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人에 가시면 더 많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webzine.e-stc.or.kr)
- 등장인물
- 만수, 순철, 지영 - 30대, 오래된 동갑내기 친구들
- 무대
- 지하실. 그들만의 아지트이자 모임 장소. 무대 가운데 책상이 있고 그 위에 금고가 하나 놓여 있다.
순철, 만수, 지영은 일을 하고 있다. 순철은 영업을, 만수는 농사를, 지영은 사무 일을 하고 있다. 순철은 여기저기 인사를 하고 명함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한다. 만수는 쟁기와 낫으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한다. 지영은 컴퓨터로 문서 작업을 하면서 커피를 마신다.
이들의 행동은 모두 마임으로 표현된다.
셋은 곧 하던 일을 정리하고 각자 앞에 있는 문을 열고 아지트로 들어온다. 세 사람이 발을 내딛자마자 전화벨이 울린다.
- 순철, 만수, 지영
- (삽질을 멈추며) 난 이제 이 짓도 못 해 먹겠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돼?
- 순철
- 아, 여보. 지금 잠깐 나와 있어. 들를 데가 있어서. 아까 말했잖아. (휴대전화를 멀리하고) 소리 지르지 마. 볼일 보러 나온 거야. 넌 왜 맨날 소리부터… 아니라니까!
- 지영
- 글쎄 저는 모르는 일이라니까요? 왜 우리 오빠가 받은 대출금을 내가 갚냐고요. 난 그 인간 보증 서준 적 없다고 했죠?
- 만수
- 예, 의사 선생님. 잘되었다고요? 아, 예 다행이네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수술비는 제가 곧….
- 순철
- 금방 들어가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 지영
-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네요!
- 만수
- 끊겠습니다.
- 순철
- 끊어!
- 지영
- 끊어요!
셋은 서로를 인식한다.
- 순철, 만수, 지영
- (과장되게) 안녕!
사이
- 만수
- 자, 그럼….
- 지영
- 돈부터! 회비부터 모으자고!
지영은 가장 큰 금고를, 순철은 그 속의 다른 금고를, 만수는 마지막 금고를 열고 상자를 조심스럽게 꺼낸다.
- 순철
- (봉투를 넣으며) 권순철 66번째 납입. 현재까지 납입금 6천 6백만원.
- 지영
- (봉투를 넣으며) 홍지영 66번째 납입. 납입금 동일.
- 만수
- (봉투를 넣으며) 이만수 66번째 납입. 납입금 역시 동일. (공식적인 말투로) 2014년 4월 30일 제 66회 사계 모임. 참가자 권순철, 홍지영, 이만수. 불참자 없음. 총 적립금액 1억 9천 8백만원. 모임 규칙 첫째, 계모임은 매달 마지막 날 진행되고, 금액은 백만 원이다. 둘째, 직계가족의 죽음이 있을 때 당사자에게 모든 곗돈이 돌아간다. 셋째, 곗돈은 삼단금고에 보관되며….
- 순철
- 그만 됐어. 다 아는 내용이잖아.
- 지영
- 벌써 1억 9천? 다음 달이면 2억대로 진입하는 거야?
- 만수
- 그렇네…. (상자를 금고 속에 다시 넣는다)
- 순철
- 너희는 만약 타게 된다면, 어디다 쓸 거야?
- 만수
- (조용히) 아무 데도, 내겐 소용없는 돈이야.
- 지영
- 난 일단 가방을 좀 바꿀 거야. 구찌나… 펜디? 그다음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브랜뉴 신상으로 갈아주고! (눈치 보며) 우리 가족 중 누군가가 죽기를 바라는 건 당연 아닌데, 뭐 혹시 내가 타게 되면 사고 싶은 게 많다는 뜻이야.
- 순철
- 하하! 넌 갖고 싶은 것도 많다. 어쩔 땐 부럽기도 해. 돈이 생기면 난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어. 평생 돌아오지 못해도 좋아.
- 지영
- 장례식에 보태자고 만들었는데 이렇게 많아질지 누가 알았겠어.
