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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8월호

들판으로 달려가자,
정답게 손잡고

삶의 반대편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있다면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은 아마 죽음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여기 삶의 반대편은 ‘들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의 글은 과연 들판을 똑 닮아서 길이 아닌 곳에 길을 낸 것도 같았고, 잠시 멈춰 내가 선 곳을 가늠해 보기에도 좋았다. 책의 제목은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2024(한겨레출판)으로, 문보영 시인이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열리는 국제 창작 프로그램IWP에 참가하게 되면서 그곳에서 한 계절을 나며 쓴 일기다. 이 프로그램은 매년 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시인·번역가가 모여 3개월간 문학적 교류를 나누고 헤어지는데, 이에 관한 또 하나의 유명한 일기로는 30년 전 최승자 시인이 쓴 『어떤 나무들은』1995이 있다. 문 시인은 큰 트렁크에 읽을 책이라곤 최승자 시인의 아이오와 일기만 달랑 챙겨 떠난다. 그리고 자신의 일기에 대해선 이렇게 평한다. “본 행사는 2시간인데 뒤풀이는 3년 같은 글”(247쪽)이라고. 오히려 좋다. 내가 언제 아이오와를 가보겠는가.

아이오와는 40도다. 아이오와에 도착했을 때 너무 추웠다는 최승자 시인의 일기만 믿고 가을, 겨울옷을 잔뜩 챙겼는데 8월의 아이오와는 폭염이다. 30년간 진행된 지구 온난화를 계산에 넣지 못한 나의 불찰이다.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25쪽

책을 다 읽은 후엔 누구에게 이 긴 일기를 강력히 권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 ❶ 문보영 시인의 팬 ❷ 타인의 일기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 ❸ 이중언어자 ❹ 발 디딘 곳을 떠나고 싶은, 혹은 이미 떠나 있는 사람 ❺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들에 대해 고찰해보고 싶은 사람.

모두 해당된다. ❶ 팬이라면 무조건 반길 장편 작품이라는 점에서 ❷ 읽기만 해도 재밌는 타인의 일기라는 점에서 ❸ 모국에 살면서 모국어를 사용하는 비탈출 작가와 다른 나라로 떠나 제2의 언어를 사용하는 탈출 작가 사이에서 지내며 쓴 글이라는 점에서 ❹ 발 디딘 곳을 떠나고 싶어 하던 이가 썼다는 점에서 ❺ 평소엔 인지하지도 못한 정체성이 나를 대표하게 되는 낯선 곳에서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나는 저 다섯 유형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어졌다. 언뜻 생각하면 낯선 나라, 낯선 사람들, 낯선 언어 속에서 지내는 일이니 시인의 상황이 퍽 난감할 것도 같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가장 자유롭게 지낸다. 강해지지 않기로 하고 변하지 않기로 약속하면서.

이미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일기엔 드라마틱한 사건이 없다. 한 계절을 나는 동안 보고 듣고 먹고 나눈 것들의 기록이다. 그런 내용들로 마지막 장까지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299쪽짜리 일기를 써내다니. 시인은 시인이다 싶었다. 밑줄을 긋게 되는 표현도 많았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표현인데, 읽는 순간 너무 이해되는 표현들이다. 가령 이런 것들. ‘햇빛에 발가락을 담근다’, ‘날씨가 얼룩덜룩하다’, ‘문 밑으로 빛 밑줄이 그어졌다’ ··· 아이오와에서만 벌어질 수 있던 아름다운 오해들도 있다. 친구의 이름 오릿Orit을 처음엔 orbit(궤도)으로 잘못 들은 일이라든가, 밤에 사람들이 달을 보러 가자고 할 때면 자기를 보러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던가. 언어를 다루는 서른 명의 사람이 서른 개 넘는 언어 사이에 있으니, 머릿속에서 매분, 매초 빅뱅 같은 언어의 충돌이 있었을 테다. 이들은 서로의 언어를 완벽히 구사하지 않더라도, (심지어 아예 모르기도 한다!) 나의 단어가 상대의 단어에 반드시 1 대 1로 매칭되지 않더라도 서로를 충분히 아끼고 이해하며 그들만의 우주를 만들어 공전한다.

저는 집으로 돌아와 엑소포닉 작가들에 대해서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 전 그들이 특출하거나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언어를 조금 더 세심하고 입체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 여러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처럼 세상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296쪽

한국에서 시인의 삶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본인 스스로 웅크리는 편이 편했다는 걸 보면 아이오와에서 낯선 언어를 구사하며 “내가 두 명이 될 수 있는 가능성”(191쪽)을 알아버린 순간의 기쁨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다소 납작했던 삶을 풍선 불 듯 훅훅 불고 모든 감각을 바짝 세워가며 자신의 세상을 팽창시켰을 시인의 모습을 보지 않았지만, 본 것만 같다. 너른 들판에 부는 바람을 닮은 미세한 변화들이 책장을 넘길수록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아이오와 사람들은 매일 아침 삶을 꾸리기 위해 다운타운으로 향한다. 다운타운 반대편에는 너른 들판이 있는데, 시인은 그걸 보고 ‘삶의 반대편에는 들판이 있다’고 말한다. 들판은 사람이 걷게 만든 길은 아니지만 걸어도 괜찮은 길이라며, 사람의 길이 아닌 길을 충분히 걸어야 사람이 걷도록 만든 길도 걸을 수 있게 된다고 믿고 싶다면서 말이다. 아이오와는 그 자체로 시인의 들판에 새로 난 길이었을 테다. 앞으로 펼쳐질 무수한 길을 뚜벅뚜벅 잘 걸을 수 있도록 돕는 길. 그 길에서 헤매고 걷고 뛰고 망설인 흔적은 언뜻 보면 아무 의미 없어 보이지만, 다음 사람에겐, 적어도 미래의 자신에겐 분명 한 방향을 가리키는 선명한 지도가 되었을 테다.

타인의 일기를 읽고나면 꼭 그다음 순서로 내 일기도 펼쳐보고 싶어진다. 나의 들판인 오랜 일기장을 펼쳐본다. 들판의 아침 이슬이 내 어깨에도 묻어나는 기분이다. 어떤 장은 여전히 축축하고 어떤 장은 어느새 날이 갰으며 어떤 장은 분명한 길이 되었다. 정말 모르겠다고 여긴 순간들이 모여 지금을 가리키고 있다니. 들판에 오늘치 길을 내며 문득 깨달았다. 나는 요즘의 나날이 만족스럽고 더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지금의 시간도 또 하나의 들판이라고 말이다.

*글의 제목은 동요 ‘들판으로 달려가자’의 구절을 빌렸습니다

글 손정승 『아무튼, 드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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