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들어차는 것
— 새물
세밑에 쓰는 글이다. 세밑은 “한 해가 끝날 무렵. 설을 앞둔 섣달그믐께”를 이르는 말이다. 연말보다 세밑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연말이 주는 끝난다는 느낌 때문이다. ‘말末’은 말 그대로 “어떤 기간의 끝이나 말기”를 의미하는데, 끝난 뒤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침표를 찍어버리는 뉘앙스가 강하다. 연말 다음에 바로 연초가 오기라도 할 것처럼, 올해 못다 한 일들이 이듬해 초에 당신의 발목을 단단히 붙들기라도 할 것처럼. 내가 연말의 ‘호언장담’보다는 세밑의 ‘속삭임’에 마음을 내어주는 이유다.
‘세밑’의 ‘세’는 해, 나이, 세월을 뜻한다. 7세, 26세, 42세, 67세의 그 ‘세’ 말이다. 세의 밑에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세를 구름판 삼아 도움닫기를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세의 밑에서 세의 위로 폴짝. 나이를 먹는 일이 공중으로 솟구치는 일이 되는 것이다. 7세는 8세로, 26세는 27세로, 42세는 43세로, 67세는 68세로 사이좋게. 시간의 위아래를 최초로 가늠했던 사람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에게는 밑의 무게가 있었던 것일까. 밑이 가벼워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밑이 무거워서 진득하게 한자리를 지켰던 것일까. 세의 위쪽이 아닌 아래쪽을 응시하는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밑을 살펴야 한 해를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음을 예견하는 혜안이 아니었을까.
음력설을 쇠는 집안이 많기에 새해에도 세밑은 한동안 계속된다. 마치 지난해의 미련을 새해에 해결할 수 있도록 말미를 주는 것 같다. 2024년에는 2월 초에 음력설이 있으니, 늑장을 피우는 나 같은 사람이 어딘가 또 있을 것 같다. 한 해의 날짜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아직 본격적인 새해가 되지 않았다며 한껏 여유를 부리는 것이다.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뒤늦게 다이어리를 구매하고 작심삼일이 될지언정 거창한 계획도 세운다. 묵은 감정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올해는 왠지 근사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기도 한다. 아무렴 작년보다는 나을 거라고 주먹을 불끈 쥐어보기도 한다. 바로 새해니까, 다름 아닌 새해여서 가능한 일이다.
‘새’라는 관형사는 발음할 때 기분이 좋다. 새 책, 새 기분, 새 마음, 새 옷, 새 학기, 새 친구 등 관형사 ‘새’가 마치 하늘을 나는 새라도 되는 것처럼, 자꾸 하늘을 쳐다보게 만든다. 날개가 없지만 왠지 비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새것은 늘 우리를 들뜨게 하지 않는가. 새것을 하나둘 들이다 보면 어느 순간 새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한다. 인생의 새바람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새 신을 신은 두 발이 평소보다 경쾌하게 움직일지도 모른다. 새물새물 흘러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새물새물 좋아하는 마음이 도착한 곳에는 아마도 새물이 있을 것이다.
새물의 첫 번째 뜻은 “새로 갓 나온 과일이나 생선 따위를 이르는 말”이다. 새물은 ‘갓’이라는 속성 덕에 싱싱하다. 이제 막 시작된 이야기처럼 흥미진진하다. 먹기 직전인데도 자꾸만 떠올리게 한다. 맛을, 식감을, 과즙이나 육즙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찾아올 쾌감을, 다 먹고 난 뒤에 찾아올 길고 긴 여운을. 새물을 찾는 마음은 단순히 신선한 것을 염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혼자 먹기 위해 새물을 찾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보통 소중한 사람과 함께 먹기 위해, 혹은 그에게 선물하기 위해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새물을 건네는 손에는 생기와 활기를 나누는 마음이 한가득하다.
“빨래하여 이제 막 입은 옷”을 가리켜 새물이라고 하기도 한다. 듣기만 해도 설레는 말이다. 빨래한 옷을 입을 때 나는 기분 좋은 냄새와 보드라운 촉감을 떠올려보라. 새물은 우리를 안락하게 해준다. 새물을 입고 외출할 때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오던 경험도 떠오른다. 그때의 새물은 기분을 새롭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처럼 새물을 입음으로써 힘입을 수도 있고, 상처나 손해 입은 마음을 혜택이나 은혜 입은 마음으로 잠시 덮을 수도 있다. 먹고 입는 일이 ‘새물’에 다 담겨 있는 셈이다.
새물의 두 번째 뜻은 “새로운 사상이나 경향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적극적으로 새물을 추구하는 사람은 스타일이나 트렌드에 민감하다. 뭐가 새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경험도 마찬가지다. 새물을 좇는 사람은 해 보고 나서야 나와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파악한다. 이때 새물은 흔히 “새물을 먹다” 형태로 사용되는데, 새물을 먹은 사람은 먹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새물을 수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예전의 사상이나 경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새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지금’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변화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새물 앞에서 헛물켜지 않는 우직한 강단이 필요하다.
새물은 결국 고여 있던 물을 다시금 흘러가게 해주는 마중물인 셈이다. 단조로운 일상은 사람에게 안온함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게도 만든다. 타성에 젖은 삶에는 새물이 절실하다. 나를 먹이고 입히려면,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하려면 새물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집 안에 웅크려 있는 우리를 바깥으로 나가게 하는 힘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친구의 재촉 어린 전화 한 통, 푸진 햇살, 나들이하기 좋은 날씨, ‘언제 한번’을 ‘지금 여기’로 끌어당기는 마음, 답답함을 걷어차고 싶은 욕망이 우리를 마침내 밖으로 이끄는 것이다. 밖에 나간다고 해서 삶이 180도 뒤집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꺼이 고개를 들어야만, 삶의 각도를 달리해야만 보이는 장면이 있다.
세밑에 새물을 길어 올리겠다는 결심이 새해를 맞이하는 자세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설빔을 입고 햇과일을 먹으면서 올 한 해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입고 먹는 일은 결국 사는 일이니까. 의식주가 한 단어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 계획이 거창하면 거창해서 좋고, 소박하면 소박해서 좋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26세여도 27세여도, 42세여도 43세여도 나는 나라는 사실이다. ‘작년의 나’가 무사히 ‘올해의 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몸은 다 자라도 마음은 더 자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새물과 함께 삶은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다.
글 시인 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