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소 화백의 바람이
물을 스칠 때
“현대미술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구조여야 한다.” 이강소 화백은 국내 화단에서 다 장르를 섭렵한 한국 현대미술 거장이다. 단색화나 조각, 한 가지에만 몰입한 작가가 아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실험미술 작업을 하던 197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설치·퍼포먼스·사진·비디오·판화·회화·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쳐왔다. 일명 ‘오리작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이렇게 규정되는 것을 거부했다. “오리로도 보이겠지만 나는 무책임하게 붓질의 획, 흐름을 힘 있게 표현한 그림”이라며 “작품을 보는 분이 나름대로 (오리)환상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또 10여 년 전 단색화 열풍으로 화단에서 자신을 단색화가 카테고리에 묶었을 때도 “난 단색화가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나 개인의 주장보다는 자유롭게 조화를 찾으려 할 뿐”이라면서 ‘단색화의 쏠림 현상’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1975년 프랑스 파리 청년 비엔날레, 197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하며 ‘글로벌한 감각’을 새긴 그는 틀을 거부하며 계속 전진했다. 현재 여든을 넘긴 나이지만 오스트리아 기반의 세계적 갤러리인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과 지난 9월 전속 계약을 맺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직관이나 감성을 중시하는 작품 경향을 보이는 그의 50여 년 작업 세계를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됐다. 작가들의 꿈의 전시장,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강소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대규모 전시가 열린다. 설치·조각·회화·비디오·이벤트 등 장르를 넘나든 100여 점을 선보인다. 객관적 세계와 재현된 이미지에 대한 다층적 해석을 실험하는 개념미술로 늙지 않고 낡지 않은 이강소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거친 붓선으로 그린 사슴(<무제-911193>)이 압도한다. 세로 2미터, 가로 3미터 대형 캔버스에 그려진 사슴은 ‘렌티큘러’ 같은 움직임이 느껴진다. 여러 각도에서 본 사슴의 모습이 중첩되어 마치 입체주의적 회화나 피카소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사슴은 전통적으로 신비로운 기운을 가진 동물로 묘사되지만, 사슴의 고유한 의미나 형태를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회화성에 관한 자신의 탐구를 이러한 도상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단일한 주체는 없으며 존재는 불안정하고 모든 것이 변한다”는 이 화백의 철학을 회화적 실험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실험성과 거친 붓의 운용을 통해 회화적 기교를 보여준다. 동양 철학과 양자역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그의, 모든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철학적인 그림이다.
사슴은 이미 50년 전 시작됐다. 1975년 파리 청년 비엔날레에 ‘닭 퍼포먼스’와 함께 출품된 ‘무제’ 설치 작업은 그의 독특한 사슴 작업의 시발점이다. 대구 서문시장에서 사슴 뼈를 판매하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제작한 작품이다. 당시 서문시장에서는 사슴 뼈를 약재로 사용하거나 닭을 직접 잡아 파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고, 이러한 장면은 작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이 뼈를 구입하여 나무 합판 위에 분필로 그린 세 마리의 사슴 드로잉 위에 흰색·은색·검은색으로 칠한 뼈를 배치하며 사슴의 형상을 재구성했다.
이 작업은 생명체의 실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흔적과 잔형을 통해 존재를 암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물리적 형태로 존재하지 않고 남겨진 뼈와 드로잉을 통한 은유적 표현은, 인간과 존재의 유동성에 대한 작가의 깊은 탐구를 반영한다.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이 작품들에서부터 시작되어, 이후 그의 대표작 오리와 사슴 회화로 이어졌다.
이번 전시 제목은 ‘풍래수면시風來水面時’다. ‘바람이 물을 스칠 때’라는 뜻으로, 새로운 세계와 마주침으로써 깨달음을 얻은 의식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송나라 성리학자 소옹의 시 ‘청야음淸夜吟’에서 따왔다. 회화와 조각·설치·판화·영상·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지 방식을 질문하고 지각에 관한 개념적인 실험을 지속해온 작가의 예술세계를 함축한다.
또한 끊임없이 변하는 대상의 속성과 이미지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상황을 인식하여 창작자의 의도를 최대한 배제한 그리기 실험을 지속해왔다. 1980년대 초 추상에서 시작하여 1980년대 후반 집·배·오리·사슴 등 구상을 거쳐, 1990년대 이후 추상과 구상을 오가며 상상적 실재를 이야기했고, 이는 2000년대 이후 글자와 추상의 경계를 교묘하게 이용한 작업 시리즈로 지속됐다. 작업 초기부터 현실을 인식하는 이미지에 대해 의심한 그는, 동일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동일한 이미지와 오브제조차도 관람자의 경험, 공간, 시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려지는 회화’, ‘만들어지는 조각’을 지향하는 이강소 화백은 “완전히 표현을 안 할 순 없겠지만, 최대한 표현을 아낀다”고 했다.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이 혼재될수록 관객은 자연스럽게 자기 경험을 떠올리고 상상하며 작품을 보게 된다는 것. “사람은 각자 자신이 인식한 세상 속에서 가상의 시공간을 창조한다”는 뜻으로 회화와 설치 작품의 자율성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시각적 재현을 넘어, 생명체가 만들어내는 에너지와 흐름을 회화 속에서 형상화하는 한국적 현대미술에 천착하고 있는 그는 “남은 시간을 국제적으로 교류하며 열심히 작업하겠다”고 했다. 붓, 자연, 정신, 그리고 몸이 하나로 융합되어 나온 ‘이강소 작품’이 말한다.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으로 변하며 순환한다’는 것을.
글 박현주 뉴시스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