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 거장’
박대성의 뚝심
준비된 자에게 기회는 반드시 온다. 지난해 해외 순회전을 성황리에 마치고 온 ‘수묵화 거장’ 박대성 화백이 증명했다.
미술 한류 시대, 박 화백은 K-아트의 선봉에 있다. 수묵화가 최초로 2022년 독일·카자흐스탄·이탈리아에 이어 202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LACMA, 다트머스대 후드미술관Hood Museum of Art,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찰스왕센터Charles B. Wang Center, 메리 워싱턴 대학교University of Mary Washington 등 해외 유수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특히 LACMA 전시는 한국 작가 최초라 주목받았는데, 원래 일정보다 두 달간 연장 전시되면서 미국에서 화제를 모았다.
한국에서와 달리 전시 때마다 관람객이 북적였다. 가로 4미터, 세로 7미터가 넘는 대작의 위용과 함께 붓질의 필력에 감탄한 관람객과 물질문명과 대비되는 정신성을 담은 한국 그림을 새로 봤다는 평론가의 호평이 이어졌다. “우리 한국화를 마치 전혀 새로운 것을 보듯 굉장히 놀라워하는 것을 보고 더 놀랐다”는 박 화백에게도 오로지 수묵화에 매진해온 자신의 작업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이 같은 일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기적이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1945년생으로 여든을 바라보는 박 화백은 일평생 ‘보이지 않는 뿌리’를 찾아 한국화, 우리 그림에 정진해왔다.
그의 작품에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 녹아 있다. ‘전통미술과 현대미술의 양분화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는 그의 수묵화는 지필묵紙筆墨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장르를 넘나드는 시도를 통해 과거와 동시대 미학을 융합한 ‘현대 수묵화’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수묵화 거장이 되기까지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정신’이 그를 일깨웠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성공한 화가다. 그는 우리 현대사 동족상잔의 처참한 희생양이었다. 6.25 전쟁 때인 다섯 살에 고아가 됐고 팔 하나를 잃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 혼자 놀던 어린 시절 병풍에 있던 그림을 따라 그렸고, 어르신들의 ‘고놈 그림 참 잘 그린다’는 칭찬이 힘이 됐다. 밖에 나가지도 않고 그림만 그렸고, 먹과 붓 맛에 취하게 됐다.
수묵화는 누구보다 자신 있던 그는 20대 당시 국전을 섭렵했다.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 참가해 여덟 번이나 입선했고, 이어 1979년 중앙미술대전에 출품한 수묵 담채화 <상림>이 대상을 받으면서 ‘한쪽 팔 화가’의 이변을 일으켰다. 당당히 ‘수묵화가 박대성’으로 두각을 드러낸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중국 북경·계림·연변 등지로 화문기행畵文紀行을 떠나거나1988~1989, 실크로드1993, 1995를 방문해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이국적인 풍경을 현장에서 스케치하는 등 창작의 바탕을 넓히는 데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먹과 서書 연구에 정진하며 현재까지도 명필가의 서법을 습득하고 서작書作 원리를 배우는 임서臨書로 매일 아침을 시작한다고 한다.
1990년대는 그의 최고 전성기다. 없어서 못 팔 정도로 그림이 팔려나갔고, 부자 화가가 됐다. 그러다 돌연 현대미술을 공부하겠다고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을, 일 년도 안 돼 깨달았다. 수채화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었다. 먹의 번짐처럼 퍼지는 수채화 그림을 보던 순간, 여기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불국사가 떠올랐고 귀국하자마자 경주 불국사로 들어갔다.
경주가 고향도 아니고, 더욱이 천주교 신자인 그의 일탈 같은 작업은 박대성을 ‘불국사 작가’로 올려놓는 계기가 됐다. 1996년 인사동에서 연 전시에 공개한 가로 8미터, 세로 2미터 크기의 <불국설경>은 “그림에서 광채가 난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명성을 얻었다. 눈을 그리지 않았지만, 설경이 펼쳐지는 묘한 그림이다.
불국사 작가로 경주에 뿌리를 내린 그는 작품 830여 점을 기증하며 경주 솔거미술관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다. 2015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내 솔거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이 이 미술관을 찾아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려 화제가 되면서 박 화백의 인스타그램 계정 팔로워가 3천 명을 넘기기도 했다.
오로지 순도 ‘100% 먹 맛’으로 미술시장을 평정한 그는 동서양을 떠난 붓질에서 자유롭다. 무르익은 필치가 그린 대자연의 풍경은 생동하는 기운은 물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백이야말로 ‘한국 수묵화’의 정체성이다. “어색하게 내 작품을 서구화하고 싶지는 않았다”는 그의 고집과 뚝심이 이룬 해외 순회전의 쾌거는 K-아트의 나비 효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숙제는 있다. 세계에서는 한국화에 대한 반응이 뜨거운데, 정작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한국화 전공이 없어질 정도로 수묵화가 내팽개쳐진 현실이다. “현대미술도 중요하지만, 선조들이 물려준 좋은 문화유산인데 국가 차원에서 새롭게 조명했으면 한다”는 박 화백의 쓴소리가 ‘한국화 살리기’ 대안처럼 들린다.
글 뉴시스 미술전문기자 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