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적 고전 읽기’의 함정
연일 유명인의 몰락이 전해지는 시절이었다. “늘 몰락하는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2008)던 어떤 문학평론가의 고백은 이미 지난 세대의 것인지,
언제나 승승장구할 것만 같던 사람들이 곤두박질했다는 소식을 뒤따르는 것은-매료는커녕-당혹과 실망을 넘어 거의 냉소와 비아냥이었던 듯하다. 그마저도 개별적인 맥락은 완전히 소거된 채, 한 단어의
신조어(쉬이 예상할 수 있듯이 나는 ‘지팔지꼰’을 생각하고 있으나, 애써 입 밖으로는 내지 않으려고 한다)에 잠시 담겼다가 이내 휘발되곤 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결론을 유보하는 윤리적 질문보다는 신속하고 단호한 도덕적 심판의 언어가 지배적인 시대에도 몰락의 서사가 소구력을 가질 수 있을까? 특히나 주인공이 맞이하는 파국이
그리스비극의 ‘운명’과 같이 자기 통제 밖에서 엄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주인공 자신에게서 비롯하는-것으로 여겨지는-현대의 비극이 그럴 수 있을까? 왕이 사라진 시대, ‘보통
사람common man’들의 평범한 삶 속에서 발생하는 파국에 주목한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작품들이 그럴 수 있을까? 당대에도, “만약
실제로 사무실에 찾아와
일자리를 구했거나
사람을 붙잡고 자기의 사정을 하소연했다면 관객 누구라도 그를 사무실에서 내쫓았을 것”이라는 냉소적인 평을 받기도 했다는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1949의 주인공,
윌리 로먼 같은 이가 말이다.
밀러의 동시대 극작가, 테너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는 ‘희곡이라는 시간을 초월한 세계The Timeless World of a
Play’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먼이
“하등 염려해줄 이유가 없는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평이 현실에서는 “약간의 진실성”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희곡이 무엇이냐에 대해선 충격적으로 잘못된 이해”를 반증한다고. 희곡은 그
무엇보다 “시간을 붙잡아 두는 일”이며, 그 “시간의 세계 밖”에서 우리는 현실에서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질주하며 존엄과 의미를 약탈하는 “인생의 파괴자”,
시간에 의해 황폐해지지 않은 극장 안에서만큼은, 여유 있게 제각기 다른 사정 하나하나를 살펴가며, 요약될 수 없는 타자의 삶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다는 것.
극단 백수광부 <다 내 아이들> ⓒ윤헌태/극단 백수광부
윌리 로먼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모두가 나의 아들All My Sons’1947의 조 켈러 또한 밀러가 희곡이라는 “시간의 세계 밖”으로 초대한 ‘흠결 많은 인간’이다. 조는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소개된다. 비록 둘째 아들 래리는 3년째 실종 상태이지만, 큰아들 크리스는 전쟁에서 무사히 돌아와 사업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믿었던 크리스가 래리의 전 연인인 애니를 집에 초대했다고 한다. 청혼하기 위함이라는데, 문제는 크리스와 애니가 결혼한다는 건 래리가 죽었다고 선언하는 셈이라는 점. 틀림없이 아내 케이트가 무너질
것이다. 허나 결혼을 반대하면, 크리스는 떠나겠다고 한다. 오직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키워온 사업을 버리고 말이다. 요컨대, 조가 굳건한 자기 자리라고 믿어온 ‘성공한 사업가이자 책임감 있는
가장’이라는 위치가 치명적으로 위태로워진 것이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할 수 있었다면 자신까지 잃지는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마지막 순간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조의 실체를 간략하게 정리해보자면, 조는 전쟁 당시 결함 있는 전투기 부품을 납품해 21명의 조종사가 사망하는 사고를 유발하고도, 그 책임을 동업자에게
뒤집어씌워 투옥되게 만든 후, 자신은 무죄 석방되어 사업을 키우고 부를 축적한 부도덕한 인물. 밝혀지는 진실에 크리스는 절규하지만, 조는 당당하다. 모든 것이 가족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므로, 자신은 떳떳하다는 것이다.
