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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10월호

환상, 현실, 뒤섞임

작곡과 동기생 S와 나는 친하지 않았다. 입학 초기 학생 식당에서 동기 여럿과 나란히 앉아 밥을 몇 번 먹은 정도의 얕은 관계였다. 여고생 티를 벗지 못한 나와 달리 그는 말투와 태도가 성숙했다. 와글와글 몰려다니는 무리에도 끼지 않았다. 그렇게 별다른 교류 없이 졸업을 맞았으니, 추억은 거의 없는 셈이지만, 그가 발표했던 한 곡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학기에 한 번씩 작품을 발표해야 했다. 악기 편성도, 악곡 형식도 자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완벽한 자유라는 조건은 영감의 밑천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슈베르트 교향곡을 흉내 내고, 버르토크의 현악 사중주를 비슷하게 옮겨 적으며 꾸역꾸역 낙제를 모면하는 나 같은 이들이 있던 반면, 생전 처음 듣는 소리를 유의미하게 그려내는 친구들도 있었다.

어느 해의 발표회 날 그 친구는 피아노 오중주 정도의 편성으로, 클래식 작곡과 연습실에서 들릴 법한 도입부로 무난하게, 아름다운 협화음으로 곡을 시작했다. 그러다 아주 급작스럽게 대중음악에서 흔히 쓰이는 코드 진행을 마구 연주했다. 대충대충 엉터리 연주였다. 그러다 다시 오중주 악곡을 성심성의껏 연결하고, 또다시 갑작스럽게 통속적인 팝 발라드의 진행을 흉내 냈다.

이후 그와 곡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채 고전적인 음악만을 다루는 학교를 향한 저항이었을까? 고전음악의 미학을 논하면서 통속적인 음악을 써 돈을 잘 버는 선배들을 치켜세우는 학교 분위기를 향한 비판이었을까? 그저 일상의 묘사였을지도 모른다. 쇤베르크의 아방가르드 음악을 열심히 학습하던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며 김동률과 소녀시대를 들었다. 아무튼 그날의 연주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쇤베르크와 김동률과 소녀시대의 표상들이 하나의 작품 안에서 거칠게 널려 있던, 동기생 S의 15년 전 발표회가 떠올랐다. 진은숙의 ‘구갈론Gougalōn-거리극의 장면들’2009/2011, 하인츠 칼 그루버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1971/1978을 각각 객석에 앉아 들으며. 이 두 작품은 각자 거대한 가상의 세계를 창조해 쇤베르크도 김동률도 소녀시대도, 그것들을 탐닉하고 또 비판하는 현대인의 모습까지 하나의 상징처럼 무대 위에 세웠다. 가치 판단이나 정치 선언을 직선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작곡가가 새로이 그린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로 듣는 이들을 불러냈다.

존 케이지가 권위 있게 아름답던 피아노를 무대 위에서 치워버리고,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다 놓은 지도 거의 한 세기가 지났다. 그리고 그 역사적 장면들을 현대의 우리는 인터넷 속 복제된 이미지로 본다. 위대한 클래식 전통도,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그리는 혁신도 몽땅 납작해져버린 오늘날을 냉소하는 대신, 납작한 그 순간들을 다시 입체적인 가상 세계로 불러 세우는 게 현대의 창조적인 음악가들이 하는 일이다.

오스트리아 음악가 하인츠 칼 그루버의 ‘프랑켄슈타인!!’은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TIMF 앙상블의 기획 공연 <사라지는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에서 들을 수 있었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아닌 시인 한스 카를 아르트만이 쓴 시집 『모든 종류의 소음, 새롭고 아름다운 동요Allerleirausch, neue schöne kinderreime (Noises, noises, all around - lovely new children’s rhymes)』의 일부를 텍스트로 삼은 오페라 작품이다. 프랑켄슈타인·드라큘라·슈퍼맨·배트맨 그리고 서부 영화에 자주 등장하던 배우 존 웨인 같은 인물들이 가사로 언급된다. 악당과 영웅에 대한 장난스러운 묘사와 이를 상징하는 음악적 표현들은 언뜻 듣기에 명랑하고 활기차지만, 그 깊숙한 곳에 냉소와 비관의 어조가 켜켜이 쌓여 블랙코미디로 다가온다. 길고 긴 음악사의 결정적 장면들을 음악적으로 흥미롭게 불러들여 장르적으로 다채로운 것도 특징. 독창적 재미를 선사한다.

지난 7월 <최수열의 밤 9시 즈음에>에서 소개한, 진은숙이 쓴 ‘구갈론-거리극의 장면들’의 제목은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다’, ‘그럴듯한 수법으로 속이다’라는 뜻의 옛말에서 유래했다. 2008~2009년에 중국의 몇몇 도시를 방문한 작곡가는 좁고 어수선한 길거리의 풍경으로부터 1960년대 서울, 6.25 전쟁 이후 급격한 근대화가 시작되던 서울을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구갈론-거리극의 장면들’의 배경은 과거의 중국 어느 도시도, 현재의 서울도 아닌 가상의 세계다. ‘커튼의 극적인 걷힘’, ‘대머리 여가수의 비가’, ‘틀니 낀 점쟁이의 비죽거림’, ‘병과 깡통 사이의 에피소드’, ‘악순환-판잣집 앞에서 추는 춤’, ‘돌팔이 의사의 땋은 머리를 추격하기’라는 제목으로 여섯 개의 모음곡을 연주한다.

낯선 소음이 파도처럼 쏟아지며 근현대의 생생한 소리 풍경을 창조적으로 묘사한다. 이 곡을 연주하는 18명 연주자에게 진은숙은 “연주를 잘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아마추어처럼 연주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요란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동시대의 초상 아닌가.

나의 동기생 S는 자신을 둘러싼 현실과 내면의 판타지를 잘 배합할 자신만의 작곡법을 찾았을까. 음원 플랫폼에 그의 이름을 검색해 찾은 몇몇 개인 음반을 들어보니 아직 발견해나가는 중인 듯하다. 과감했던 그 표현력을 고유의 철학으로, 품위 있게 펼쳐 보이길. 동시대의 뛰어난 해석자를 기다려본다.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이 연주하는 진은숙 ‘구갈론-거리극의 장면들’

하인츠 칼 그루버가 노래하고 지휘하는 ‘프랑켄슈타인!!’ (베를린 필 연주 하이라이트)

글 김호경 『플레이리스트: 음악 듣는 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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