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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11월호

잡으로 시작되는 말
—반짝이는 잡동사니들

“가만 보면 넌 잡스러운 구석이 있어.” 가방에 담긴 잡동사니를 본 친구가 말한다. 나는 잡동사니를 뒤적여 뭔가를 찾는 중이었다. 잡스럽다는 것은 “잡되고 상스럽다”는 뜻이다. 물론 친구는 내 됨됨이나 행동거지를 가리켜 저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 “여러 가지가 뒤섞여 순수하지 않다”라는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을 것이다. 어떤 의미든 기분 좋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러고보니 잡동사니에도 ‘잡’이 들어간다. “잡다한 것이 한데 뒤섞인 것. 또는 그런 물건”을 가리키는 잡동사니는, 일이나 사람을 가리킬 때는 ‘한심하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그럴듯하게 반듯하지 못하고 자잘한 일. 또는 그런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잡동사니를 뒤져 클립을 찾아낸 나는 종이 뭉치에 그것을 물린다.

“넌 ‘잡스’스러운 구석이 있어”라고 말해주지, 괜히 입술을 비죽 내민다. 스티브 잡스의 ‘잡스’ 말이다.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기기’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가 성공한 데는 집요한 노력이 중요했을 테지만, 잡스러운 데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는 태도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말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이렇다. “창의성이란 단지 어떤 것들을 서로 잇는 것일 뿐이다. 당신이 창의적인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 일을 해냈냐 묻는다면 그들은 아마 조금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사실 정말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무언가를 보았을 뿐이고 그것은 얼마 후 그들에게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최고 업적은 잡스러운 것을 단순하게 만든 데 있을 것이다. 잡스러운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게 어쩌면 ‘잡스’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잡’으로 시작되는 단어를 떠올린다. 먼저 잡지雜誌. 집에는 매주, 매달, 격월, 혹은 분기나 반기에 때맞춰 잡지가 온다.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읽지도 못하면서도, 잡지를 받아 들 때면 놀라운 마음이 앞선다. 또 한 달이 지났구나, 어느새 가을이 다가왔구나, 벌써 하반기라고?…… 같은 생각이 줄지어 늘어선다. 어떤 잡지는 한 달, 혹은 한 계절을 앞서가기도 한다. 나만 뒤처진 것 같아 발만 동동 구른다. 잡지를 볼 때면 ‘때마침’이, ‘시의적절함’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낀다. 그러다 아직 과거에 붙잡혀 사는 나를 마주할 때면 별수 없이 마음을 다잡게 된다. 잡지를 말 그대로 해석하면 “여러 가지가 뒤섞인 기록”일 텐데, 이 때문에 잡지를 읽을 때면 자꾸 딴생각이 든다. 산에 갔다가 바다에 갔다가 시에 스며들었다가 소설에 빠져들었다가 정신이 없다. 자유로운 정신 없음이다. 여러 가지가 있기에 골라 볼 수 있고, 뒤섞여 있기에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거기가 출발점이 된다. ‘잡’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다음에 떠오른 단어는 잡채雜菜다. 잡채는 “여러 가지 채소와 고기붙이를 잘게 썰어 볶은 것에 삶은 당면을 넣고 버무린 음식”을 뜻한다. 이는 ‘잡’의 속성 중 중요한 것이 ‘여러 가지’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잡채는 “여러 가지 채소”이기 때문에 발음할 때 벌써 양파·당근·표고버섯·시금치·파프리카 등 잡채에 들어가는 식재료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잡채에 고기가 없다고 울상을 지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하지만, 잡채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야무진 손의 움직임이 그려진다. 다듬고 썰고 볶고 버무리는 바지런한 손놀림이 잡채를 가능하게 한다. 재료든, 기술이든 여러 가지가 한데 들어가는 음식은 손이 많이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이어진다. ‘잡’은 마치 일을 뜻하는 영어 단어 ‘job’처럼 쉽게 완성되지 않는 셈이다.

잡담雜談과 잡음雜談도 빼놓을 수 없다. 둘 다 성가신 느낌을 주는 단어긴 하지만, 잡담의 당사자(들)는 본인이 시끄러운 줄 잘 모르게 마련이다. 쓸데없음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잡담에 온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듣는 사람(들)은 잡담을 으레 잡음으로 느낄 것이다. 누군가한테는 흥겨운 것이 다른 누군가한테는 소음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잡담과 잡음이 가득한 상황에서 잡념雜念 혹은 잡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잡념에 잠긴 사람에게는 잡담도 잡음도 아무 소용이 없다. 머릿속이 이미 시끄럽기 때문이다. 흔히 잡념을 없애야 한다고, 그것을 어떻게든 떨쳐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잡념을 떨치지 않았기에 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때도 있다. 잡스러운 생각들을 서로 엮다 보면 세상에 없던 기발한 작품이나 발명품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잡초雜草. ‘잡풀’ 혹은 ‘푸새’로도 불리는 잡초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을 뜻한다. 사전적 정의에 다음의 문장도 붙는다. “농작물 따위의 다른 식물이 자라는 데 해가 되기도 한다.” 뽑아야 하는 것, 제거해야 하는 대상으로 흔히 인식되는 잡초를 볼 때마다 참으로 신기하다. 어찌 절로 났는지, 어떻게 뽑아도 뽑아도 또다시 나서 자라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농작물에 해가 되기에 환영받지는 못하지만, 그 생명력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잡기雜技에 능한 사람이나 잡가雜歌를 기막히게 부르는 사람을 바라보며 번번이 놀라는 것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 잡화점에 들어갈 때면 눈이 똥그래졌다. 잡화雜貨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잡다한 물품”을 가리키는데, 나는 하나하나의 물건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물음과 함께였다. 필요로 만들어진 자질구레한 물건들은 보란 듯이 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던 듯싶다. 내가 작은 것, 자잘한 것, 보잘것없는 것에 스스럼없이 눈과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잡스러운 것들을 잡아채고 잡아매고 잡아당기고 마침내 잡아두었기에 나는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여러 가지가 뒤섞인 허름한 물건”을 가리키는 ‘잡살뱅이’에 주목했기에 사연을 궁금해했고 “제맛 이외에 더 나는 군맛”을 뜻하는 ‘잡미雜味’에 탐닉했기에 여운을 오래 붙들 수 있었다. 쓸 때 가장 자유로운 글은 “일정한 체계나 문장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되는대로 쓴 글”을 의미하는 잡문雜文이다. 다름 아닌 이 글처럼 말이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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