“그 전쟁에서 공짜로 일을 한 사람이 누구냐?”고, 조는 항변한다. “내가 감옥에 간다면 이 빌어먹을 나라 절반이 감옥에 갇혀야 할 것”이라며 자신을 변호한다. 정말 이 뻔뻔한 사내의 말을 계속
들어줘야 하는지 의문이 들 무렵, ‘전쟁’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전쟁으로 돈을 번다는 건 결국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에 일조하는 것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는다. 조가 정직하고
빈틈없이 결함 없는 부품만을 선별해서 선적했다고 하더라도, 피부색이나 언어만 다를 뿐 생을 달리하는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생겨났을 것이다. 전쟁은 이처럼 누군가는 결코 ‘내 아들’이, ‘내
아이들’이 아니라는 자기 확신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전쟁의 실체가 조의 도덕적 타협과 책임 회피를 정당화해 온 것일 터다.
조는 래리가 아버지의 범죄에 대한 수치심에 자살을 결심하기 전 애니에게 남긴 편지를 뒤늦게 읽고서야 “그들 모두가 내 아들이었던 것” 같다는 말을 끝으로 퇴장해 생을 끝낸다. 전쟁 시기,
이기적이어서 살아남았고, 전쟁 후에도 전쟁에서 얻은 것들을 누리며 살아온 ‘전쟁 수혜자’, 조는 그렇게 몰락하며 전쟁의 실체를 폭로한다. 전장에 있던 군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안락한 삶과
타협하며 가족 중심의 이기적인 삶에 매달렸던 당대 미국 관객 모두가 당사자였던, 바로 그 ‘전쟁’을 말이다. “늘 몰락하는 자들에게 매료”되었다는 바로 그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말하듯 조는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키는 것이다.
‘모두가 나의 아들’의 핵심은 이처럼 ‘전쟁’에 있기에, 작품의 배경을 ‘핼러윈 전야’로 변경해 이태원 참사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사회적 참사들을 환기한 극단 백수광부 <다 내
아이들>(연출 이성열, 2025년 11월 28일부터 12월 14일까지 선돌극장)은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읽혔다. 시의성을 강조한 프로덕션의 선택이 희곡에 붙들려 있던 시간을 풀어
이 시대의 얼굴들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든 부정한 삶이 그저 ‘너’를 위한 것이었다는 말로 자식의 삶을 죄스럽게 하는 가부장의 얼굴들이, 죽음으로 사건을 종결하여 피해자의 목소리와
진실 규명을 동시에 봉쇄하던 피의자, 또는 가해자의 얼굴들이 조의 얼굴과 겹친 것이다. 그런 프로덕션의 전략 속에서 조의 몰락은 이 시대의 흠결 많은 사람들의 몰락처럼 연민과 동정을 자아내지도,
새로운 상상을 제안하지도 않는 듯했다. ‘전쟁’이라는 조건이 약화되자, 조가 윤리적 질문의 발의자라기보다는 도덕적 심판의 대상으로 읽히게 된 것이다.
이 시대의 ‘전쟁’은 무엇인가? 사회의 어떤 면모가 오늘날 기성세대의 도덕적 타협과 책임 회피를 정당화해 주고 있는가? ‘모두가 나의 아들’이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다시 쓰인다면 답해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고전을 경유해 이 시대를 적확하게 짚어내는 것이 때로는 불가능하기에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기대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 많은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라면 자기 자식들에게는 기꺼이 무책임해지는 선택도 감수해야 하지 않겠냐고 묻는 루시 커크우드Lucy Kirkwood 작 ‘아이들The
Children’2016의 은퇴한
핵물리학자처럼, 낡디낡은 통념을 거둬내고 우리 시대를 위한 윤리적 질문을 추동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들이야말로 크리스가 바라 마지않던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는 것과 거기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아는” 즉,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로 안내하는 서사라고 믿는다.
글 전영지 공연 칼럼니스트·드라마터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