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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4월호

나르시시스트 연기하기의 역설

아직 객석 등이 꺼지지 않은 극장. 한 사내가 겸연쩍게 웃으며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 나와 객석을 향해 “저기”라며 말을 붙인다. 무대 위 저 사내는 누구인가? 배우의 이름은 안다. 허나 무대와 객석을 동일하게 비추고 있는 조명 아래, 내가 보고 있는 인물은 배우 손상규일 수도, 손상규가 연기하는 허구의 인물일 수도 있을 터. 불확실함에서 비롯된 약간의 초조함이 찾아들 즈음, 사내가 불쑥 입을 연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바인데, 이름이 ‘멕시코시티’라니 좀 뜬금없죠?”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전락La Chute1956을 배우 손상규가 직접 각색하고 연출해 1인극으로 선보이는 무대, 양손프로젝트 <전락>(202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명동예술극장)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소설 『전락』은 원작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이자 주인공인 장 바티스트 클라망스의 독백으로 이뤄진 일종의 모노드라마다. 한때는 프랑스 파리에서 제법 성공한 변호사였으나 지금은 암스테르담에서 ‘고해 판사Judge-penitent’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인물, 클라망스가 우연히 만난 여행객에게 5일간 털어놓는 이야기가 이 작품의 골자인 것. 그는 정말이지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 본인도 알고 있다. 마음속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그렇단다. 허나 그건 그의 사정일 뿐. 초면에 이 정도의 수다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진저리가 날 지경인데, 심지어 지독하게 자기 과시적인 이 남자, 클라망스가 하는 이야기는 썩 유쾌하지도 않다.

이를테면, 그는 남을 돕는 걸 즐겼다고 한다. 특히 시각장애인의 보행을 돕는 걸 좋아해서 시각장애인이 건널목에 서 있으면 멀리서라도 재빨리 달려갔고, 심지어 다른 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고 있을 땐 시각장애인의 손을 가로채서라도 그를 도왔다고 말한다. ‘유머인가?’ 싶어 피식 웃어 넘겨보지만, 클라망스는 자신의 밑바닥을 정확하게 인지하기를 바란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간다. 시각장애인을 돕고 돌아설 때는 늘 인사를 했다고. 누가 보라는 인사였냐고? 거리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 사람들, 즉 자신의 선행을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건넨 인사였다는 걸 본인도 나중에야 깨달았다고 말한다.

“배우, 사람들 앞에선 늘 연기하는 인간.”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실체다. 몰랐다면 언제나처럼 스스로에 취해 한껏 우월감을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었겠지만, 각성한 그의 삶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한다. 우연한 사건이 계기였다. 클라망스는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라며 어렵사리 말을 이어가지만, 사건의 전말은 간단하다. 몇 해 전 어느 가을밤 파리의 센강을 지나던 중 한 여자가 물속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으나 잠시 주저하다 모른 척 지나쳐버렸다는 것. 대낮이었다면, 누군가 보고 있었다면 바로 뛰어갔을 것이라고, 그저 귀찮았던 것일 뿐이라며 그는 과거의 자신을 책망하지만,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의도된 악행도 아니지 않은가. 사건에 대한 판단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신의 치부를 힘겹게 고백하는 그를, 오래도록 죄책감에 시달려왔다는 그를 손가락질하기는 쉽지 않다. 센강에서 투신한 여자의 ‘추락’과 함께 클라망스의 삶은 이미 ‘전락’했고, 그는 지금 생의 나락에서 참회하고 있는 것이므로.

