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명동 시공관 야간통행금지 임시수용소.
조선시대에도 존재한 통행금지 제도
이 제도는 1982년 1월 5일 오전 4시를 기해 해제됐습니다. 일부
전방 접전지역과 후방 해안지역은 제외됐지만 이날 도시의 젊은이들은 거리에서 ‘새벽의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야간통금을 경험하지 못한 요즘 젊은이들은 늦은 밤에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자유’가 소중하다는 것을 모를 겁니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에는 <사진 1>처럼 통금 위반자들을 해가 뜰 때까지 명동 시공관에 임시 수용했습니다. 부녀자들이 많이 잡혀와 있네요.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도 보입니다.
야간통금 폐지를 가장 반긴 사람은 아마도 심야에 장사를 하는 포장마차 주인이었을 것 같습니다. <사진 2>는 한 포장마차
주인이 손수레 한 귀퉁이에 ‘통금해제 환영’이라고 써 붙여놓고
장사를 하는 모습입니다.
야간통금 제도는 조선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언제 시작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경국대전> 병전 문개폐조(門開閉條)에 “궁성문은 초저녁에 닫고 해가 뜰 때에 열며 도성문은 인정(밤
10시에 쇠북을 스물여덟 번 치는 것)에 닫고 파루(새벽에 쇠북을 서른세 번 치는 것)에 연다”고 쓰여 있습니다. 또 행순조(行巡條)에는 “2경(오후 10시경) 후부터 5경(오전 4시경) 이전까지는 대소인원은 출행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1401년(태종 1) 5월에 “초경(오후 8시경) 3점 이후 5경 3점 이전에 행순을 범하는 자는 모두 체포할 것”을 명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통금해제에 울고 웃던 시민
<사진 2> 야간통금 해제.
통금해제가 결정되자 국민들은 이를 반기며 다양한 의견을 내놨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통금해제 소식을 전해 들은 시민들은 생리적인 위축감에서 해방되는 것은 물론 경제활동과 문화생활도
한층 활기를 띠고 명랑해지리라 기대에 차 있다. 그동안 통금을
분단국가의 숙명처럼 체념해왔던 국민들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안정되었고, 성장했음을 대내외에 보여준 조치로 마음 든든하다며 크게 환영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주부들은 남편과 자녀들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한 주부는 신문에 “술을 좋아하는 남편의 귀가
시간이 더 늦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어떤 가정이나 주부들의
걱정거리가 한 가지 더 늘어나게 된 셈이다. 대부분 강·절도 사건이 늦은 밤 시간에 발생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걱정도 태산 같다”고 하소연했습니다. 택시 기사들은 수입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며 반겼고 공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도 퇴근 시간에 융통성이
생겨 공장 가동 효율이 높아질 것이라고 좋아했습니다. 특히 술집 주인들은 통금해제를 크게 환영했지만 음주 소란, 폭력, 성범죄 등의 증가를 우려했습니다.
경찰은 통금 해제 첫날 특별비상경계에 들어갔으나 큰 사건이나 사고는 없었습니다. 37년 만에 잃었던 4시간을 되찾은 시민들은 담담하고 차분하게 통금 해제 첫 밤을 지냈습니다. 대부분 일찍 귀가했으며 서울 시내 삼청·사직 공원과 여의도 광장 등에는 늦은 시간까지 젊은 남녀의 모습이 보였지만 자정을 전후해
모두 돌아갔다고 합니다.
통금 해제 후 ‘엄살 환자’가 늘었다는 기사가 눈에 띕니다.
통금이 있을 때는 야간 응급환자의 대부분이 교통사고 환자였지만 해제 후에는 만성질환자가 입원을 목적으로 야간에 병원을 찾는 사례가 늘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밤중에 병원 문을 두드린 이유는 입원을 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의료보험이 실시되며 입원환자가 몰려 병실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습니다. 당직 의사들은 엄살 환자를 설득해 돌려보내느라 곤욕을
치렀다고 합니다.
- 사진 김천길
- 전 AP통신 기자. 1950년부터 38년 동안 서울지국 사진기자로 일하며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 글 김구철
-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대중문화팀장으로 영화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