- 만수
- (순철에게) 어디로 가고 싶은데?
- 순철
- 응? (사이) 몰라. 생각 안 해봤어. 마누라만 없는 곳이면 어디든.
- 지영
- 하하! 순철아. 너 그냥 돈이 필요하다고 해. 그게 솔직한 거다 얘.
사이
- 만수
- 이제 그만 가자. 다음 모임은 5월 31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 지영
- 가족들은 건강하셔? 만수 너네 아버지는? 순철이 너희 부모님은?
- 순철
- 응, 뭐 그럭저럭. 워낙 정정하신 분들이라.
- 만수
- ….
- 지영
- 왜 말이 없니? 아버지는 좀 어떠시냐고?
- 만수
- (중얼대며) 이러려고 시작한 게 아닌데.
- 지영
- 뭐라고?
- 만수
- 먼저 갈게.
- 지영
- 너 숨기는 거 있지?
- 만수
- …. (급히 나간다)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 만수는 조심스레 전화를 받는다.
지영, 순철은 살금살금 다가가 통화를 엿듣는다.
- 만수
- (통화) 예… 여보세요? 지금 저희 아버지가… 그러니까….
- 지영
- (소리친다) 안 돼애애애애!
- 순철
- (돌변하여) 제기랄!
- 만수
- 너희 왜 그래?
- 지영
- (전화기에 대고) 야! 이 돌팔이 의사 놈아! 당장 살려놓지 못해!
- 순철
- (전화기에 대고) 네가 그러고도 의사냐! 이런 썩을!
- 만수
- 진정해 얘들아. 아무 일 없어. 병원에서 아버지가 날 찾으신대.
- 지영, 순철
- (몇 초간 굳어 있다가) 아… 그래애?
- 만수
-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까봐 그런 거야?
- 순철
- (능청 떨며) 그럼! 십년지기의 아버지가 생사의 문턱에 계신데 흥분이 안 되겠어, 그치?
- 지영
- (능청 떨며) 그러엄!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래. 아까는 진짜 눈 돌아가는 줄 알았다니까.
전화벨 소리
- 순철
- (통화) 여보세요. 예, 제가 순자 남편인데요. 병원이요? 예? (화색이 돈다) 순자가 교통사고를요? 위급하다고요? 수술이요? (웃으며) 아이고~ 이걸 어떡하죠? 제가 지금 수중에 돈이….
- 지영
- (휴대폰을 빼앗아) 저기요. 지금 당장 수술 들어가주세요. 수술비 드릴게요. 너희카드 1434-5665-9012-8756 홍지영이요. 할부되죠? 3개월로 해줘요. (끊는다)
- 순철
- (마지 못해) 고마워. 수술비 꽤 나왔을 텐데.
- 지영
- 고맙긴. 사람 살리는 게 먼저 아니야? 그게 죽이고 싶은 마누라라도 말이지.
- 만수
- 얘들아, 난 가봐야 되는데….
- 순철
- 잠깐.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 지영
- 뭐가? 제일 기뻐하던 게 누구였는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같더라.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뒀어야 했는데.
전화벨 소리
- 지영
- (통화) 내가 이 번호로 전화하지 말랬죠? 응? 지금 돈 안 부치면 당장 죽이겠다고? 얼씨구, 맘대로 하세요. 그놈, 더 이상 우리 가족도 아니에요.
- 순철
- (휴대폰을 빼앗아) 계좌 불러주시죠.
- 지영
- 어머 얘 봐? 전화기 안 내놔?
- 순철
- 너희은행 391-593404-14430 김산와. 2천 5백만 원. (휴대폰으로 입금한다) 입금했습니다. 풀어주시죠.
- 지영
- 야! 네가 뭔데 참견질이야!
- 순철
- 이제 솔직해지자. 난 네 오빠가 건강했으면 좋겠어.
- 지영
- 그래 고맙다! 네 마누라는 백 살까지 살 거다!
- 순철
- 고맙네! 네 오빠는 백오 살까지 사시길!
