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문화+서울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SOUL OF SEOUL

3월호

국립극장을 지키는
자유로운 위엄

역사가 길면 쌓이는 게 많다. 연륜과 명성, 여러 사연과 함께 차곡차곡 소장품도 모이기 마련이다. 예술기관이면 더욱 자연스럽게 공용 공간에 작품이 놓인다. 무심하면 스쳐 지나고 말겠지만, 잠시 멈추고 관심을 가진다면 그림들이 새삼 다시 보인다. ‘멈추면 보이는 것들’이다.

75년 전통의 국립극장에서도 참으로 많은 미술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인기 아이돌 그룹 세븐틴에게 ‘음악의 신’이 있다면 국립극장에는 ‘연극의 신’이 있다. 해오름극장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에 걸린 이세득1921~2001의 부조 작품이다. 폭 263cm, 높이 302cm에 달하는 대작이 벽에 짜맞춘 듯하다. 1층에서 걸어 올라가며 만난다면 마치 신전을 오르는 것 같은 압도적 기운을,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길에 마주한다면 의외의 장소에서 대면하는 경건함을 느낄 수 있다. 금색과 검정, 나뭇결이 생생하게 보이는 짙은 붉은색의 조화가 강렬하다.

이세득, <연극의 신>, 1973, 사진 조상인

고대 이집트의 벽화를 상상하게 만드는 작품 속에 인물 두 명이 등장한다. 오른쪽의 키 큰 사람은 하늘로 치켜든 얼굴, 쭉 뻗은 두 팔이 승리의 여신인 양 당당하다. 머리 위에는 화관을 쓰고, 뒤통수에는 족두리를 했으며, 볼에는 연지곤지를 찍었다. 가슴 한쪽을 다 드러낸 의상이 몹시도 전위적이다. 몸은 앞을 향했으나 얼굴은 옆모습인 반면, 눈은 정면을 향한다. 팔다리는 골절 수준으로 이리저리 꺾여 있는데, 이는 1950년대 전 세계를 풍미한 큐비즘의 영향이다.

여성 무용수 왼쪽에는 신명 나게 장구 치는 사내가 자리를 잡았다. 인체를 유려한 곡선으로 표현하는 대신 딱딱하게 각진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신 神과 같은 위엄을 갖게 됐다. 잘린 듯한 팔꿈치, 갈퀴 같은 손가락, 꺾어 들어 올린 한쪽 다리 등 경직된 분위기에 동세를 넣어 경쾌한 위엄이 완성됐다. 처음 제목은 <희열 喜悅>이었는데, 1973년 국립극장이 이곳 남산으로 이전할 때 이름을 <연극의 신>으로 변경했다.

작가 이세득은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함흥에서 ‘홍아여관’을 운영하던 부친이 그림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 영향이 이세득을 화가로 키웠다.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도쿄제국미술학교(데이코쿠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지금은 ‘무사시노미술대학’이라 불리는 이곳은 이쾌대와 장욱진, 조각가 권진규 등 근대미술의 주요 작가를 배출한 명문 학교다. 6.25 전쟁이 한창일 때는 국방부 소속의 종군 화가로 활동했다.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특선과 장관상을 받으며 이름을 떨쳤다. 감각 있는 엘리트 화가로 성장했다.

젊은 이세득은 1954년 지금의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전신인 반도호텔의 벽화를 제작했다. 달항아리부터 향로와 촛대, 소반과 주자, 항아리 등 한국의 기물을 자유롭게 배치한 반도호텔 다방을 위한 벽화는 한국적이면서도 세련미를 풍겨 외국인 방문객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지금은 만날 수 없다.

작가는 1958년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며 국제적인 미술 경향인 모더니즘을 받아들였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대략 100년을 풍미한 모더니즘 미술이란, 전통적인 형식과 기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표현 방식의 탐구를 말한다. 유학에서 돌아온 이세득은 이를 실천했고, 한국 현대미술의 전환점을 마련한 작가로 평가된다. 이 시기 그는 한국 고유의 정체성을 국제적 조형미로 표현하려는 데 집중했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문양, 단청의 색, 수막새와 기와 형태 등 전통적 요소를 추상화에 도입했다. 기법에서는 입체주의적 시각에서 대상을 선과 면의 형태로 단순하고 납작하게 묘사하는 경향을 보였다. <연극의 신>도 그중 하나다.

