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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9월호

음악이 자연처럼 그곳에
존재할 때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끝도 시작도 없는 작품이며, 진정한 클라이맥스도 진정한 해소도 없는 음악이자, 보들레르 시 속의 연인들처럼 ‘자유롭게 살랑이는 바람의 날개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음악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끝도 시작도 없기 때문에, 진정한 클라이맥스도 진정한 해소도 없기 때문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영화에서 자주 인용된다. 영화가 사랑한 클래식 음악,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어떤 영화에서 어떤 뉘앙스로 흘러나왔을까.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1996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화상을 입은 데다 기억도 잃은 ‘영국인 환자’의 이야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탈리아의 폐허가 된 수도원을 배경으로 하는 이 이야기는 영국인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 한나와 연합군 스파이로 활동한 도둑 카라바지오, 영국 군대에서 폭탄을 처리하는 공병 킵의 이야기인 동시에, 찬란했던 지난 시절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영국인 환자가 들려주는 옛사랑에 대한 추억은 현재와 교차하며 아련한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데, 어느 날 한나는 폭격 때문에 폐허에 반쯤 묻혀 있는 피아노를 발견하고 연주한다. 한나가 연인 킵을 만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 곡이 바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첫 곡 아리아와 30개의 변주곡, 그리고 다시 아리아로 마무리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대위선율은 얽히고설키며 서로를 보완하고 또 대립하며 진행된다. 완벽한 형식미를 갖춘 바흐의 음악 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는 이 음악은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고립된 이들의 쓸쓸함을 가중하기도 하지만 감정을 격동시키는 대신 차분하게 눌러주는 역할을 한다. 처연한 감정이 고조되는 기분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바흐가 불면증에 걸린 헤르만 카를 폰 카이저링 백작의 요청을 받고 작곡했다는 설이 있는 (다른 설도 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 속에 숨겨진 치열함으로 영화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1991의 살육 장면에서 쓰이기도 했다. 한니발 렉터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틀어놓고 살인한다. 마치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셔츠를 입은 듯한 정갈함을 엿보게 하지만 그 속에 숨은 야생성을 상상하게 하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설국열차>2013에서는 메이슨을 인질로 잡은 꼬리 칸 사람들이 호화스러운 생활을 만끽하는 2등 칸에 접어드는 순간에 바흐가 흘러나온다. 인간답게 산다는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 잃어버린 삶의 순간에 접속하는 순간의 음악적 상징이 바로 바흐인 셈이다.

호소다 마모루Hosoda Mamoru 감독의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는 ‘아리아-30곡의 변주곡-아리아’라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구조를 영화 내용과 엮어 역동적으로 담아낸 사례로 말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영화가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혹은 역행하는 방식으로 이용했다면,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는 이야기의 구조와 곡의 구조 사이 상호작용이 보다 명확하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곤노 마코토다. 고등학생인 마코토는 쾌활한 열일곱살 소녀다. 특별할 것 없는, 하지만 그래서 반짝이는 매일이 마코토를 기다린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인 고스케·치아키와 야구 연습을 즐긴다. 영원할 것처럼 뜨거운 여름을 닮은, 걱정 근심 없이 살았던 매일의 순간은 이제 이별을 고하려는 참이다. 학교에서는 문과와 이과 사이에서 결정해야 한다. 우정과 사랑을 구분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어울렸던 고스케·치아키와의 날들도 이제 끝날 기미를 보인다. 여학생들이 그들에게 고백하려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찬란한 여름이 막 기울어가는 시기, 어느 날 마코토는 늦잠 잔 일을 필두로 소소한 불행을 연달아 겪는다. 심지어 방과 후 과학실 구석에서 이상한 물체 위로 넘어지면서 ‘무언가를 본다.’ 이 ‘무언가’의 정체는 곧 밝혀진다.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던 길, 마코토는 철도 건널목에서 기차에 부딪힌다. 이제 죽는구나 하는 순간 마코토는 ‘시간을 뛰어넘어’ 무사히 살아남는다.

시간을, 뛰어넘는다. 그것이 마코토의 비밀스러운 능력이다. 마코토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모에게 털어놓는데, 이모는 “네 또래 여자아이들에게는 가끔 있는 일이야”라고 여상하게 답한다. 마코토는 소소한 실수를 바로잡으며 시간을 뛰어넘는 자신만의 능력을 십분 사용한다. 거창한 데 능력을 쓰는 건 아니다. 노래방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를 마음껏 부르는 데 활용하는 식이니까. 하지만 마코토는 곧, 성장과 이별의 순간들을, 그리움으로 남을 경험들과 아쉬움으로 추억하게 될 사건들을 모두 없던 일로 만들어버릴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는 마코토가 시간을 되돌릴 때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와 제1변주가 몇 번이고 반복된다. 마코토는 시간을 되돌리면서 같은 사건을 다른 전개로 맞아들이게 된다. 같은 것 같지만 다르고, 다른 것 같지만 같은,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결국 맞이할 수밖에 없는 벼락같은 성장과 깨달음의 순간을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통해 구현하는 것이다. 아리아와 제1변주의 사용은, 이 애니메이션에서 맑고 경쾌한 마코토와 친구들의 분위기를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다시, 글렌 굴드의 말로 돌아가보자. 이야기를 정중하게 전진시키면서도 이야기에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이 곡에 대해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직관적 인식을 통한 통일성, 그리고 기교와 면밀한 검토에서 비롯하고 마침내 도달한 숙련도에 의해 부드러워진 통일성을 갖춘 작품이다. 그 통일성은?이는 예술 작품이 좀처럼 하지 못하는 바인데?힘의 정점에 올라 환호하는 잠재의식적 설계와 도안을 통해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음악이 자연처럼 그곳에 존재할 때, 그 의미를 풍성하게 하는 것은 영화의 이야기와 우리의 해석이 되리라. 사랑의 시작, 살인의 시작, 시간을 되돌리는 작은 모험의 순간들에 하나의 곡이 쓰일 때 우리가 음악과 영화에서 보고 듣는 것들이다.

글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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