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맥거핀인 색,
블루
여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색은 ‘블루’다. 아마 청량감 때문이겠지. 보는 것만으로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시원하다. 그러나 블루가 항상 긍정적이진 않다. 이 단어는 때때로 활기가 부족한 상태를 표현하기도 한다. 예로, 피카소가 고독했던 시절에 그린 그림을 보면 온통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블루는 그야말로 동전의 양면과 같기에 블루와 관련한 콘텐츠는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 필수다. 블루가 무더위에서 탈출하게 해줄지, 아니면 더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할지는 각자 해석에 따라 달라질 테다. 최근 이러한 반전 매력을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돼 눈길을 끈다. 블루가 ‘맥거핀Macguffin’(영화에서 중요한 것처럼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극적 장치)처럼 작동하는 전시를 소개한다.
현재 문화역서울284에선 감각을 자극하는 소리로 가득한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 그룹 디스트릭트의 창립 20주년 전시 《reSOUND: 울림, 그 너머》(8월 25일까지)가 진행 중이다.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그리고 들리는 몰입형 미디어 설치 작품 <Ocean>의 푸른 파도가 금세 콧잔등에 맺힌 땀을 식혀줘 일단 한숨을 돌린다. 그런데 3등 대합실은 흡사 납량 특집극 분위기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은 독일 예술 콜렉티브 모놈MONOM의 4D 사운드 작품 <Imagined Worlds>로,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소리로 구현했다. 천장과 바닥에 스피커를 설치해서인지 360도 전 방향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심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작품도 있다. 네덜란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필립 스튜디오Fillip Studios의 인터랙티브 작품 <Tactile Orchestra>는 부드러운 털로 뒤덮인 벽을 손으로 쓰다듬으면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와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귀빈실에선 ASMR 크리에이터 미니유의 사운드와 인영혜의 섬유 조각으로 이뤄진 <Floating Mind>를 만날 수 있다. 푹신한 섬유 덩어리에 앉아 나른한 소리를 듣고 있으니 절로 힐링이 된다. 한낮에 서울로7017을 걷다가, 혹은 서울역 플랫폼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면 문화역서울284에 방문해보자.
다음으로, 파라 알 카시미Farah Al Qasimi의 개인전 《Blue Desert Online》(8월 11일까지)이 소격동 바라캇 컨템포러리를 수놓고 있다. 작가는 오랜 시간 사진·비디오·퍼포먼스 등을 넘나들며 아랍 국가의 탈식민주의 권력 구조, 성별, 취향에 대한 사회적 비평을 시도해왔다. 그가 바라캇 컨템포러리 전체를 블루로 물들인 건 아니다. 정확히는 작품 곳곳을 푸른 빛으로 채워 넣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청색에서 기대하는 통쾌함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 MMORPG <검은사막>을 모티프 삼은 <Blue Desert Online>이 현대 디지털 환경에서 비롯되는 불안·도피·환상 등을 포착한 사진과 영상으로 구성된 까닭. 이는 우울함을 서술하는 영미권 문장인 ‘Feeling Blue’와 연관이 있으리라 추측해본다.
다행(?)인 점은 작품이 심연으로 침잠하지 않는다는 것. 전시 서문처럼 고요하지만 매혹적이고 불안한 작가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우리의 욕망을 어디까지 착취하고 허용할지, 그리고 어디서 휴식을 찾아야 할지 끊임없이 묻는다. 대표적으로, 대형 벽지 위에 스마트폰, 알루미늄 액자, 평면 모니터 등을 배치해 광고를 형상화한 <Dragon Mart Light Display>2018는 걸프 지역의 변화하는 경제와 문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묻는다. 또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는 여성을 담아낸 <Anood Playing Sims>2023는 가상 세계가 오늘날 무릉도원이 아닌지 고민하게 한다. 더불어 “당신은 한동안 잠들어 있었고, 편안했는지” 묻는 목소리가 들리는 영상 작품 <Signs of Life>2023는 우리 삶이 산천과 연결돼야 함을 피력하는 것 같다. 정녕 건강한 현실이란 자연과 불가분의 관계인 것일까.
마지막으로,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선 크루즈 디에즈Carlos Cruz-Diez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RGB, 세기의 컬러들》(9월 18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1923년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난 디에즈는 예술적 창의력과 과학적 호기심을 결합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창조한 작가다. 그는 종이 위에 물감을 섞는 대신, 여러 색의 선을 일정한 규칙으로 반복해서 배치하거나 여러 각도로 겹쳐놓는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그의 결과물은 ‘옵아트Optical Art’(착시 현상을 일으켜 환상을 보이게 하는 예술 장르)와 ‘키네틱 아트Kinetic Art’(작품 자체가 움직이거나 움직이는 부분을 포함하는 예술 장르) 영역을 넘나들며 관객들에게 색과 빛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
《RGB, 세기의 컬러들》은 미학적 탐구보다는 과학의 세계에 가까운 전시다. 한가람미술관은 빛의 삼원색인 RGB의 향연과 다름없다. 빨강Red·초록Green·파랑Blue 각 색의 스펙트럼은 물론, 이들이 뒤섞여 빚어낸 색도 볼 수 있으며, 직접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통해 색의 착시도 연출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크루즈 디에즈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이 연상된다는 것. 이들을 보노라면, 예술이란 하나의 줄기로 이어지는, 다시 말해 동어 반복의 쳇바퀴인지 엉뚱한 의심을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색은 자율적이고, 희미하며,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색상은 생명과 같습니다. 영원한 현재입니다”라는 그의 말이 뇌리에 박혀서일지도.
글 박이현 럭셔리 매거진 피처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