국립극장은 1950년 4월 처음 문을 열었으나 6.25 전쟁으로 부산· 대구로 옮겨 다녔다. 1957년 6월 귀경해 지금의 명동예술극장 자리에 터를 잡았다. 이곳에서 극장 전용 건물로 새롭게 단장하고 재개관한 것은 1962년 3월. 당대 최고 한국화가인 청전 이상범, 의재 허백련을 필두로 김환기· 이세득· 김영주· 정창섭 등 그 시절 서울대학교· 홍익대학교 교수이며 국제 비엔날레에 참가할 정도로 ‘잘 나가던’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이 줄지어 걸렸다. 물론 그중 대표작은 단연 이세득의 벽화였다.

이세득, <레인보우>, 1973(2022 재설치), 사진 조상인

이세득, <레인보우>, 세부, 1973, 사진 조상인

지금의 남산 국립극장 시대는 1973년 10월 17일 막을 올렸다. 이세득은 또 한 번 활약했다. 현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로비 층 한가운데 무지개색 유리벽돌 부조가 바로 이세득의 작품이다. 해오름극장 앞 문화광장에서 걸어 들어온 방문객들이 처음 만나는 극장의 얼굴이기도 하다. 맨 위 진붉은 색이 아래로 갈수록 점점 맑아지다 노란빛을 내뿜고, 이내 에메랄드· 사파이어· 자수정을 떠올리게 하는 초록· 파랑· 보라색이 펼쳐진다. 무지개색 벽돌 두 개 층이 포개진 이 작품은 제목 또한 ‘레인보우’. 현대미술에 관심 좀 있는 사람이라면 프랑스 작가 장 미셸 오토니엘이나 벨기에 예술가 안 베로니카 얀선스의 작품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세득이 앞섰다. 유리를 건축물 벽면 장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당시로서 획기적 시도였다. 작가가 1962년 공군사관학교 교회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한 적 있는데, 이 경험이 유리벽돌 작업으로 이어진 듯하다. 국내에서는 재료를 구할 수 없어 일본의 공방에서 특별하게 유리벽돌을 제작했다. 국립극장 건물 자체가 화강암 질감으로 육중한 느낌이 강한데, 입구 정면에서 마주하는 이 작품 덕에 산뜻함이 더해진다. 유리가 뿜어내는 빛은 환상적이고, 색은 조화롭다. 극장이 보여주는 연극· 무용 같은 예술의 역할도 환상을 그려내며 조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 아니겠는가. 벽돌 표면이 아롱대는 효과는 전통 나전 螺鈿을 떠올리게 하는데, 현대적 표현에 한국적 미감을 반드시 넣고자 한 작가의 의지가 읽힌다.

국립극장 이전 개관에 맞춰 제작된 <레인보우>는 원래 6,446개의 유리벽돌을 59줄로 쌓아 올린 것이었는데, 지난 2017년 해오름극장 리모델링으로 벽면에서 해체됐다. 이후 문화유산 복원 전문가의 자문과 유족의 동의를 거쳐 복원됐다. 원래 틀을 유지하면서 극장 공간에 맞추다보니 3,373개의 유리벽돌을 52줄로 재배치했고, 2022년 6월부터 지금의 모습으로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이세득, <환희>, 1973, 사진 조상인

해오름극장 1층 로비에 걸린 폭 630cm, 높이 292cm의 작품 2점 1세트의 <환희>는 화려한 색 속에 장구춤· 부채춤· 농악무· 무당춤 등 전통무용을 담고 있다. 마주 보는 자리에 걸린 <십장생도>는 고분벽화 같은 독특한 질감 속에 산· 돌· 구름· 소나무· 거북· 학· 사슴 등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들을 품고 있다. 우리 문화와 국립극장의 활약이 오래가고 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겼다.

글 조상인 백상미술정책연구소장, 『살아남은 그림들』 저자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