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고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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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빠르게, 더 높이. 올림픽에 출전한 운동선수만의 목표는 아니다.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한국인 대부분이 이 구호를 내면화하고 살아간다. 남과 비교하고, 과거의 나와 비교하며 조금이라도 앞서나갈 수 있기를 원한다. 내가 원하는 삶에 충실하기를 기대하기보다 자기 계발의 주문에 뒤처지지 않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어느 날, 자의로 혹은 타의로 삶에 잠시 멈춤의 순간이 찾아온다. 뒤늦게 ‘나’에 초점을 맞춘 고민을 시작하는 순간이.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2023가 말을 걸어오는 순간은 반복되는 일상의 피로가 은은하지만 묵직하게 몸과 마음을 잠식하는 때다.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는 공중화장실 개선 작업인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발한 영화다. ‘완벽한 나날’이라는 제목과 달리, 가장 완벽하기 어려운 공간인 화장실을 일터로 삼은 주인공이 우리 앞에 등장한다. 그의 집에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으며, 영화의 첫 장면에서 히라야마가 잠든 이른 새벽의 적요를 깨우는 것은 바깥에서 빗자루질하는 소리다. 당신과 똑같이 주인공이 하루를 시작한다. 이부자리를 개고, 이를 닦고, 화초에 물을 주고, 출근을 위한 유니폼을 입는다. 문간에서 전날 정리해둔 주머니 속 소지품을 챙기는 그는, 동전과 열쇠꾸러미, 그리고 필름카메라를 하나씩 손에 쥔다. 집 앞 자판기에서 캔 음료를 산 뒤 청소용품이 가득 든 차를 몰고 일터인 화장실로 향한다. 출근길 차 안에서는 카세트테이프로 옛날 노래를 듣는다. 본격적인 업무의 시작이다. 자기 집 화장실처럼 깨끗하게 구석구석 닦고 문지르는 그의 손길은 다정해 보이기까지 한다. 점심은 공원에서 해결한다. 편의점에서 산 듯 보이는 샌드위치를 혼자 먹으면서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이 대목이다. 고개를 든 그는 카메라를 꺼내 위쪽으로 고정하고 사진을 찍는다. 그는 큰 나무 아래에서 오후의 햇살에 흠뻑 젖는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고모레비木漏れ日’라는 단어가 영상으로 화한 듯 화면을 가득 채운다. <퍼펙트 데이즈>에는 이렇게 히라야마가 무념의 표정으로 그저 햇살을 즐기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이 정적의 순간이 충만함으로 차오르는 감상에 잠긴다. 우리가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잃어버린 것이 있지는 않았나? 그저 눈을 돌리면 그곳에 있는 아름다움을 무심코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았나.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면서 영화관에 관객이 줄었다. 영화관 관람료가 비싸진 영향이라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소셜미디어에 ‘인증’하고 ‘자랑’할 수 없는 영화 관람의 특성 때문이라는 이들도 있다. 영화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시작된 건 그래서다. 왜 영화를 봐야 할까? 왜 ‘영화관에서’ 영화를 봐야 할까? 모든 영화는 저마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상영 시간 동안 일상을 까마득하게 잊게 만드는 스릴과 서스펜스를 목적으로 할 수도 있고, 영상과 음악, 연기가 빚어내는 명상과 같은 순간들에 몰입하는 시간을 지향할 수도 있다. 목적이 훌륭한 결과로 매번 이어지지는 않고, 낮지 않은 확률로 기대가 배반당하는 경험이야말로 아마도 극장에 관객이 줄어드는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의 햇살을 즐길 여유가 없이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퍼펙트 데이즈>는 근사한 순간을 선사한다. 극장에서 느끼는 자연의 빛과 바람과 자유의 느낌을.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과 오후의 정적을, 무엇보다 근사한 고독을.
도파민 중독의 시대라고들 한다. 새로고침으로 갱신되는 소셜미디어의 타임라인 속에서, 설탕과 밀가루로 이루어진 탄수화물과 당분 중독 속에서, 우리는 기꺼이 순간의 즐거움을 찾아 만끽하려 하고 정작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찾지 못한다. 자기 자신과 오롯이 존재하는 고요한 순간이야말로 가장 드문 것이 되었다. 스마트폰만 있어도 광장에 존재할 수 있는 시대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 않는 동시대의 주인공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희귀한가. <퍼펙트 데이즈>는 히라야마가 다른 사람들과 얽히며 경험하는 희로애락도 착실히 담아내며, 그러한 순간이 그의 얼굴에 웃음을 피워내기도 하지만,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는 순간에 이르러 진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낸다.
그 얼굴에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 역동한다. 관객이 없는 순간의 얼굴이 관객 앞에 펼쳐지는 순간, 그 얼굴을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순간, 보는 이의 마음속에는 그 자신의 감정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앤서니 스토의 『고독의 위로』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혼자 있는 능력’은 학습과 사고와 혁신을 가능하게 하며 변천을 받아들이게 하고 상상이라는 내면세계와 늘 접촉하게 하는 귀중한 자질이다. 친밀한 관계를 맺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해도 창의적인 상상력의 계발로 치유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관계보다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와 질서를 만드는 것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 창의적인 사람들도 많다.” 창의적인 삶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창작하는 예술가를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는 창작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을 만끽하고 창작물을 고요히 즐기는 방식으로(영화에는 취침 전 종이책을 차분히 읽어가는 그의 모습이 등장한다) 자신만의 창의성을 드러낸다. 공중화장실은 낭만화되기 가장 어려운 장소다. 그곳에서 일하며 일과 삶을 정갈하게 지켜내고자 하는 그의 안간힘은 때로 외부적 요인으로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그가 벗 삼는 고독은 그 흔들림에도 아슬아슬한 균형을 찾아내는 듯 보인다. 격동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러하기 때문에, 고독의 자리를 지키려는 안간힘은 더 귀중하게 느껴진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어둠 속 등대처럼 빛을 발하는 식당에 홀로 앉은 남자의 뒷모습이 익숙한 느낌이어서다. 늦은 시간에 식당에 홀로 앉은 그의 하루는 고단했을 것이다. 홀로 시간을 보내는 그는 어쩌면 외로울 것이고 어쩌면 고독을 벗 삼았을 것이다.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홀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 뒷모습이 어딘가 후련하고 단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퍼펙트 데이즈>의 연상 작용으로 이 그림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도시의 고독이 갖는 독특한 울림을 들은 기분으로 극장을 나섰다.
글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