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날에도 데우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 마음
- 더위잡다
어릴 적 ‘덥다’를 ‘덮다’로 잘못 쓴 적이 있었다.
아마도 “오늘 참 덥다”나 “방 안이 왜 이리
덥지?” 같은 문장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나는 받침 있는 글자를 써야 할 때면 느낌에
의존하곤 했다. 모르면 몰라도 ‘덥다’와
‘덮다’를 혼용했을 것이다. 어느 때는 맞고
어느 때는 틀렸을 테지만, 아이였으니까
틀렸을 때조차 크게 혼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기억이 떠오른 것은 여름날에도 이불을
덮고 자는 나를 보고 친구가 한 말 때문이다.
“가뜩이나 더운데 이불을 덮으면 더 덥지
않아?” 나는 이불을 덮어야 안심이 된다고
말하며 가까스로 상황을 모면했지만, 덮어서
더 더운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날은 여름날이었고 폭염주의보, 열대야,
탈수 등의 말을 뉴스에서 들은 날이었다.
습관적으로 이불을 덮는데 마치 더위를
덮는 것 같았다. 더위에도 무게가 있구나,
그것이 습기와 결합하면 무시무시할 만큼
무거워지는구나…… 생각하기도 했다.
그날 나는 ‘덥다’를 부러 ‘덮다’로 썼다.
내 온몸을 막고 누르고 닫고 휩싸는 어떤 것,
왠지 ‘덥다’라는 말로는 그 느낌을 완벽히
표현해내기 부족하다고 느꼈다. 나는 허물을
덮듯이 ‘덥다’를 ‘덮다’로 덮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사지四肢가 땀으로
흥건했다. 더위가 물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에
당황하면서도, 나는 쉬지 않고 물을 들이켰다.
열을 열로써 다스리는 이열치열처럼, 발생한
물은 또 다른 물로 다스려야 할 것 같았다.
더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삼복 기간에는
입술에 묻은 밥알도 무겁다”라는 속담처럼,
더위 앞에서는 사소한 일을 수행하는 것조차
힘겹다. 언젠가부터 길어지기 시작한 여름은,
마치 혜성처럼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가을의 첫머리까지 잠식하고 있다. 입추가
지났으나 가을이 시작되기는커녕 여름이
본격적으로 활개 치는 듯하다. “아, 덥다”라고
소리 내어 말한 게 언제인지 더듬어보니 5월
중순이었다. 한봄에 이미 첫여름의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첫여름부터 일찍 오는 더위를
일컬어 ‘일더위’라고 하는데, 일더위가
찾아오는 시기가 빠를수록 여름이 길다.
일더위가 독할수록 그해 여름은 혹독하다.
머리로는 도통 이해할 수 없어도 몸은 생존을
위해 기민하게 반응한다. 땀 흘리는 만큼
시시로 물을 찾고, 길을 걷다가도 그늘만
보이면 반사적으로 기어들게 된다.
일더위의 반대말은 늦더위일 것이다. 여름이
다 가도록 가시지 않는 더위 말이다. 일더위가
빨라진 만큼 늦더위는 없거나 그 시기가
앞당겨지면 좋으련만, 가을의 한복판에서도
더위는 꺾이기를 거부한다. 봄의 끄트머리와
가을의 첫머리에는 어김없이 더위가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것도 바로 더위다.
더위 먹다, 찜통더위, 불볕더위, 더위가
기승을 부리다 등 더위와 관련된 관용적
표현은 더위를 이기거나 물리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덥다, 후덥다, 무덥다,
후텁지근하다 등은 더위의 정도를 드러내는
형용사인데, 더위가 갖는 변화무쌍함을
생각해보면 부족한 느낌이 들 정도다.
기후 위기의 징후를 더위만큼 속 시원히(?)
뼈아프게(!) 보여주는 것도 없는 듯하다.
더위에 몸 둘 바, 마음 둘 바 모르던 중에
‘더위잡다’라는 말을 알게 된 건 실로
행운이었다. 말 그대로 더위를 잡는다는
뜻이면 대리만족을 느꼈겠지만, 이 단어는
오히려 “움키다”와 가까운 단어다.
‘더위잡다’의 첫 번째 뜻은 “높은 곳에
오르려고 무엇을 끌어 잡다”이다. 절벽에
오르기 위해 바위를,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나무 덩굴을 잡는 사람의 뒷모습이 그려지는
단어다. 왜 그는 높은 곳에 오르고자 하는
것일까. 무엇이 그를 시작 혹은 끝으로
이끄는 것일까. 마치 이르게 시작된 더위라도
늦을지언정 언젠가는 끝을 볼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더위를 잡기
위해 전력투구하며 더위 꼭대기로 나아가는
용사의 모습이 그려진다면, 된더위에 이미
지쳐버린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더위잡다’의 두 번째 뜻은 “의지가 될 수
있는 든든하고 굳은 지반을 잡다”이다.
먹고살기 위해 무작정 상경한 사람, 더는
견딜 수 없어 이민자로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
무수한 실패로 실망낙담失望落膽한 사람에게
더없이 필요한 단어이기도 하다. 더위를
잡아야 비로소 ‘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고
북돋우면서, 동시에 너무 더우면 단단한
의지도 일순 흐무러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더위잡다’의 첫 번째 뜻과 두 번째 뜻을 읽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안간힘’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매년 갱신을 거듭하는 더위를
통과하는 일은 더위잡겠다는 결심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래전의 일이다. 한여름 밤, 엄마와 나
단둘이 있던 집에 누군가가 벨을 눌렀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머리는 새하얬고
얼굴은 까무잡잡했다. 복수腹水가 차서
배는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뭔가를 단단히
결심한 듯 엄마는 그를 집에 들였다. 나도
모르게 눈이 마주쳤는데, 눈빛이 몹시
형형炯炯해서 순간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압도’라는 말을 몸의 반응으로 먼저
배운 셈이다. 엄마는 바지런히 상을 차렸고
그는 다소 힘겹게 밥을 먹었다. 쩝쩝, 후루룩,
우걱우걱 등의 부사가 육성으로 지원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기도 한 날이었다. 식사를
마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했다. 엄마는 끝까지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시한부 인생, 이 말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언젠가 일면식도
없던 사람을 집 안에 들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엄마는 ‘마지막’만이 풍길 수 있는
강렬한 기운을 그의 눈빛에서 읽었다고 했다.
“무섭지 않았어?” 내가 물었고 엄마는 “어쩌면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무서울지도 몰라”라고
아리송한 답변을 내놓았다. 여름밤, 찌개를
데워 손님에게 밥 한 끼를 대접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데우면서 더위를 물리치는
마음, 더위잡겠다는 사람 앞에서 선선히
더위잡히는 마음, 더운 날에도 데우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 마음 덕분에 여름의 더위는
마침내 ‘가시는’ 게 아닐까.
글 오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