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브랜드의 공예 예찬
9월 초, 일 년 중 가장 뜨거운 미술의 열기로 가득한 서울아트위크가 펼쳐졌다. 3년 차를 맞이한 세계적인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과 한국 대표 아트페어 키아프가 함께 진행된 코엑스를 주축으로 서울 곳곳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전시가 공개됐고, 예술계 인사들과 아트 피플을 위한 파티도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아트 신의 찬란한 축제에 분위기를 더한 또 하나의 주체로 럭셔리 브랜드를 빼놓을 수 없다. 프리즈의 서울 진출 이후 아티스트와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나 아트페어 기간에 맞춰 특별 전시를 준비하는 브랜드가 하나둘 늘더니 올해는 상당히 많은 브랜드가 이 대열에 동참했다.
아트위크 시기에 열리는 브랜드의 전시가 흥미로운 이유는, 예술적인 측면에서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철학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트를 향한 열정과 자본의 합은 평소 쉽게 보기 어려운 색다른 전시와 프로젝트로 발현된다. 현대미술을 후원하거나 재단 컬렉션 전시에 집중하는 브랜드가 있는 한편, 공예에 초점을 맞추는 곳도 제법 많다. 특히 오랜 시간 수공예와 장인 정신을 기반으로 정체성을 쌓아온 브랜드일수록 공예의 가치를 조명하는 이벤트를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로에베LOEWE다. 15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스페인 태생의 브랜드 로에베의 공예 사랑은 패션계에서 이미 공식처럼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전 세계의 주목할 만한 공예가를 선정·후원하는 로에베 재단 공예상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공예 관련 전시와 이벤트를 전개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서울 청담동에 패션·예술·공예·디자인 가구가 어우러진 ‘수집가의 집Collector’s home’을 테마로 연출한 국내 첫 단독 스토어 까사 로에베 서울을 오픈했는데, 내부의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공예적인 요소가 가득해 화제를 모았다. 공간에는 “고유의 공식을 가지고 고유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오브제를 만드는 것,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은 대화를 만드는 것이 바로 공예입니다”라고 언급하는 등 로에베의 예술적 행보에 앞장서고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너선 앤더슨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스페인 핸드메이드 세라믹 타일로 장식한 벽, 맞춤형 펠트를 입힌 베린 클럽Berin Club 의자와 게리트 리트벨트가 디자인한 각진 위트레흐트Utrecht 및 스텔트먼Steltman 의자, 로에베의 시그니처 퍼퍼 벤치 시리즈, 영국의 섬유 예술가 존 앨런의 추상적인 풍경화 태피스트리를 재현한 스페인산 핸드메이드 울 카펫, 로에베 재단 공예상을 받은 일본 도예가 이나자키 에리코Eriko Inazaki와 한국 말총공예 작가 정다예의 공예 작품 등으로 내부를 가득 채웠다.
올해 아트위크 기간, 로에베는 이곳 까사 로에베 서울에서 2023 로에베 재단 공예상 최종 후보자로 선정된 이재익 작가의 특별전 《삶의 형태Shape of Life》를 개최했다. 금속을 주재료로 만든 주얼리·가구·조명 설치물 등을 통해 개념적 사물이 일상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탐구해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기존 작품은 물론, 새로운 시리즈 ‘트랜지션Transition’을 전시했다. 한국 전통 도자기인 달항아리에서 영감받은 작품으로, 포슬린 안료로 마감한 동 판재를 용접한 유기적 곡선 형태가 특징이다. 로에베와의 특별 협업으로 제작한 10점의 가죽 브로치 컬렉션 ‘라이프폼Lifeform’도 함께 공개해 주목받았는데, 브랜드가 주로 사용하는 가죽을 활용해 세포와 장기를 모티브 삼아 추상화된 생명체를 표현했다. 마치 과일이나 오브제를 연상시키는 유기적인 형태와 감각적 색채가 시선을 끌었다.
프리즈 서울이 열린 코엑스 내에 부스를 마련한 브랜드 중에는 프랑스 하이주얼리 브랜드 쇼메CHAUMET의 협업이 단연 돋보였다. 올해 로에베 재단 공예상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아티스트 김희찬과 함께 브랜드의 대표 컬렉션인 ‘비 마이 러브’의 고유한 패턴과 조화를 이루는 유기적 형태의 작품을 선보인 것. 벌집과 조개껍질 등 자연에서 관찰되는 복합적 형태에서 영감을 얻은 설치 작품으로, 재료의 고유한 특성에 대한 이해를 기반 삼아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미세한 부분부터 세심하게 조율하며 전체적 형태를 만들어가는 작가의 작업 방식이 고스란히 담겼다. 재료로 사용한 호두나무의 은은한 광택, 장인 정신과 자연적인 형태미를 부각한 우아한 외형이 아트페어를 오가는 수많은 이들의 발길을 붙들었다.
한편 재단법인 예올과 함께 공예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3년째 전개하고 있는 럭셔리 패션 하우스 샤넬은 아트위크에 조금 앞선 8월 말, 2024년 ‘올해의 장인’과 ‘올해의 젊은 공예인’을 공개했다. 주인공은 대장장 정형구와 유리공예가 박지민. 정형구 대장장은 결혼 후 대장간에서 일하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돕다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대장장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장인어른이 세상을 떠난 후 실력을 연마하기 위해 전국의 유명 대장간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배웠고, 이후 건축 공구를 주로 제작해왔다. 2008년 숭례문 화재 이후 복원 과정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문화재 철물에 관심을 두게 되어 현재는 국가유산수리기능자로서 다양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편, 올해의 젊은 공예인으로 선정된 박지민은 유리라는 투명 매개체 안에 불에 닿아 그을린 흔적을 남겨 추억을 기록한다. 일상 속 작은 나뭇잎이나 종이 조각부터 시대성을 상징하는 물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를 간직한 오브제를 수집한 뒤, 그 사물을 유리에 넣고 소성해 재와 그을음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흔적으로 남기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주로 판유리에 작업해온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화병·그릇 등 실용적 형태의 작품에 새롭게 도전했다. 두 사람의 프로젝트 결과물은 예올 북촌가에서 10월 19일까지 이어지는 전시 《온도와 소리가 깃든 손: 사계절四季節로의 인도》에서 만나볼 수 있다. 현대적 미감을 입고 재탄생한 철재 제품과 유리그릇이 한옥의 고즈넉한 정취와 어우러지며 인상적인 장면을 선사한다. 럭셔리 패션 브랜드와 공예의 만남. 이들이 주목하고 조명하는 장인 정신과 수공예의 가치가 풍요로운 일상과 새로운 전통으로 거듭나고 있다.
글 김수진 노블레스 라이프스타일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