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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7월호

사뭇 다른 ‘세탁기 노래’

수염이 텁수룩한 외국 남성이 기타를 들고 세탁기 앞에 앉아 있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약간은 긴장된 표정이다. 세탁기에서 종료를 알리는 신호가 전자음 선율로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남자는 기타로 화음을 넣기 시작한다.

유튜브에서 ‘세탁기 노래wash machine song’로 검색하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영상 중 하나다. 세탁기는 국내 양대 가전사 중 하나의 것. 영상은 대부분 해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 제조업의 역량을 나타내는 징표로 뿌듯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타 연주는 여러 영상의 일부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목소리로 여러 성부를 덧입혀 리믹스한 영상을 올렸다. 아예 피아노를 세탁실에 갖다 놓고 피아노 반주로 세탁기와 협연한 사람도 있다. 이런 수많은 영상이 더러는 수백만 회씩 조회수를 올렸다.

예외는 있지만 독특하게 느껴지는 것은, 대부분은 이 노래의 정체가 영상 제목이나 설명에 없이 그냥 ‘세탁기 노래’로만 나와 있다는 점이다. 댓글을 살펴봐야 원곡을 알 수 있는 경우가 태반이고 때로는 댓글에마저 없다. 지식욕이 강한 한국인이라면 제목 또는 눈에 띄기 좋은 곳에 원곡의 제목을 표시했을 것이다. 이 신호음은 프란츠 슈베르트 ‘송어’에 나오는 선율이다.

이 곡은 두 버전이 있다. 슈베르트는 1817년 가사가 있는 가곡 ‘송어’를 썼고 2년 뒤에는 피아노·바이올린·비올라·첼로·더블베이스를 위한 5중주곡의 4악장에 이 선율을 주제로 한 변주곡(특정 선율을 여러 가지로 변형하거나 장식을 넣어가면서 거듭 연주하는 형식)을 넣었다. 이 작품은 슈베르트의 ‘송어 5중주곡’으로 불린다.

필자가 중고생이던 시절 학생들 사이에 널리 유행해 식상하다시피 한 개그가 있었다. 음악 과목 시험에 악보와 함께 ‘이 곡의 작곡가와 이름을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 덩달이(철수나 영희여도 상관없다)는 시험공부를 하면서 ‘슈베르트니까 시옷, 슈베르트 송어’라고 암기했다. 그런데 시험장에서 문제를 보자 어느 자음(닿소리)이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의 주인공은 답을 적었다. ‘베토벤의 붕어’.

베토벤은 붕어 5중주곡을 쓰지 않았지만, ‘도미 5중주곡’은 있다. 미국 피바디 음대 교수인 케빈 푸츠Kevin Puts가 작곡한 5중주곡 ‘도미The Red Snapper’다. 슈베르트 ‘송어’와 같은 편성으로 물속에서 노니는 물고기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며, 악장 하나를 ‘주제와 변주’로 구성한 점도 ‘송어’와 닮았다. 이 곡은 2021년 예술의전당에서 실내악 연주단체 ‘앙상블 이볼브’가 국내 초연했다.

얘기가 곁길로 샜지만, 이 곡의 선율은 ‘세탁기 노래’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어, 들어봤어’라고 할 만한 친근한 멜로디다. 그런데 이 곡이 슈베르트의 반체제 정신을 담은 ‘저항 음악’이라면?

이 곡의 원곡이 가곡이었으니 작곡가 슈베르트 외에 작사자에 대해서도 궁금해진다. 작사자의 이름은 크리스티안 슈바르트Christian Friedrich Daniel Schubart다. 슈바르트 작사·슈베르트 작곡. 운율도 딱딱 맞아떨어진다.

크리스티안 슈바르트는 독일 서남부 출신의 시인이자 음악가였고 당대 독일의 이름난 반골, 말하자면 반체제 인사였다. 그는 당시 여러 나라로 분열돼 봉건 제후들의 압제 아래 놓여 있던 독일의 실상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고, 여러 차례 감옥에 갇혔다. 그가 감옥에서 쓴 시 중의 하나가 ‘송어’다.

