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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8월호

거듭되는 인연과 상실에 관하여

어떤 이야기가 춤이 될 수 있을까. 끝내 이뤄지지 못한 수많은 사랑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 영원한 고전으로 불리는 ‘로미오와 줄리엣’도 마찬가지다. 생을 종결하기로 결심한 젊은 연인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무엇인가. 모든 것을 삼켜버린 죽음이라 할지라도, 예술은 그것을 다시 건져 올려 무대 위에 펼쳐 놓는다.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아느냐고 묻는다면 누구든 그렇다고 답하겠지만,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기억에 남는 예술 작품을 꼽으라면 쉽지 않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손끝에서 완성된 세기의 명작 ‘로미오와 줄리엣’은 수많은 예술 장르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재해석을 거듭해온 텍스트다. 가문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힘으로부터 희생되는 젊은 연인을 다룬 이야기는, 실제 그 분량이 길지 않지만, 이야기 내부를 가로지르는 복잡한 이데올로기가 400년 넘는 세월을 지나기까지 해석의 다양성을 낳고 있다.

누군가는 이들의 관계를 금지된 사랑으로 보기도, 비극적인 결말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운명적 만남으로 보기도 한다. 이들은 너무나 사랑하지만, 아니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죽어서야 함께할 수 있다는 선택에 이른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작품상 겨우 십 대이지만, 나이가 중요하겠는가. 이들은 서로가 이어질 수 없다는 현실적인 조건을 알면서도 자기 파괴적인 사랑을 선택하고, 그 기쁨에 충실함으로써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 삶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뗄 수 없는 하나로 존재하고, 생을 지키려는 힘만큼이나 생을 끝내려는 힘은 더욱 강렬하다. 또한 이들이 죽음을 택함으로써 비로소 완성한 사랑은, 무대에 남겨진 이들에게 사랑 이상의 의미를 탄생시켰다.

레오니드 라브롭스키가 안무한 1940년 작에서부터 프레더릭 애슈턴·존 크랭코·케네스 맥밀런, 2000년대 이후로는 알렉세이 라트만스키와 매슈 본에 이르기까지. 숱한 안무가의 손을 거치며 거듭 새로운 모습을 보여온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역사는 1936년 발표한 프로코피예프의 발레음악으로부터 시작한다. 표제가 붙은 각각의 장은 극적인 서사를 풍부하고도 세밀하게 담고 있으며, 특유의 비장미를 드러낸다. 좋은 음악 위에 춤이 탄생할 수 있다고 여긴 20세기 후반,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수많은 발레 작품을 탄생하게 하는 훌륭한 마중물이었다.

그중에서도 오늘날 ‘드라마발레’로 불리는 장르를 확립한 계기로 볼 수 있는 케네스 맥밀런이 안무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영국 로열 발레에서 처음 막을 올린 이래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얻었다. 서사를 토대로 쌓아 올린 풍부한 표현, 캐릭터의 내면과 심리를 꿰뚫는 통찰은 16세기 후반에 쓰인 이야기가 오늘날까지도 생명력을 가진 이야기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안무가는 주인공 남녀의 이야기가 특별한 것이 아닌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무엇보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자 나서는 여성의 면모를 뚜렷하게 드러냈다.

ⓒConrad Dy-Liacco

특히 두 사람이 사랑을 고백하는 발코니 파드되(2인무)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이성적 감정이 충만한 장면이다. 창가로 찾아온 로미오를 지긋이 바라보던 줄리엣은 이내 결심한 듯 계단을 달려 내려오고, 두 사람은 갑자기 속도를 늦춰 나란히 손을 잡은 채 천천히 객석을 향해 걷는다. 이처럼 작품은 격정적으로 춤을 이어가다가도 잠시 화면이 정지된 듯 속도를 조절해 감정의 여운이 길게 남도록 만들고, 입맞춤 같은 직접적인 표현을 장면 곳곳에 심어두어 그 설렘과 두근거림이 생생하게 전해지도록 한다. 이처럼 맥밀런의 안무는 관계와 감정의 농도를 차근차근 짙게 물들이며 죽음에까지 이르도록 한다.

맥밀런의 작품이 고전이라면, 이후로도 꾸준히 ‘로미오와 줄리엣’은 재탄생해왔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안무가 매슈 본은 2019년 발표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을 청소년 보호수감시설로 옮겨 젊은 남녀의 연약한 사랑을 보듬기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지 상기하게 했다. 한편, 서양 고전이라는 선입견을 딛고 2021년에는 홍콩 발레에서 새로운 <로미오+줄리엣>이 탄생했다. 예술감독 셉타임 웨버는 극의 배경을 16세기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1960년대 홍콩으로 옮겨왔다. ‘아시아의 용’이라 불릴 정도로 성장을 거듭하며 전통적 가치관과 급격한 변화가 뒤섞이던 시기, 영화 <화양연화>로 익숙한 그 시대로 설정한 것이다. 여성미를 강조한 치파오 의상,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밤거리, 따뜻하고 온화한 색감의 실내 장식 등은 이방인의 눈으로 봐도 전형적인 홍콩의 이미지를 구현해낸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이 쓴 텍스트가 이렇게나 폭넓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예측했을까? 웨버는 중화권의 삼합회 문제를 끌어들여 가문 사이의 갈등이라는 거대한 구조를 강화하고, 아시아인과 서양인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뒤엉키게 했다. 춤에는 중국식 권법인 쿵후의 움직임을 결합하고, 전통놀이인 마작 또한 주요한 모티프로 등장한다.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홍콩식 무대 분위기와 안무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친밀감을 띤다.

고전은 역시 고전이며, 인간사의 갈등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거듭된다. 숱한 사랑과 상실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마주하지만, 그럼에도 매번 새로운 몸짓을 발견하는 것은 예술이기에 가능한 감상이다. 붉은 배경에 황금색 용이 꿈틀대고 화려한 네온사인이 불을 밝힌 무대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를 다시금 만나는 경험은, 시대를 초월해 생동하는 예술 작품의 가치를 상기하게 만든다.

1960년대 중화권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궁금하다면
홍콩 발레 <로미오+줄리엣>
9월 26일과 27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김태희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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