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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10월호

우리는 끊임없이
미세하게 미끄러지기에

출처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모든 공연은 불운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여행”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언제든 예기치 않은 실수나 사고가 일어나 모든 것을 일순간에 망쳐버릴 수 있는 곳. 극장은 그런 곳이라고, 따라서 극장에 가는 것은 기적을 믿는 것이라고, 그 글의 필자는 말했다. 진정 그러하다. 공연을 보는 일은 기적을 함께 만드는 희열을 동반하곤 한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또한 그처럼 생생하며 그 이상으로 흥미롭다. 무사히 도달한 승리만큼이나 불운을 목도하는 것 또한 관극의 큰 매혹인 것. 오랜 시간 공들인 창작자에게는 잔인한 말이겠지만, 어떤 작품은 온전히 공연되지 못함으로써 더 많은 이야기를 남기기도 한다. 실패는 존재의 취약성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국립극단 74년 역사상 최초로 로봇 배우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화제를 모았던 <천 개의 파랑>(2024년 4월,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은 로봇의 기계적 결함으로 인해 공연 개막 하루 전, 전반 10회차 공연을 취소했다. 창작진뿐 아니라 나를 포함한 초반 회차 공연 예매자 모두에게는 무척 애석한 일이었겠으나, “[과학] 기술에 감동하기보다 로봇 배우를 통해 존재 자체를 사유할 수 있지 않을까”라던 장한새 연출가의 연출 의도는 역설적으로 완벽하게 전달된 셈이었다. 환불 안내를 담은 사과 문자에 존재의 취약함을 떠올리며 그 존재의 쾌유를 기원했던 우리의 마음속에서 로봇과 인간의 경계는 이미 슬며시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실 일찍이 로봇연극이 발의한 화두가 바로 존재의 취약함이었다. 2008년부터 10년이 넘는 기간 로봇 전문가와 함께 ‘로봇연극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일본의 극작가 겸 연출가 히라타 오리자Oriza Hirata는 로봇 배우를 개발하며 발견한 것을 ‘마이크로 슬립Micro―Slip’이라는 개념을 경유하여 설명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손잡이가 있는 머그잔을 손으로 잡으려고 할 때 곧바로 손잡이를 꽉 잡거나 정확하게 잡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이는 ‘마이크로 슬립’ 즉 불필요한 움직임이 끼어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마이크로 슬립’이 있어야 자연스럽고 리얼하다고 느끼며, 이런 까닭으로 “어떻게 하면 로봇에게 마이크로 슬립을 집어넣을 수 있는가”가 ‘로봇연극의 최대 과제’라고 히라타는 말한다.(히라타 오리자·이홍이, 「로봇연극의 개념과 의의」, 『한국예술연구』 16, 2017)

