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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11월호

익은 사람은 읽은 사람
—익다

가을이 되면 으레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속담을 처음 접했을 때다. 선생님이 “왜 그럴까요?”라고 아이들을 향해 물었던 순간,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벼 이삭이 익으면 무거워지니까요?” 몇몇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한 이야기를 왜 그리도 뻔뻔하게 하느냐는 날카로운 눈초리가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선생님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것도 맞지요. 여문 낟알은 무겁겠지요. 사과나 배도 익으면서 크고 단단해지잖아요.” 선생님은 아마 속담이 품고 있는 속뜻을 물었을 것이다. “익는 일은 겸손해지는 일이에요. 수양을 쌓은 사람일수록 스스로 낮출 줄 아는 거지요.” 번쩍 든 손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가을은 어쩔 수 없이 익는 계절이다. 황금빛에 가까운 노란 들판을 바라볼 때면 가을이 성큼 왔음을 직감한다. 농익은 감이 나무에서 별안간 뚝뚝 떨어지기도 하고, 그 바람에 설익은 상태로 새 계절에 접어든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올해 추석 상차림에 오른 사과는 붉은 기운이 거의 없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익을 때를 놓친 것처럼 보였다. 작황이 부진해서 어두운 낯빛의 농민들을 보니, 제때 익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또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된다. 제대로 잘 익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무르익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분위기가 무르익는 동안, 사람 또한 무르익는다. 무르익은 사람은 철든 사람일 것이다. 남 앞에서 스스로 낮출 줄 알면서도, 필요할 때면 숨겨둔 기량을 발휘해서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람.

‘익다’는 동사와 형용사로 쓰인다. 동사일 때는 “열매나 씨가 여물다”, “고기나 채소, 곡식 따위의 날것이 뜨거운 열을 받아 그 성질과 맛이 달라지다”, “김치, 술, 장 따위가 맛이 들다”, “불이나 볕을 오래 쬐거나 뜨거운 물에 담가서 살갗이 빨갛게 되다”, “썩히려고 하는 것이 잘 썩다”, “사물이나 시기 따위가 충분히 마련되거나 알맞게 되다”라는 뜻을 갖는다. 이때는 익기 전후의 변화가 중요할 것이다. 날것이 야물어지거나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상태로 변하는 일이 ‘익다’의 중심에 있지만, 땡볕에 살이 익기도 하고 계절이 마침맞게 익기도 한다. 거름이 익는 일은 농작물을 익게 하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잘 익어야 충분히 익힐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여물고 영그는 과정의 핵심에 바로 ‘익다’가 있다.

형용사로 쓰일 때의 ‘익다’는 경험치와 연결된다. “자주 경험하여 조금도 서투르지 않다”, “여러 번 겪어 설지 않다”, “눈이 어둡거나 밝은 곳에 적응한 상태에 있다”라는 뜻이 일러주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이나 행동의 반복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 상태가 바로 형용사 ‘익다’다. 손에 익은 일이 손쉬워지는 것은 당연하고, 어려운 동작도 반복해서 연습하다 보면 몸이 절로 기억하게 되는 이치와도 같다. 문화와 풍토 등 삶의 바탕이 되는 것도 익을 수 있다. 낯선 곳에 가면 자기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만, 며칠 지내다 보면 낯섦의 자리에 낯익음이 자리한다. 일상에 침투한 익은 상태는 안온한 마음을 품게 해준다. 익은 다음에야 비로소 특정 장소에 깃들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눈이 익어야 빛과 어둠 속에서 상태를 파악하고, 멜로디가 귀에 익어야 입을 열고 따라 부를 수 있다. 이때의 ‘익다’는 개인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상태다.

“푹 무르게 익지 않고 설익다”라는 뜻으로 ‘데익다’라는 단어가 쓰인다. 데익은 게 나은지 더 익은 게 나은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당장 먹기에는 더 익은 게 나을지 몰라도 최상의 맛은 데익은 것을 숙성시키는 데서 찾아올 것이다. 밥을 지은 후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한 것도, 중요한 말을 하기 전 잠시 머뭇거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익는 일은 기다리는 일이기도 하다. “일에 경험이 많아서 어떤 일에도 익숙하다”라는 뜻을 가리키는 ‘신익다’라는 단어도 있다. 이때의 신은 신을 가리키는데, <생활의 달인>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이들을 떠올리면 절로 수긍이 된다. 손발이 보이지 않는 놀라운 경지를 마주할 때, 익음은 신묘함을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벼 이삭이 익을 대로 익어 꽃대 부분이 땅에 닿는 장면을 떠올린다. 내가 자란 땅에 다시 도착하기,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풍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발 디디고 서 있는 곳은 흔히 터전이라고 불리지만, 그 존재성을 느끼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당연한 것을 들여다보게 하고 거기서 어떤 섭리를 발견하게 하기, 가을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익지 않아서, 익지 못해서 우리는 자꾸 뒤돌아본다. 뭐 놓친 것은 없는지, 급하게 오느라 빠뜨린 것은 없는지 살피는 동안 ‘익는 일’은 ‘익히는 일’이 된다. 계획대로 잘 살고 있는지 자문하고 내게 알맞은 상태가 어떤 것일지 생각을 궁굴리는 것이다. 가을 타는 이들이 유독 많은 것은 낙엽을 밟고 지나갈 때 바스락바스락 내면이 웅성대기 때문이다.

‘익다’와 몸이 만나면 능숙한 상태가 된다. 귀에 익은 소리는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그 소리를 녹음해두었다가 긴장될 때 틀어놓으면 심신이 차분해진다. 눈에 익은 사람 앞에서는 자연히 경계심을 풀게 된다. 산책이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것도 보통 익숙한 길에서 그것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 벤치, 저 나무, 그 돌 등 눈에 익은 것들을 보면 여전한 데서 깃드는 평온함을 발견할 수 있다. 발이 익은 길은 내 생활을 지탱해주는 동력이기도 하다. 이 길 위에 언제까지 내 흔적이 남아 있을지는 모르지만, 발씨가 익어가는 동안만큼은 익숙함과 새로움이 번갈아 내게 찾아올 것이다. 손에 익은 일은 큰 노력을 들이지 않더라도 능숙하게 수행할 수 있지만, 방심하는 순간 일을 그르칠지도 모른다. “익은 밥이 날로 돌아갈 수 없다”라는 속담이 이를 뒷받침한다.

문득 내가 ‘익다’를 좋아하는 이유는 ‘읽다’와 발음이 똑같아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읽는 일은 익는 일이다. 익은 사람은 읽은 사람이다.

글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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