- 지영
- 백년해로가 웬말이냐~ 백 년 하고 오십 년은 더 살았으면!
- 순철
- 네 오빠가 내 마누라보다는 명이 길 것 같은데?
- 지영
- 네 마누라는 이백 살 먹고도 네 무덤 위에서 잔소리를 해댈걸.
- 만수
-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하하하하하! 순철이는 지영이네 오빠의 건강을 빌고, 지영이는 순철이 마누라의 건강을 빈다… 아름답다, 친구들아. 우리 아버지 건강도 빌고 있는 거지? 근데 있잖냐. 여기 이 돈이 나한텐 전혀 쓸모없는 돈이야. 살아생전에 조금이라도 잘해드려야 할 텐데… 수술비는 항상 모자라지, 병원비도 밀리지… 이러다가 돌아가시면… (사이) 뭐 곗돈이야 생기겠지. 그 돈으로 뭘 하지? 2억원짜리 성대한 장례식을 해드릴까? 관을 아예 금으로 맞출까? (사이) 아니, 그건 아니잖아. 다 쓸데없는 일이야.
긴 사이
- 순철
- 그래… 그 말도 일리가 있다.
- 지영
- 그래… 야 권순철. 너 아까 말이 좀 심했다?
- 순철
- 미안하다. 됐냐?
- 만수
- 가자, 이제, 제발.
순철, 만수, 지영은 차례로 돌아선다.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린다. 이전과는 다르게 전화벨이 길게 이어진다. 셋은 마치 무언가를 짐작한 듯, 아주 천천히 전화를 받는다.
- 지영
- (화들짝 놀라서) 예? (사이) 아니죠? 거짓말이죠?
- 순철
- (넋이 나가) 아, 네….
- 만수
- (힘겹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지영, 순철, 만수가 아지트로 돌아온다. 셋은 순서대로 금고를 열고 만수가 상자를 꺼낸다. 말없이 각자의 지분을 손에 쥔다. 그동안 부어왔던 자신들의 돈이다. 돈 봉투를 쥔 채로 몇 초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러곤 원래 일하던 자리로 돌아간다. 첫 장면처럼 일을 시작하려 하는데, 자신들의 두 손에 쥐여진 봉투들이 눈에 보인다. 셋은 하늘을 향해 봉투를 내던진다. 하얀 봉투들이, 그들의 돈이, 욕망과 욕심이 허공에 휘날린다.
세 친구는 다시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 얼굴엔 생기가 없고 몸은 축 처져 있다.
- 작가소개
- 장재원. 1990년 1월 11일 출생. 인동 장씨 36대손. 재상 재·으뜸 원. 과거 선비셨던 친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고시를 봐야 할 운명이었으나 연극판에 뛰어들면서 벌써 고사를 지내야 할 판. 태어난 지 11일 만에 삼자합당을 겪고 좌절. 노태우가 ‘범죄와의 전쟁’을 천명한 해에 태어남. 약 24년 후 윤종빈 감독의 영화를 보고서야 태어난 해의 분위기를 감지함. 당시 외국에선 독일이 통일을 이룩했고, 러시아의 전설적인 록 가수 빅토르 최가 의문사로 죽고, 전설적인 러시아 골키퍼 야신이 죽음. 러시아어와 문학을 전공하고 연극 동아리에서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대학로로 뛰어듦. 1년 만에 지쳐서 직업을 찾고자 하나, 잘 될지는 미지수. 직업을 찾아도 연극을 계속할 것은 확실함. 누구나처럼 연극계의 자유분방함을 꿈꿨으나 졸업 후 1년간 ‘현시창’을 느낌. 사람들을 하나하나 떼어놓으면 전부가 너무 좋은데 모아놓으면 왜 이렇게 되는지 심히 고민 중. 이번 세기 안에 한국의 나이제가 사라졌으면 하고 기도하고 또 절하고 있는 중. 모든 종류의 블랙코미디를 존경하며 비논리적인 것을 좋아함.
- 소개글 오세혁 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