ⓒ김일다/Kim Ilda

그러나 연민도 잠시, 클라망스가 덧붙이는 말은 또다시 그에 대한 불쾌함을 증폭시킨다. 그때 물에 빠진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고, 자신은 그 이후로 쭉 신문을 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그러니까 그가 시달려온 죄책감은 구하지 못한 그녀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구할 기회를 놓쳐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일 뿐이었다. 그 일로 인해 더 이상 예전처럼 완벽한 인간이라는 환상 속에서 ‘높은 곳에서 훨훨 날아다니듯’ 살 수 없어진 것이 그저 안타까웠다니! 기실 “거의 일생 동안 나 자신 말고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토로하는 이 남자, 클라망스는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다. 심지어 작품의 말미에 이르면 이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연기演技’였음이 드러난다. 자신의 고백을 듣는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본인의 모습을 발견해 자기처럼 죄책감을 느끼도록 유도해온 것이다. 그의 선행이 ‘연기’였듯, 그의 참회 또한 ‘연기’였다니,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우리 모두를 자신이 있는 진창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일까? 인간이란 본디 자기 본위라 타자를 위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달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여 우리는 영원히 타자와 자기 자신을 동시에 구원하는 그런 경이로운 순간을 맞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결국 진창으로 전락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인류의 운명이 아니겠냐고, 클라망스는 자신의 고백을 참혹한 예언으로 갈음한다. ‘이미 때는 늦었다고. 영원히 때는 늦을 거라고. 정말 다행이지 않느냐고.’ 클라망스의 회한과 자조가 섞인 참회는 참으로 교묘하고 치밀하다. 이미 독자와 관객은 클라망스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자문한 지 오래. ‘인간이 다 그렇지’ 하는 무기력한 환멸로 곤두박질치는 마음을 어찌할 길 없다. 생을 포기하거나, 클라망스를 뒤따라 또 한 명의―나를 참회함으로써 남을 고발하는―‘고해 판사’가 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만 같다.

정령 전락의 자리를 박차고 상승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이 질문을 품고 나는 잠시 잊고 있던 또 한 명의 배우를 기억한다. 클라망스의 고백이 끝나고 아주 잠깐의 암전 후 다시금 자신의 존재를 상기하는 인물, 기실 클라망스의 ‘연기’ 내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자신의 ‘연기’를 해온, 배우 손상규다. 그런데 손상규의 ‘연기’는 클라망스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클라망스가 자신을 위해 거짓을 덧댔다면, 손상규는 클라망스를 위해 자신을 덜어낸다. 높고 낮은 두 개의 사다리 위에 걸터앉는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움직임도 없이, 카뮈의 언어를 무던히도 담백하게 자신의 몸에 담아낸다. 다시 말해, 클라망스의 ‘연기’가 ‘퍼포먼스performance’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듯 ‘어떤 형태form를 만드는 일’이라면, 손상규의 ‘연기’는 클라망스를 위해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내어주는 일’에 가까운 것. ‘완전한par 제공fournir’으로서의 ‘연기’. 즉 ‘퍼포먼스’의 어원을 고대 프랑스어 ‘parfournir’에서 찾을 때 발견하게 되는 ‘연기’다.

요컨대, 무대 위에는 두 명의 배우, 두 명의 인물이 있었다. 이 공연이 대단히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연극은 본디 이중적이다. 연극의 공간은 현실인 동시에 환영이며, 배우는 자기 자신인 동시에 허구적 인물이다. 이 두 차원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서로 맞물리고 충돌하고 타협하고 비껴가는 역동을 지속하기 마련. 손상규의 무대 <전락>은 바로 이와 같은 연극의 내재적 이중성을 무기 삼아 카뮈의 『전락』과 맞붙은 것이다. 무해한 존재들의 해방과 연대를 그리는 ‘착한 서사’가 조명받는 이 시대에는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선하다고 믿는 인물들이 빠지기 쉬운 나르시시즘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이 더욱 긴요하지 않으냐는 듯, 손상규는 클라망스를 끌어안은 것이다. 고전을 돌파하는 배우의 고유한 방식이랄까. 그의 몸 안에서 충돌하는 두 개의 ‘연기’ 속에서 카뮈가 쓰지 않은 것들을 발견한다. 필요한 순간 저절로 반응하는 ‘준비된 몸’을 위한 부단한 훈련을, 환멸과 허무로 가라앉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타자의 세계를 모험하는 분투의 매혹을 본다. ‘늦지 않는 다음’을 만들어가기 위한 시간의 동력일 터다.

글 전영지 공연 칼럼니스트·드라마터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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