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할 수 없는 경험,
소유하는 경험
저의 부엌 찬장엔 머그잔이 그득합니다. ‘식기’로 구매했다기보다는 무언가를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구매했거나 선물 받은 것들입니다. 하와이의 강렬한 색감을 담은 머그, 양학선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을 기념한 머그, 특정 행사나 교육 프로그램의 명칭이 새겨진 머그, 놀이동산이나 미술관, 공연장 기념품 가게에서 사온 머그, 새로 생긴 카페에서 받은 머그 등등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특별히 머그잔을 수집하는 게 아니거니와 물건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의 집엔 온갖 곳에서 받거나 구매한 것들이 넘쳐납니다. 찬장의 다른 칸엔 어디선가 받은 물병과 텀블러가 점점 불어나고 예전에 모았던 냉장고 자석도 어딘가 모여 있습니다. 책상에 앉으면 또 어디선가 받은 노트와 메모지, 키링과 스마트링, 각종 펜 등이 굴러다닙니다. 현대인은 굿즈goods의 인간이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머그잔이 기념하고 기억하는 ‘무언가’는 무엇일까요? 주로 소유할 수 없고 고정할 수 없는 경험의 영역입니다. 하와이의 파도와 꽃, 공중에서 1080도 회전하는 ‘양학선’ 기술, 놀이동산 나들이의 추억과 감명 깊게 본 공연은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머그잔에 새겨 넣으면 매일 아침 커피를 담아 마실 수 있는 단단한 실체가 됩니다. 볼 때마다 기억이 떠오르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요.
굿즈, 그중에서도 상품화된 MDmerchandise는 공연예술의 한계를 보완해줍니다. 경험재에 해당하는 공연예술은 동일한 시공간에서 타인과 함께 향유할 뿐 고정하거나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 시간, 그 장소에만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자 생성되는 순간에 소멸하고 맙니다. 이 얼마나 허망한 존재 방식인가요. 손에 잡히지 않는 공연예술을 간접적으로라도 만질 수 있게 해주는 굿즈가 더욱 애틋합니다.
공연단체는 앞다투어 MD를 개발하고 판매합니다. 놀이기구를 탈 때마다 기념품 가게를 거쳐야만 퇴장할 수 있는 놀이동산처럼 요즘의 공연계에는 MD가 필수입니다. 관객에겐 소유할 수 없는 경험을 소유하게 해주고, 공연단체엔 쏠쏠한 수익원이자 자연스러운 홍보마케팅으로 이어지니 일석삼조입니다.
MD에서도 트렌드와 개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 눈에 띈 것은 뮤지컬 <헤드윅>의 손수건입니다. 작품에는 퀴어 가수 헤드윅이 연인 토미와 처음 만나는 상황을 실제 관객 한 명을 대상으로 재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헤드윅이 토미를 향해 노래를 부른 후 손수건으로 화장을 닦아내어 이를 던집니다. 토미 역의 관객은 진한 화장이 그대로 묻어난 손수건을 마치 헤드윅의 분신처럼 소유하게 됩니다. 공연의 실제 소품이라는 점, 그리고 단 한 명의 관객이 소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굿즈입니다.
그런데 이 특별한 굿즈를 가지고 싶은 다른 관객들을 위해 아예 화장이 묻은 디자인의 손수건 MD를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단돈 만 원 안팎이면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굿즈의 위계가 생겨납니다.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손수건 역시 공연장에서만 구매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만 공연 중에 던져진 단 한 장의 손수건에 비할 데는 아닙니다. 희소할수록 가치가 높아진다는 경제학의 원리에 따라 굿즈도 한정판, 특별판, 친필 사인본 등으로 몸값을 올립니다. 묘한 일입니다. 소유할 수 없는 공연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MD이지만 그중에서도 소유하기 어려운 것이 가치가 높으니까요. 이제 우리는 단순히 굿즈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도 더 특별하고 더 희소한 굿즈를 소유하기 위해 끝없이 욕망을 불태웁니다.
한편 공연예술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미술 역시 굿즈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미술에선 단단한 실체를 가진 개별 작품이 원본이자 기록이 됩니다. 그래서 진품 여부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판화나 디지털 예술 등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단 하나의 작품을 단 한 명이 독점적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독점성을 보완할 수 있는 분야가 굿즈입니다. 일반인이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소유하기란 어렵지만, 기념품 가게에서는 별빛이 흐드러지게 쏟아지는 머그잔과 손수건, 우산과 달력, 양말과 노트를 마음껏 구매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별이 빛나는 밤에> 머그잔은 원본의 가치에 비할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원본’마저도 여럿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최근 디지털 자산 개념인 NFT가 활성화되면서 미술 작품의 원본을 여러 명이 쪼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뱅크시의 대표작 <Love Is In The Air>2003는 작품 가격이 무려 12만 달러에 달하지만 이를 1만 개의 NFT로 나누어 하나당 약 1,500달러에 판매했다고 합니다. 마치 수많은 주주를 거느린 주식회사처럼 미술 작품의 원본 역시 칼로 자르지 않더라도 여러 명이 소유할 수 있는 성질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굿즈는 가질 수 없는 공연예술과 혼자만 가지는 미술의 보완재이자 교집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희소성이나 소유 지분에 따라 위계와 격차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굿즈 역시 점차 자본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연계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는 관객을 위해 출연진 전원이 포스터나 인형에 사인해 증정했다는 뉴스가 종종 들려옵니다. 예술가의 친필 사인이 담긴 굿즈는 가치를 따질 수 없이 소중한 것인 동시에 시간이 지날수록 경제적 가치가 급격히 상승하는 재화이기도 합니다. 애틋한 사연이 있을수록 그 가치는 높겠지요. 때때로 공연단체는 재정적 목적을 위해 친필 사인 굿즈를 판매하고, 관객 역시 투자의 일환으로 그것을 구매하기도 합니다. 합리적이고 영리한 경제 행위지만 그 과정에서 경험 자체가 퇴색되는 것은 아닌지 아쉽기도 합니다.
발레의 모더니즘을 이끈 미하일 포킨의 <장미의 정>1911은 한 소녀가 무도회에서 돌아온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소녀는 무도회를 떠올리며 서성이다 소파에 앉아 깜빡 잠에 듭니다. 무도회에서 받아온 장미 한 송이가 소녀의 손에서 힘없이 떨어지자 장미의 정령이 소녀의 꿈속에 나타나 소녀와 춤추지요. 장미의 정령이 창문 너머로 사라진 후 잠에서 깬 소녀는 장미꽃을 주워들어 무도회를, 그리고 꿈을 추억합니다. 장미꽃엔 무도회의 짜릿함이 투영되었고, 인격화된 장미는 또 한 겹의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다음날이면 시들 장미도, 깜빡하는 단꿈도 무도회에서의 시간처럼 사라지고 말지만 소녀의 마음속에 무도회, 그리고 정령과의 춤은 오래도록 기억되겠지요.
글 무용평론가 정옥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