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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6월호

이 시대의 ‘가난’은 운명과도 같아

‘가난’이 주어인 문장을 쓸 수 있을까? 너의 가난과 나의 가난은 너무도 달라 ‘나’를 주어로 하는 문장밖에는 쓸 수 없었노라고, 『일인칭 가난』2023의 저자 안온은 말한다. 생의 어느 시기에 가난을 경험하느냐에 따라, 가난의 원인이 무엇이냐에 따라, 수급 여부에 따라 각자가 경험하는 가난의 실체는 너무도 달라 가난을 주어로 하는 책은 쓸 수 없었노라고 그는 적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듯 그가 일인칭으로 써 내려간 ‘가난’이 ‘일 인분짜리’는 아닐뿐더러 그의 책에 저자의 목소리만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안온의 글에서는 가난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함께 들려온다. “우리를 아는 건 우리뿐”이라고 오랜 친구가 말했다는 것처럼, 가난한 너는 가난한 나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비로소 마음을 터놓고 서로를 보듬는 사람들이 보인다.

도대체 이 시대의 ‘가난’은 어떤 것이기에 결코 일반화할 수 없다는 확신과 함께 당사자들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의 토대, 즉 공통의 정동을 남기는 것일까? ‘가난’의 경험이 이처럼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이라면, 일반화를 꾀하는 논리적 언어는 몰라도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좇는 서사적 언어는 ‘우리의 가난’을 부족하게나마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영국 웨일스 출신의 극작가 게리 오언Gary Owen의 <로미오 앤 줄리Romeo and Julie>(2024년 12월 14일부터 2025년 3월 16일까지, 예스24아트원 2관)는 이런 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회신한 작품이다. 더욱이 이 작품은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을 현대적으로 변주한 작품으로서 각색이라는 장치를 통해 ‘가난’을 한층 더 두텁게 증언한다. 이 시대의 ‘가난’은 아무리 도망치려고 애써도 도망칠 수 없는, 비합리적이면서도 전능한 옛이야기의 ‘운명’처럼 경험되고 있지 않느냐는, 서늘한 통찰이 오언의 각색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웨일스의 수도, 카디프 남쪽의 낙후된 자치구 스플롯에 있는 한 허름한 아파트에서 시작한다. 로미의 엄마 바브가 로미를 부른다. “로미, 로미, 로미오 안토니 존스!” 그렇게 관객은 이 작품의 주인공 로미(오)를 만나게 되는데, 이렇게 비루한 로미오가 없다. 추레한 옷을 입고 등장한 그는 말없이 아기 바구니를 들춰보고 악취에 코를 막는다. 로미의 딸, 니암의 기저귀를 갈 시간인 것. 니암의 작은 몸은 똥으로 범벅인데, 물티슈도 기저귀도 딱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저 쉼 없이 술만 들이켜는 바브는 로미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보이고, 잠깐 고민하던 로미는 혹시 썼던 것 중에 다시 쓸 만한 게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로 쓰레기를 뒤진다. 그렇다, 로미는 돈이 없다. 어린 딸의 기저귀를 살 돈조차 없는 지경으로 생이 곤궁하다. 때때로 사고치는 알코올 중독자 엄마와 온종일 자신의 전적인 돌봄을 요구하는 갓난아이가 삶의 전부인 18세 싱글 대디, 로미. 하루하루가 너무도 지루하고 피곤하며, 지루하고 피곤해 자꾸만 화가 나는 로미의 삶에 동갑내기 줄리가 등장하고, 이 둘이 만들어가는 사랑의 한 생이 <로미오앤 줄리>의 골자다.

