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엔딩에 대하여
이야기는 어디서 끝나(야 하)나요?
영화감독이나 소설가를 인터뷰할 때면
나는 이 질문을 자주 던진다. 이 장면이
‘끝’이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다른
엔딩을 고려하지는 않았나요. 질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지만 내가 정말 궁금한 건
첫 번째 질문 쪽이다. 결말은 중요하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연속극에 해당될 말이다.
연속극에서는 마지막 회에 이르면 모든
갈등이 해소된다. 그리고 미혼인 사람이
있다면 부지런한 짝짓기가 이어진다.
결혼식을 올린다. 아이가 태어난다.
‘노총각’ 삼촌이나 ‘노처녀’ 이모는
‘좋은’ 사람과 마주보며 얼굴을 붉힌다.
이러한 모든 경사가 차곡차곡 쌓여
마지막 장면이 결혼식 가족사진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동화적 엔딩에 다름아니다.
영화의 엔딩은 그보다는 덜 전형적이지만
상업영화의 경우는 또 나름의 규칙 속에서
끝난다. 이쪽도 ‘해피’해야 한다.
더 정확하게는 “꽉 닫힌 해피엔딩”이어야
한다. (속편을 암시하는 클리셰가 선명한)
공포영화가 아니고서야 살인범이
되살아날 미래를 암시하면 안 되고
주인공은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 사랑은
이루어지고 사건은 해결되고 주인공은
인정받는다. 다른 말로 하면, 상업영화가
아니라면 조금은 모호하고 열린, 생각이
많아지는 엔딩으로 향한다. 많은 경우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감정적으로는 ‘한복판에서’ 끝나곤
한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영화관을
나서면서부터 생각을 시작하게 된다.
바다에서 주운 조약돌을 바다를 상상하며
만지작거리듯이 상념에 빠진다.
소라 네오 감독의 첫 장편 영화
<해피엔드>2024는 ‘해피엔드’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근미래의 도쿄,
고등학교 3학년인 유타(구리하라 하야토
분)와 코우(히다카 유키토 분)는 음악에
빠져 있다. 둘이 속한 음악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클럽에 음악을 들으러 간 날, 유타와
코우만 간신히 클럽에 잠입하지만 음악에
빠져들려는 차 경찰이 단속을 위해
들이닥친다. DJ가 건넨 음악이 든 USB를
들어보기 위해 학교 동아리방에 잠입한
그들은 교장의 자동차를 직각으로 세우는
장난을 친다. 교장은 노발대발하며 AI 감시
시스템을 학교에 도입한다. 복장 불량,
흡연, 애정 행각은 하나하나 카메라에
포착되고 즉각 벌점이 매겨진다.
음악동아리 역시 수난을 겪는다. 특히
비일본계 학생들이 있는 음악동아리는
규율에 저항할 때마다 유난한 낙인이
찍힌다. 재일 한국인인 코우는 특히 그렇다.
한국 식당을 운영하며 코우가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코우의
어머니는 아들이 말썽을 피울 때면 학교에
달려와서 먼저 사죄하며 고개를 숙인다.
거기에 더해, 코우는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후미(이노리 키라라 분)와 가까워지며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음악이 아닌
무엇에도 관심이 없는 유타와 음악 말고도
생각할 게 많아 버거운 코우의 우정에는
서서히 균열이 일어난다. 그들은 여전히
어머니가 자주 외국에 가느라 집을 비우는
유타의 집에서 같이 놀고 잠들지만, 따로
보내는 시간이 늘어간다.
소라 네오 감독은 사카모토 류이치의
아들로 먼저 알려졌다.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2023를 만든
그의 첫 번째 극영화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인상의 독특한
SF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AI 감시
체제가 학교에 도입되는 상황이지만,
이 작품에 흔히 말하는 SF 느낌은 없는
쪽에 가깝다. 오히려 주인공들이 속한
공간과 시간의 지형을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 이것이 과거이자 현재인 동시에
미래의 이야기임을 암시하기 위해
도입부에 ‘근미래’라는 말을 얹어두었다.
일본이 이 상태 그대로 나아간다면 미래엔
어떤 모습일지에 관한 사고 실험의 장이
되는 것이다. 재일 한국인인 코우와 그의
어머니가 역사에서 출몰한 존재라면,
어릴 적 자기 집이 친구들의 아지트였다는
감독의 십 대 시절을 연상시키는 (또한
감독처럼 테크노 음악에 헌신하는) 유타는
소라 네오 자신의 개인사에서 솟아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교차점에서, <해피엔드>는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우리는 사회에서 만났다면(선택의 여지가
더 있었다면) 친해지지 않았을 사람들과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이유로 같은 학교에
다니고 옆자리에 앉고 친해지기까지 한다.
너와 나의 경계는 쉽게 허물어져서 사랑과
우정을 분간하기 불가능해지기도 한다.
결핍은 우정을 쉽게 접착시키고, 공통점은
쉽게 부풀어 그들을 삼켜버린다. 내가 정말
그것을 좋아했는지 그것을 좋아한 친구를
좋아했을 뿐인지 알게 되는 것은 언제나
나중, 심란할 정도로 나중의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유로
점차 멀어진다. 예를 들면 이사, 진학, 취업 같은 이유로.
새로운 무대에 ‘적응’하고 돌아보면
가까웠던 누군가와 이미 멀어진 뒤다.
다툼도 갈등도 없었다. 중력이 끌어당기듯
가까워졌듯이,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멀어졌다. 이유를 따지자면
못 찾을 건 없지만 그 어느 것도 그럴듯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우리는 (<해피엔드>의
엔딩에서처럼) 육교의 반대 방향
계단으로 내려가 헤어졌고, 우리의 길은
다시 교차하지 않았다. 교차했다 해도,
그것은 추억으로만 아름다울 뿐이었다.
학교를 떠난 나는 그때와 다른 사람. 너
역시 다른 사람. 사람은 변치 않는다지만,
살아 있는 한 변하지 않는 생존은 없다.
<해피엔드>라는 제목은 그래서 돌출적인
방식으로 예언적이다. 소라 네오 감독이
생각하는 십 대 우정의 ‘해피’한 ‘엔드’는
그들이 오래오래 ‘지금 그대로’라는 데 있지
않으니까. 그들은 ‘헤어져야만’ 한다.
지금 무엇인가가 끝났다. 간 것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앞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는 방향으로 힘껏 나아갈 뿐이다.
돌아보지 않기. 뒤에 두고 온 것의
아름다움에 취해 머물지 않기. 그리고
어느 날,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테크노
음악의 진동을 느끼다가, 교복을 입고
뛰어가는 아이들을 보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다. 함께하기를 약속하지 않아도
충분했던, 앞을 보고 걸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믿었기에 담담했던 이별이야말로
‘해피엔드’였기에.
글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