게 갈 수 있는 여정이기도 했다. 이 학위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작곡한 곡이 위에 언급한 ‘대학 축전 서곡’이다. 브레슬라우대가 있던 브레슬라우는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에 편입돼 폴란드 도시 브로츠와프로 이름을 바꿨다. 브람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준 대학도 폴란드 대학인 브로츠와프대학이 됐다.
글 유윤종 음악평론가, 전 동아일보 문화전문기자
브람스의 교향곡 선율이 궁금하다면
11월 7일 오후 7시 30분, 9일 오후 5시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슈만 피아노 협주곡(협연 김선욱), 브람스 교향곡 1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