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바보상자가 아닙니다
2023년 미술 신scene을 뜨겁게 달군
주인공은 단연 몰입형 미디어아트immersive
media art(디지털 기술로 만든 작품을
공감각적으로 경험)다. 전시를 본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작품을 온몸으로 감상할 수
있어 마치 미술사 속 인물이 된 것 같다고
평한다. 영상이 몸 위로 투영될 때 작품과
내가 하나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
아쉬움이 있다면, 대부분 마스터피스를
가공한 영상인지라 재생 완료 후 약간의
공허함이 생긴다는 것. 이는 몰입형
미디어아트가 ‘체험’에 맞춰져 있어 작품을
보았음에도 고민할 거리가 덜 남는다는
것에 기인할 테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아쉬움을 상쇄하는 미디어 전시가 열려
눈길을 끈다. 같은 영상이라도 동시대 화두를
녹여내서일까. 아니면 매체 운용의 폭을
넓혀서일까. 현재 서울과 수원·용인에서
진행되고 있는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마당: 마중합니다 당신을》, 《트랜스미션:
너에게 닿기를》에선 단순히 보고 느끼는
행위를 넘어 작품 뒤의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올가을, 2년마다 찾아오는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11월 19일까지)의
막이 올랐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도시와 예술, 미디어의 새로운 관계에
전환점을 제공하고, 국제 미술계와
대화하며, 예술과 문화를 향유하고 지지하는
관객층을 넓혀나가는 미술 축제다. 올해로
12회째를 맞은 비엔날레 소개에 앞서,
잠시 제11회 비엔날레를 언급하고자 한다.
‘도피주의escapism’(현실에 직면하는 것을
피하고, 방관하거나 공상과 관념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태도)를 주제로 한 제11회
비엔날레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전면엔
개그와 웃음을 이면엔 계급·성 정체성·
인종·젠더 등의 화두를 담아낸 넷플릭스
시트콤 <원 데이 앳 어 타임One Day at a
Time>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것.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코믹 요소를
극대화한 프로그램이 되레 정치·사회적
문제를 꼬집음으로써 사람들의 현실 감각을
깨운다는 발상이 독특했던 까닭이리라.
그러니 거리를 두면서 상황을 타개해야 했던
팬데믹 시국과 어울릴 수밖에.
지난 비엔날레가 개인의 도피를 다뤘다면,
제12회의 지향점은 개인의 ‘결합’이다.
이를 위해 예술감독 레이철 레이크스Rachael
Rakes가 내세운 개념은 ‘지도’다. “지도는
위도와 경도로 땅을 나눕니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해체되기도 하죠.
지도 위에 존재하는 우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요. 참여 작품들은 이 같은 문제를
직접 드러내는 대신,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탈 영토적인 방식으로 보는 걸
제안합니다.” 실제 비엔날레는 단일 공간이
아닌, 서울시립미술관·서울역사박물관·
SeMA벙커·소공 스페이스·스페이스 mm·
서울로미디어캔버스에 액자식 구성처럼
연결돼 열리고 있다. 그래서 오랫동안 천천히
감상해야 작가들의 머릿속을 지도화할 수
있는데, 곱씹다보면 복잡하게 얽힌 작금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이 자연스레 겹쳐진다.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이듬해 1월 28일까지
개최되는 《마당: 마중합니다 당신을》은
비엔날레보다 직관적으로 ‘연결’에 집중한다.
관객과 예술이 미술관 공간에 같이 머무르며
서로 관계하고 작동하는 방식을 조명한다. 이
전시의 테마는 작품과 공간을 신체와 감각을
통해 받아들이고, 타인과 교감하는 공동체적
공간인 ‘마당’. 드로잉·사운드·퍼포먼스·VR
등 작가 10명(팀)의 작품이 있지만,
시선이 향하는 건 미디어 작업이다. 먼저,
잊고 있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거나
낯선 이를 인식하게 만드는 1부 ‘고요한
소란’에선 김지영과 무진형제가 눈에 띈다.
김지영은 콧노래를 활용해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환경을 탐구하고, 무진형제는
균열·단절·비약이 넘쳐나지만 그래도 꿈을
꾸며 살아가는 보통의 하루를 풀어낸다.
1부가 이런 삶도 있다는 인식에 초점을
맞췄다면, 2부 ‘함께 춤추기’는 보는 이를
진짜로 움직이게 만든다. 전시장 입구에
위치한 조영주의 작업은 돌봄에서 발생하는
감정과 감각에 주목, 보살피는 사람과 돌봄
받는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접촉과 긴장,
유대와 신뢰에 관해 이야기한다. 관객은
적외선 조명을 쬐면서(<휴먼가르텐>)
마사지 퍼포먼스 영상(<콜레레>)을 볼 수
있는데, 여전히 약간의 거리 두기를 인식하며
살아가는 지금, 과연 신체적 접촉이 있어야만
타자와의 거리가 좁혀지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안성석의 <사랑을 나눠줄 만큼 행복한
사람이 되면>은 제목 그대로 ‘사랑’을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다. 작업의 핵심은
VR 영상에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서 바로
앞에 있는 하트 유리 위에 손을 올리는 것.
장비에 기댄 작업이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와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게 하는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지나치지 않기를
바란다.
백남준아트센터가 선보이는 《트랜스미션:
너에게 닿기를》(12월 3일까지)은 9.11 테러
이듬해인 2002년 록펠러 센터 광장에
설치됐던 백남준 <트랜스미션 타워>2002를
국내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다. 당시 전시
개막식에서 그는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피아노 퍼포먼스를 펼친 바 있다. 이때
레이저 협업자 노먼 발라드Norman Ballad가
피아노 소리에 맞춰 프로그래밍한 네온과
레이저, 백남준이 제작한 타워를 합친 작품이
<트랜스미션 타워>다.
타워가 세워진 백남준아트센터 야외에선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조용히 연주하라>1997도 만나볼
수 있다. 작품은 폐차된 자동차 32대로
이뤄졌는데, 내부는 텔레비전을 비롯한
시청각 기계의 잔해로 가득하다. 2002년
백남준은 두 작품을 병치 후 “자동차는
20세기 기계 문화의 상징이고, 레이저는
21세기 정보 문화의 상징”이라고 언급하며,
기계 문화의 유한성과 정보 문화의 무한성을
표출했다. 이미 시대의 전환을 예견했던 셈.
한편, 타워가 내뿜는 형형색색 레이저는
실내의 제2전시실로 이어진다. 공간은
록펠러 센터 현장 아카이브와 이데올로기로
고통받은 한국인이 새롭게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영상 <호랑이는
살아있다>2000, 그리고 미디어를 바탕으로
우주와의 소통을 추구하는 설치 작품
<삼원소: 삼각형>1999이 수놓는다. 인상적인
점은 이 작품 모두 20세기 말에 탄생했다는
것. 이는 백남준이 먼 훗날을 굉장히 영민하게
예측했음을 다시금 방증한다. 그렇다면
20여 년이 흐른 2023년의 미디어 세상은
그의 작품대로 역동적이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까. 전시를 보노라면,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과연 긍정적이기만
한 것인지 물음을 남긴다.
글 박이현 노블레스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