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안에 묘지를 짓는 삶,
욘 포세의 예언적 통찰
늦가을. 비 냄새 가득한 낙엽이 뒹구는 어느 묘지의 한편.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났다. 젊은 시절 사랑했지만, 그 마음을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이별하여 각자의 삶 속에서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그들. 어느새 중년이 되어 우연히 마주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바로 알아본다. 두 사람은 어색한 듯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작가가 무대 지시문으로 세심하게 묘사하듯─“서로에게 끌리는 듯 바라[보다 이내] 자제하고, 어느 정도 열린 마음으로 서로 미소 짓[다 가도] 다시 당혹스러워한다.” 그저 때때로 묘비명을 읽으며 ‘쓸데없는 잡담’만을 늘어놓는다. 이렇듯 두 사람의 대화는 연신 미끄러지지만, 미끄러지는 이야기 속에서도 옛 감정은 다시 살아나 두 사람은 서로를 힘껏 껴안고는 묘지를 함께 나선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시간이 이상하게 흐르기 시작한다. 때때로 서사를 단절하고 비약하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흐른다. 내달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두 사람은 할머니의 장례를 위해 묘지를 찾은 남자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전처를 만나고, 이내 아버지의 장례를 추억하고, 아들의 장례를 기억하고, 마침내는 남자의 장례를 치른다. 모든 일이 이 묘지에서 일어난다. 마치 그 묘지가 누군가의 꿈, 또는 기억인 것처럼.
그렇다. 한 인간의 삶은 자신 안에 묘지를 짓는 것과 같다. 곁에 있다 떠나간 이들이 하나둘 그곳에 묻힌다. 그러나 사랑 또한 이 묘지 안에서 움튼다. 그리고 사랑은 시간에 대한 감각을 틀어놓는다. 사랑에 빠지는 시간은 영원처럼 느리게 흐르지만, 그 이후 일상의 시간은 마치 사랑이 지연시킨 시간을 회수하듯 쏜살같이 지나간다. 그런 것이 ‘인생’에 대한 인간의 감각일 터.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Jon Fosse의 대표작 「가을날의 꿈Draum om hausten」1999(『가을날의 꿈 외』, 지만지드라마, 2019)은 이처럼 논리적 언어에 쉬이 담기지 않는 시간에 대한 인간의 감각을 탁월하게 포착한다. 포세에게 다시금 매혹된 나는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의 각색 작품을 찾아보기로 했다. 극작가의 작품세계는 때때로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썼는가보다 이미 알려진 이야기를 어떻게 다르게 썼는가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구글은 그가 소포클레스Sophocles·라신Jean Racine·마리보Pierre de Marivaux·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입센Henrik Ibsen 등의 작품을 각색한 바 있다고 일러주었지만, 희곡 전문을 찾을 수 있는 작품은 희곡집 『Fosse: Plays Five』(Oberon Books, 2011)에 수록된 「텔레마코스Telemakos」2004뿐이었다. 희곡집에는 “오래된 고전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재창조”했다는 간단한 소개뿐. 노르웨이어로 된 소개까지 번역해본 결과, 이 작품은 유럽 극장 네트워크가 극작가 14명에게 호메로스Homeros의 『오뒷세이아Odyssey, Odysseia』(기원전 8세기)를 바탕으로 하는 단막극을 의뢰해 집필됐으며, 2005년 공연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텔레마코스’라니? 『오뒷세이아』는 ‘오뒷세우스의 모험과 복수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총 24권으로 구성된 『오뒷세이아』의 첫 4권은 오뒷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의 이야기, 즉 「텔레마키아」이긴 하다. 그러나 「텔레마키아」는 그다지 박진감 넘치는 서사가 아니다. ‘4권까지 계속되는 아들 이야기에 지쳐 책 읽기를 그만두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 실제로 수많은 창작자들이 『오뒷세이아』에서 영감을 받아 다양한 장르의 예술 작품을 창작했으나, 텔레마코스에 주목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페늘롱Francois Fenelon이 『텔레마코스의 모험Les Aventures de Telemaque』1694이라는 교육소설을 출간한 바 있으나, 이 또한 텔레마코스와 동행하며 따끔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멘토르, 즉 ‘멘토Mentor’ 역할에 주목한 경우다. 결국 텔레마코스는 이야기 속에서도, 이야기 밖에서도 자신을 알아봐주는 사람을 오래도록 기다려온 셈이다.
