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문화+서울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SOUL OF SEOUL

6월호

사카모토 류이치, 생명의 음악

사카모토 류이치의 다큐멘터리 <코다>의 한 장면.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자 사카모토는 파란색 양동이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그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다. 톡톡. 툭툭. <코다>는 그렇게 빗소리를 듣는 사카모토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그 인상적인 장면을 나도 한참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언제부터 빗소리를 찾아 듣게 되었는지, 왜 아늑한 스튜디오 바깥으로 주저 없이 향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 건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젊은 시절 그의 활동은 내게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ellow Magic Orchestra, YMO의 화려한 무대로 기억된다. 물론 그보다 앞서 공개된 1978년 앨범 『Thousand Knives』와 그 앨범 커버의 반항기 어린 표정도 떠오르지만, 청년 사카모토를 떠올리면 YMO 무대 이미지가 무엇보다 또렷하게 비친다. 온갖 전자악기를 무대에 깔아두고 음향실의 엔지니어처럼 단정한 셔츠를 입은 채 악기를 연주하던 그의 모습. 그가 동료들과 함께 들려주던 멋진 일렉트로닉 팝은 지난 세기에만 꿈꿀 수 있던 미래의 이미지를 닮아 있었다.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라니, 이 멋진 음악가들이 5음음계를 거침없이 써가면서 만들어내는 그 독특한 사운드라니. 내게 그 음악은 ‘아시아 퓨쳐리즘’이라 부르고 싶은 무언가였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건 그토록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던 음악가가 서서히, 깊은 곳으로 수렴하는 방향으로 음악을 바꾸어갔다는 점이다. <전장의 크리스마스>와 <마지막 황제>로 대표되는 수많은 영화음악의 경우처럼. 사카모토가 만든 초창기 영화음악과 함께 혼란스러운 십 대 시절을 잘 눌러 보낸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닐 거다. 때론 영화보다 더 사랑받은 음악들을 따라 들으며, 나는 몇 안 되는 음만으로 이렇게 정확한 정서를 포착할 수 있다는 데 감탄하곤 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단은 그가 훌륭한 음악가여서 그렇다는 뻔한 답이 있지만… 영화음악을 쓰는 건 “다른 관점으로 일하라는 주문 같은 것”이라 표현한 그의 말에 의지해보고 싶다. 그냥 음악이 아닌 ‘영화’를 위한 음악. 사카모토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 속 인물의 이야기.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을 들으며 나는 그가 타자의 마음을 무척이나 섬세히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진실하게 바라보는 눈빛, 그런 것이 함께 떠올랐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때, 그의 음악은 명확히 형언하기 조금 어려운 것이 되었다. 그는 환경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를 마음 깊이 받아들였으며, 긴 암 투병의 시간을 지났다. 그 모든 일이 사카모토의 음악과 무관할 수 없었다. 분명한 선율과 리듬을 지닌 ‘음악’의 존재감이 강하게 드러난 초기 영화음악 작업과 달리, 2015년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서 그의 음악은 영화 전체의 음향적 세계와 자연스레 맞물리는 구름 덩어리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음악과 음향의 경계를 변별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암 투병 이후 오랜만에 선보인 2017년의 음반 『async』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는 시를 낭독하는 목소리, 프리페어드 피아노 연주, 숲을 거니는 발소리, 때로는 주저 없이 음악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불규칙하게 산재해 있다. 그건 잘 가꿔진 정원이라기보다는 무성한 풀들이 자라 산책로를 뒤덮어버린 숲길 같았다.

대담집 『음악과 생명』2025에서 사카모토는 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와 함께 “로고스logos와 피시스physis의 대립”에 대해 이야기한다. ‘로고스는 인간의 사고 방식과 논리, 피시스는 자연 그 자체’고, 자신은 이제 피시스적인 것을 쫓고 있다는 사카모토의 설명은 변화한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존 케이지가 “음악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소리가 예속되는 상태를 거부”한 것처럼, 사카모토는 소리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을 듣는 데 집중해왔다. 그는 더 이상 그렇게 명확한 패턴을 지닌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 질서정연한 구성을 만드는 데 집착하지 않고, 통제 불능의 소리를 공들여 들었다. 존재하는 소리를 발견하고 받아들였다. 그런 그의 작업은 그가 만들어낸 것과 그가 들은 것이 함께 얽혀 흐르는 하나의 총체였다.

사카모토 말년의 음악은 복잡해졌고, 낯설어졌으며, 많은 거장 음악가가 그런 것처럼 그 자신만의 세계를 이루는 고유한 음향으로 자리매김했다. 누군가에게 이 음악은 복잡하고 어려운, 실험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새로움을 위한 음악적 실험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적 질서를 벗어나 더 큰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소리를 받아들인 겸허한 시도였다고 느낀다. 무언가를 쌓아 올리는 건축의 차원이 아니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듣고 수용하려는 차원의 음악.

다분히 진취적인 음악을 만들다가도 맑은 눈으로 타인을 바라보던 음악가는 밝은 귀로 세계를 들었다. 그는 어떤 특정한 형태나 패턴을 지향하지 않고 그저 들었다. 그리고 듣기의 끝에서, 그는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소리들을 고요히 포착했다. 어쩌면 그것이 한평생 먼 길을 돌아와 그가 비로소 다다른 ‘생명의 음악’이 아닐까.

사카모토는 이렇게 말한다. “지구라는 행성에는 공기의 진동, 다시 말해 소리라는 현상이 늘 일어나고 있는데 저는 누군가가 귀 기울여 그 진동을 공유하는 시공간이 있는 상태를, 음악이라 부른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강물의 여울은 인간이 있든 없든 항상 흐르고 있는데 누군가가 연주하지 않더라도 거기에서 일어나는 공기의 진동을 듣는다면, 그건 음악인 거예요.” 파란 양동이를 쓰고 빗소리를 듣던 사카모토는 음악을 듣고 있었을까?

글 신예슬 음악평론가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