끝끝내 우리의 행보는 정갈하지 못할 것이며, 바로 그런 점이 존재를 ‘인간적’이라고 믿게 하는 특질이라니! 왕도 왕좌도 없는 이 시대에도 고전의 인물들에게 마음을 내어주게 되는 것 또한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마이크로 슬립 속에서 비틀거리다 파멸하고 마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Macbeth>1607~1608 속 인물처럼, 유약한 인물들에게 마음이 간다.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마녀의 예언에 완전한 악이 되지도 유혹을 뿌리치지도 못해 불안과 불면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인물, 맥베스는 분명 흥미롭지만, 나는―초연 당시 셰익스피어가 직접 연기를 하기도 했다는―맥베스 부인Lady Macbeth 쪽이 항상 더 궁금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어떠한 허기와 갈증을 느끼고 살았기에 마녀의 예언을 전하는 남편의 편지 한 장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왕위 찬탈에 동조하고, 주저하는 남편을 다그치는가? 무엇을 위해 그녀는 기꺼이 함께 잔인해지기를 선택하는 것일까? 그녀가 진정으로 갈구한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오래도록 맥베스 부인은 ‘선량한 남편을 부추기는 악녀’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정확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듯하다. 덩컨 왕 시해를 모의하고 실행하는 초반부, 그녀가 무섭도록 경쾌하게 잔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맥베스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는 급격하게 활기를 잃고, 내내 등장하지 않다가, 갑자기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흔히 말하듯 죄책감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고 광기에 사로잡혔다고 판단하기에도 단서가 턱없이 부족하다. 오히려 분명한 것은 덩컨 왕의 죽음 이후 그녀가 맥베스의 ‘왕위 찬탈 프로젝트’에서 철저하게 배제된다는 점이다. 맥베스는 그녀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귀여운 햇병아리는 모르고 있으라”(3막 2장)고 말한다. 그리고 이 대화 이후 정말로 맥베스 부인은 파트너의 자리를 잃는다. 따라서 그녀의 궁극적 절망은―‘왕위’의 모습을 했든 ‘살인’의 모습을 했든―남편과 함께 키워가고자 했던 ‘아이’를 또다시 상실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가능하다. 현재 이들에게는 아이가 없으나 맥베스 부인은 “나는 젖 빨린 적 있어서 내 젖 먹는 아이의 애틋함을 알아요”(1막 7장)라고 말한 바 있으니, 이들 관계의 역사 안에서 ‘아이의 죽음’이라는 치명적인 상실의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는 것이다.

기실 ‘아이의 죽음’이라는 모티브는 구로사와 아키라Akira Kurosawa 감독이 <맥베스>를 일본의 전국 시대로 옮겨 재창작한 <거미집의 성>1957에서는 임신과 유산으로 구체화하고, 아예 아이의 장례식으로 시작하는 저스틴 커젤Justin Kurzel 감독의 <맥베스>2015에서는 맥베스 부부의 궁극적 결핍에 대한 명확한 근거로 구현된다. 나 또한 길게 드리운 ‘죽은 아이’의 그림자를 <맥베스>에서 보았으나, 위 두 영화의 선택은―맥베스 부인을 야망이 들끓는 악녀로 그리는 것보다는 흥미롭지만―다소 싱겁게 느껴진다. 맥베스 부인의 기이하게 달뜬 충동이 그렇게 정확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의 결핍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그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면 과연 그렇게 휘청댔을까? 오히려 명쾌한 설명은 끊임없이 미세하게 미끄러지는, 즉 마이크로 슬립을 이어가는 인간을 마주할 기회를 차단하지는 않을까? 약하디약하여 때로는 악해지고 마는 ‘우리’ 말이다.

앞서 언급한 ‘로봇연극 프로젝트’의 기수旗手, 히라타 오리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에는 우주의 저 끝 풍경에서부터 인체 내부까지 대략 형태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신의 진폭으로, 사람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고 있다.”(『연극 입문』, 2005, 동문선)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의 모호한 욕망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과학기술이 쉼 없이 발전하여 세계의 비밀을 속속들이 밝혀낸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이 궁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이해가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참으로 한결같이 무지하다는 것에 더욱 낙담하게 되지는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인간의 인간에 대한 끝없는 무지가 우리가 고전 희곡을 반복해서 읽는 까닭 중 하나라고 믿는다. 사건을 살아내고 있는 인간의 순간순간을 포착하여 구구히 설명해주는 대신 직접 대면케 하는 고전 작품들을 다시, 또다시 찾게 되는 이유 말이다. 적어도 동시대적으로 전면 재창작되지도 않은, 소위 ‘정통연극’을 찾는 까닭으로는 딱히 떠올릴 다른 이유가 없다.

*희곡 ‘맥베스’는 여러 버전의 번역본이 출판되어 있으나, 이 글은 셰익스피어의 운문을 살려내고자 애쓴 최종철의 번역(민음사, 2004)을 참조했다.

글 전영지 공연 칼럼니스트·드라마터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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