그러고보니 그동안 가곡 ‘송어’를 들으면서 계속 들던 의문이 다시 떠오른다. 송어는 단지 명랑한 노래일까? 노래 후반부에는 뜻밖의 가사가 등장한다.

“도둑(낚시꾼)에게 시간은 너무 느리게 흘렀고, / 그는 개울을 휘저어 흐리게 했다. / 그리고 눈치채지 못할 사이에 / 낚싯줄이 팽팽히 당겨졌고 / 송어는 잡혀 허우적거렸다. / 나는 화가 끓어오르는 채 / 속임수에 넘어간 송어를 바라보았다.”

평화로운 낚시의 정경과는 다르다. 단지 추측일 뿐이지만, 감옥에서 이 시를 쓴 슈바르트는 시냇물을 휘저어 송어를 잡는 낚시꾼의 모습에서, 권력자가 음모를 써서 정적을 잡아넣는 일을 풍자하고 비판한 것 아닐까.

슈베르트가 가곡 송어를 피아노 5중주로 새롭게 쓴 과정도 예사롭지 않다. 1819년 7월 13일, 슈베르트는 오스트리아 북부의 도시 슈타이어에 갔다. 그곳에는 지역 유지이자 광산주인 파움가르트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젊은 작곡가를 두 달 동안이나 각별히 대접했다. 조건은 하나였다. “송어는 저와 친구들이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우리가 연주할 수 있도록 송어의 선율을 넣은 실내악곡을 써주실 수 있을까요?”

이 곡에 열광한 시골 유지들의 속사정은 무엇이었을까. 혹 당시의 억압적인 체제에 대한 불만이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당시 유럽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가곡 ‘송어’가 쓰이기 2년 전인 1815년 유럽 국가 사이에 나폴레옹 전쟁을 결산하는 빈 의정서가 체결됐다. 내용은 봉건적이고 억압적인 구체제(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의 복원이었다.

저항의 내용이 담겼다고 해도 결국 가사를 쓴 슈바르트의 내면을 반영한 것이지 슈베르트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슈베르트의 명해석가이자 역사학자인 이언 보스트리지Ian Bostridge의 책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는 시를 즐겨 쓴 슈베르트가 죽기 전 남긴 마지막 시가 실려 있다. 제목은 ‘민중에게 보내는 탄식’이다. 읽어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슈베르트와 사뭇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여, 너는 스러졌구나! / 무수한 민중의 힘이여, 허무하게 소진되었구나 / 누구 하나 민중으로부터 차별되지 않지만, / 그 모두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역시 한 사람도 없구나….”

보스트리지는 책에서 ‘송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거듭 말하거니와, 필자의 상상일 뿐이다.

원시原詩를 쓴 동기가 무엇이든, 이 곡은 여름을 맞아 듣기에 제격인 작품이기도 하다. 가곡도, 피아노 5중주도 청신한 기분으로 가득차 있다. 슈베르트가 7월에 지역 유지들의 초청을 받아 간 슈타이어에도 맑은 개울이 흐르고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송어 5중주’가 울려 퍼졌을 것이다.

이 곡은 여름이면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야외 여름 음악제에서 즐겨 연주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1967년 미국 말버러 음악축제Marlboro Music Festival에서 녹음된 ‘송어 5중주’ 음반을 들어보면 가곡 ‘송어’의 주제가 흐르고 나서 다섯 연주자가 숨을 죽이는 순간, 또록또록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작지만 분명한 귀뚜라미 소리다. 말버러 음악축제도 풀밭이 있는 노천에서 청중이 연주를 감상한다. 자연의 뛰어난 음악가인 귀뚜라미들도 아름다운 화음에 동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여름의 정취와 함께 즐기는 ‘송어’가 궁금하다면
정명훈과 비르투오지
7월 3일 오후 7시 30분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정명훈(피아노), 클라라 주미 강·김재영(바이올린), 박경민(비올라), 송영훈(첼로), 성민제(더블베이스), 김한(클라리넷)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 ‘송어’, 베토벤 클라리넷 3중주

글 유윤종 동아일보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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