욘 포세는 그런 텔레마코스에게 주목했다. 게다가 여느 극작가라면 하지 않았을 법한 선택을 했다. 「텔레마키아」 4권 중에서도 가장 이렇다 할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1권의 내용을 택한 것. 트로이전쟁이 끝난 지 오래인데도 오뒷세우스가 돌아오지 않자 그가 죽었다고 지레짐작한 젊은 남자들이 궁전의 대들보가 들썩이도록 먹고 마시며 가산을 거덜내고 있는 가운데, 오뒷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가 지난 3년 동안 얼마나 명민하게 무도한 구혼자들을 속여왔는지가 밝혀지기도 이전, 변장한 여신 아테나를 만난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자신의 여정을 시작하기도 이전, 그러니까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의 이야기를 다시 쓴 것이다. 심지어 1권에 등장했던 아테나의 방문도, 가인singer의 노래에 터져버린 페넬로페의 눈물도, 구혼자들에게 폭발하는 텔레마코스의 분노도, 포세의 「텔레마코스」에는 없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텔레마코스, 페넬로페, 구혼자, 가인, 이렇게 네 명이 등장해 지난 몇 년 동안 무수히 반복됐을 법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부재한 오뒷세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띄엄띄엄 이어지는 가운데, 구혼자는 맥주를 홀짝이고 가인은 노래를 부른다.
“아빠가 떠났어요. 일곱 바다에서 길을 잃었죠. 아직 살아 계신가요? 아니면 포효하는 깊은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렸나요? 집에는 아내와 아들이 있어요. 아빠 어디 계세요? 아빠 어디 계신가요? 우리에게 신호를 주세요. 우리가 부탁하는 건 단 한마디. 아빠 어디 계세요?”
가인은 텔레마코스에게만 들려주나, 다시 듣기를 청하는 구혼자의 부탁에, 뒤늦게 도착한 페넬로페의 청에, 이 노래는 여러 번 반복된다. 심지어 텔레마코스와 가인이 떠나고 난 후에는 페넬로페와 구혼자가 나란히 앉아 어깨에 팔을 두르고 함께 노래한다. 갈등해야 마땅한 두 인물이 마치 무료한 시간을 함께 견디는 친구처럼 어깨동무하고 그리움의 노래를 합창하는 것이다.
본디 전통적으로 희곡은 인물의 목표와 행동, 갈등과 사건을 중시하는 법인데, 포세는 참으로 기이한 선택을 한 셈이다. 「텔레마키아」를 택함으로써 모험을 떠났다가 귀환하고, 귀환해 복수하는 영웅이 아니라 집에 남아 일상을 살아내는 우리와 같은 범인凡人의 시간을 담아냈으며, 심지어 새로운 만남도, 감정의 격동도, 인물들 사이의 갈등도 생략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기이하고도 용감한 이 선택은 절묘하게도 『오뒷세이아』의 핵심을 포착한다. 서양고전학자 강대진이 『세계와 인간을 탐구한 서사시: 오뒷세이아』(아이세움, 2009)에서 말하듯, 『오뒷세이아』는 ‘전후戰後문학’이다.
“불멸의 명성을 앞세웠던 영웅들은 모두 트로이 전장에서 사라져 버렸[고] 참을성과 현명함으로 살아남아 무너진 집과 고향을 회복하는 것이 새 시대 인간들의 과제다. 과제치고는 소소하다 싶을 수도 있지만 아마 이것이 우리 삶의 진실일 것이다.”
과연 이것은 우리 삶의 진실이다. 「가을날의 꿈」과 「텔레마코스」를 함께 놓고 말하자면, 생의 어떤 시절 우리는 세계를, 그리고 시간을 능동적으로 경영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시간의 흐름에 무력하게 휘말린다. 그런 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감수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이자 가장 격렬한 행위인 시간 말이다. 게다가 ‘능동적 행위자’로 군림했던 인간과 ‘수동적 감수자’로 여겨지던 자연의 자리가 역전된 이 시대, ‘함께 감수하는 삶’이라는 포세의 통찰은 진정 이 시대의 철학이다. 어떤 동시대성은 이토록 예언적이다.
*‘오뒷세이아’, ‘오뒷세우스’ 표기는 천병희·이준석의 번역을 따랐습니다.
글 공연 칼럼니스트·드라마터그 전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