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닭장수.
산 닭을 지게에 진 ‘닭장수’
사는 게 각박해지면서 모르는 사람이 오면 문을 열어주지 않게 됐지만 전에는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았죠. 행상들은 집 마당까지 불쑥 들어와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물건을 팔고, 정도 나눴습니다. 옛날이 그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행상 중에는 <사진 1>과 같은 닭장수도 있었습니다. 산 닭을 지게에 지고 다니며 팔았고, 닭장 위에 장비 주머니가 있는 것을 보면 그 자리에서 닭을 잡아주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산 닭을 잡아주면 바로 그날 저녁 식탁에 닭곰탕이나 닭볶음탕이 올랐을 겁니다. 무거운 지게를 하루 종일 지고 다니려면 참 고달팠을 겁니다. 사진 속 닭장수 아저씨도 한 가정의 가장이었을 거고, 닭 한 마리 팔아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주겠다는 생각으로 힘든 줄도 모르고, 이 동네 저 동네 돌며 “닭 사세요~”를 외쳤을 겁니다.
어느 집 대문 앞에서 주부와 닭장수가 닭 한 마리를 놓고 가격 흥정을 하는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그 시절에는 정이 넘쳤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온 상인에게 시원한 물 한 사발을 대접하면 그 상인은 감사의 뜻으로 물건 값을 흔쾌히 깎아줬습니다.
1959년 한 신문에 실린 ‘닭 장수 할아버지’라는 동시를 소개합니다. ‘상자 메고 터벅터벅 고을 길 간다/외줄길 시골 길을
혼자서 간다/상자 속에 닭들이 갸웃거리다 “꼬대 꼭꼬” 하고 물으면 닭장수 할아버진 대답 없어도 뽕나무 집 꼬꼬가 대답해준다/꼬대 꼭꼬…마을이라고…’.
<사진 2> 엿장수.
엿장수 마음대로 ‘짤깍짤깍’
갓 만든 뜨끈한 두부를 팔던 행상도 생각납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 모판을 바닥에 내려놓고, 칼로 한 모를 떠주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또 선지가 가득 담긴 초롱을 지고 다니던 선지 장수도 있었습니다. 고기는 비싸서 쉽게 사 먹지 못 하던 시절 선지는 훌륭한 단백질원이었습니다. 동네 입구에서 “선지 사려~” 소리가 들리면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나가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몇 백 원을 주고 선지 한 바가지 사오신 어머니는 부뚜막에서 걸어놓은 솥에 익힌 선지를 소금에 살짝 찍어 제 입에
넣어줬습니다. 지금도 그때 먹은 고소한 선지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배달 문화는 일찍이 시작됐습니다. 집에 앉아서 편하게 다양한 물건을 살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요즘은 전화 한 통만 하면 뭐든 집으로 배달해주는 세상이 됐지만 말입니다.
<사진 2> 속 엿장수(고물수집행상) 아저씨도 그립습니다.
‘짤깍짤깍’ 가위질 소리가 나면 동네 아이들이 골목 어귀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과자가 흔하지 않던 1950년대에는 엿이 최고의
간식이었습니다. 엿장수 아저씨는 빈 병, 헌책, 찌그러진 양재기,
깨진 그릇 등 쓸모없는 폐품을 달콤한 엿으로 바꿔줬죠.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에서 안 쓰는 물건들을 엿장수에게 갖다주면 비슷한 양이라도 가위로 쳐서 잘라주는 엿가락의
양이 달랐습니다. 아저씨가 기분이 좋으면 기다랗게 쳐줬고, 때로는 야박하게 엿을 주기도 했습니다.
엿장수의 가위는 무디고 날이 어긋나 가위 본연의 자르는
기능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구수한 소리로 고달픈 삶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줬습니다.
- 사진 김천길
- 전 AP통신 기자. 1950년부터 38년 동안 서울지국 사진기자로 일하며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 글 김구철
-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대중문화팀장으로 영화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