같은 동네 출신이지만, 줄리의 삶은 로미보다는 나아 보인다. 줄리에겐 가난한 아이들에게선 찾아보긴 힘든 원대한 포부가 있다. 첫 만남에서 로미가 하는 말마따나 그녀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물론 그녀의 이러한 자신감은 높은 학업 성취도에 기인하지만, 그 근간에는 부모의 존재가 있다. 제철소 노동자인 아빠와 최저임금을 받는 돌봄 노동자인 엄마는 돈은 없을지언정 빈곤과 빈번히 쌍을 이루곤 하는 약물 중독이나 가정 폭력 없이 줄리를 키웠고, 줄리의 교육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의 교육에 욕심을 낼 정도면 진짜로 가난한 건 아니지 않느냐는 반문은 가난을 모르는 이들의 편견일 뿐, 줄리도 가난한 집 아이다. 초연을 연출한 레이철 오리어든R achel O’Riordan의 말처럼, “줄리의 노동계급 부모는 [중간 계급을 향해] 노를 젓고는 있지만 쉽게 하위 계급으로 미끄러질 수” 있는 정도일 뿐이다.

이처럼 가난한 두 청소년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 이후에는 아주 흔한디 흔한 일들이 이어진다. 둘은 서로를 많이 사랑하고, 사랑하여 아이를 갖고, 함께하는 삶을 꿈꾼다. 최선을 다해 함께하는 미래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한다. 여느 사랑이 그러하듯, 때로는 상대가 모르게 희생을 감내하며 어린 연인은 분투한다. 허나 줄리는 12세 때부터 키워온 물리학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고, 로미는 줄리의 꿈을 포기하게 할 수 없다. 하여 이들은 이별한다. 어릴 적 풋사랑이니, 쉬이 잊혀질까? 어쩌면 상대방은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래의 어느 날엔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허나 가난 때문에 돌아서야만 했던 자기 자신까지 지워낼 수 있을까? “가난하면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을 누리지 못하는 걸까?”라는 안온의 쓸쓸한 자문에서 미래의 로미와 줄리는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서글픈 건, 모든 게 가난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별을 선택한 것이 나나 나의 연인이 아니라 가난이었다는 점이 비극의 실체다. 원한 것보다는 조금 빠른 임신과 출산이었다 하더라도, 그게 설령 그저 실수였다 하더라도, 아이를 돌볼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사람에게 지불할 돈이 있었다면, 로미와 줄리는 이처럼 이별로 직진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선택지가 있었을 터, 어쩌면 다른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희망했던 것처럼, 어쩌면 공부도, 학위도, 사랑도, 아이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임신을 중단하고도 차마 떠날 수 없어, 로미에게 찾아가 방학이 되면 돌아오겠다며 기다려달라고 애원하는 줄리를 지켜보며 줄리와 한마음으로 다른 결말을 꿈꿔보지만, 역시나 그럴 수 없음을 안다. 가난한 어린 엄마에게, 그리고 가난한 어린 엄마의 아이에게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10대 임신은 가난 대물림의 첫 단계이곤 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2023에서 저자 강지나가 말하듯, 과거의 빈곤이 성실하기만 하면 벗어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였다면, 이 시대의 빈곤은 “세대를 이어 대물림되는 불평등한 사회구조 그 자체”다. 그리고 이처럼 선연히도 가혹한 사실은 이 시대의 가난한 연인들에게 이별을 종용한다. 이제 가난은 - 원작의 ‘오랜 가문의 반목’이 그러했듯 - 터무니없으나 거스를 길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기에, 아무도 죽지 않지만 이미 비극이다. 기실 극작가 오언에게 이런 통찰이 없었다면, 웨일스의 젊은 연인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쓰며 모두에게 잘 알려진 고전의 이름들을 소환할 까닭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전을 현재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품는 이야기의 두께란 이런 것일까. 그리고 이 두께야말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저 가짜일 뿐인, 낯선 지명과 낯선 이름이 빼곡한 이야기에 우리 관객들이 연신 마른 눈물을 훔치는 까닭이지 않을까.

*‘가난’에 관해서는 『일인칭 가난』2023(마티),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2023(돌베개)와 함께 ‘상상의 딸에게 들려주는 가족사’라는 독특한 형식의 자전적 에세이인 세라 스마시Sarah Smarsh의 『하틀랜드』2020(반비)를 참조했다.

글 전영지 공연 칼럼니스트·드라마터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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