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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6월호

보여주는 몸,
보여지는 몸

무대 위의 몸은 ‘보여지는 몸’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리듬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보여지는 몸이야말로 무대에 오른 몸에 주어지는 고유한 정체성일까? 예술은 시대상을 반영하고 작품은 또한 당대의 사조와 취향을 담고 있기에 오늘날 ‘클래식 발레’로 불리는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치 무대 세트의 일부처럼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무용수의 몸을 발견하게 된다. 19세기 고전발레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예술 양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한편으로 여성 무용수의 존재는 대상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남성 무용수는 발레리나를 들어올리기 위한 존재로 치부된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역설적으로, 춤은 무용수의 몸을 통해야만 한다. 몸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주체이며 살아가는 방식 자체다. 무용수는 예술을 위해 도구화할 수 있는 몸을 갖고 있고, 그 몸은 타자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되기 전에 이미 세계 안에서 행위하고 감응하는 실존적 기반이다. 무용수는 자신의 몸으로 작품을 체현한다. 이야기에 적힌 내용, 언어에 부여된 의미, 안무로 상징화된 감정과 캐릭터의 성격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한다. 캐릭터 그 자체가 되기 위해 종종 무용수의 현상적 신체는 잊히고 사라진다.

그러나 오늘날, 타자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되던 몸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문화· 제도적 규범에서 벗어나 현존한다. 춤이라는 틀 안에 규정된 몸을 새롭게 정의하고 구성함으로써 무대라는 허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든다. 무용수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누구도 아닌 자기 몸으로 바로 선다. 몸은 도구도, 매개도, 표현 방식도 아닌 공연 행위의 주체로 부상한다. 관객의 시선이 향하는 네모난 무대에 사로잡힌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 실천의 주체로 서게 되는 것이다.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연습실을 떠나지 않은 채 발레라는 장르 너머로 창작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안무가 이르지 킬리안 Ji?i Kylian의 작품에서 무용수의 몸을 다시 바라본다. 그는 마리우스 프티파 시절의 고전발레에서부터 발레 뤼스의 혁신을 거쳐 조지 발란신의 모던 발레로의 이행까지, 발레의 역사를 존중하고 계승하며 자신의 시대에 걸맞은 발레를 창조해냈다. 프랑스 궁정 시대에서 예술춤으로 인정받기까지 차근차근 정립해온 엄격한 테크닉을 토대로 정교하면서도 세련된 기교를 창조하고, 음악적 아름다움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실상 그의 예술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재다. 그는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우리 삶에 결부된 다양한 감정을 춤으로 이야기하고자 했다. 또한 안무에 있어 신체를 단순한 기술적인 매체가 아닌, 감정과 철학을 전달하는 시적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킬리안의 작품을 볼 때 전체 그림만 아니라 세부 동작에서 비롯하는 정서적 대화에 감응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네덜란드댄스시어터Nederlands Dans Theater, NDT에 재직하던 시절 중심이 되는 단체인 NDT 1 외에 22세 이하 무용수를 위한 NDT 2와 은퇴해야 하는 나이로 여겨지는 40세 이상 무용수로 구성된 NDT 3를 창단한 것도 일맥상통한다. 단체의 발전이나 무용수의 직업 전환 같은 목적도 있지만, ‘모든 인간은 춤춰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담은 것이다. 이로써 전성기 무용수만 아니라, 청년의 몸과 나이든 몸까지 모든 몸은 주체가 될 수 있으며 나름의 미학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수많은 작품을 통해 삶과 죽음, 사랑에 관해 이야기해온 킬리안은 단순히 에로스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춤에 대한 사랑, 예술에 대한 사랑,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탁월함에 대한 사랑을 포함한다. 인간의 삶을 흥미롭게 하고 유의미하게 나아가도록 하는 매개 같은 것이다. 무용수의 몸과 움직임에 매료돼 춤의 본질을 발견하는 그는 잘 훈련된 신체 움직임과 이에 비롯하는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몸은 그저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대상이자 춤의 매개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깊이를 지닌 주체적 매체이기 때문이다. 20세기로부터 21세기를 넘나드는 그의 여러 작품에서 우리는 다양한 몸을 발견할 수 있다.

브리튼 ‘진혼교향곡’에 흐르는 슬픔과 분노, 위로와 치유의 선율을 배경으로 삼은 <잊힌 땅Forgotten Land>1981은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생의 춤>에서 보여지는 인생의 3단계를 그려낸다. 그림에 자리하고 있는 색색의 커플은 사랑, 삶과 죽음에서 비롯하는 인생의 숙명을 보여준다. 생과 사의 경계처럼 땅과 바다를 나누는 해안선을 배경으로 우리의 삶이 춤춘다.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작품이지만, 그래서 표현하는 몸은 더욱이 그 자체로 중심이 된다.

한편 1995년 작 <벨라 피구라Bella Figura>는 신체의 선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유니타드 차림을 넘어 상반신 탈의를 감행하며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과 허상,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훌륭한 이미지’, ‘아름다운 모습’ 등으로 번역되며 나아가 아름다운 삶의 방식까지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제목은,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보여지는 몸과 감추고 싶은 몸 사이의 충돌을 드러낸다. 특히 상체를 노출한 채 당대 복식의 붉은 스커트를 입고 10분간 펼치는 춤은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한 겹도 덮지 않아 연약한 본성이 그대로 노출된 상반신과 ‘규범’ 혹은 ‘양식’이라는 치마 속에 숨겨진 하반신, 그리하여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 수행성조차 지워버린 몸. 많은 부분을 드러냈으나 더 많은 부분을 숨긴 이들의 움직임에는 몸이 보여줄 수 있는 것과 몸으로 하여금 보여질 수 있는 것이 혼재해 있다.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몸과 진실한 몸은 다른가? 혹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무대에서 보여지는 몸은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보여지는 몸에서 스스로 걸어 나와 세계와 마주할 때 무용수의 몸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몸으로 거듭난다.

이어리 킬리안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국립발레단 <킬리안 프로젝트>
6월 26일부터 29일까지 GS아트센터

글 김태희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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