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와 ‘글’을 나눈 다정한 사제 師弟 이창배와 황용주
2017년 10월 4일, 종로3가 국악로를 걸었다. 많은 가게가 문을 닫고 거리는 한산한 와중에 한 건물의 창문이 열려 있었다. 추석 당일임에도 ‘선소리산타령전수소’의 황용주 명창은 출근했다. 계단을 올라 4층에 이르니 명창이 나를 반겨줬다. 황용주 명창은 내가 자리에앉자마자 한국인의 자양강장제라는 박○○를 권했다. 이것이 오랫동안 심야에 굿판을 벌이고 새벽까지 녹음하는 국악인과 무속인에게 큰 도움을 줬다면서.
대한민국 1호 민요학원을 열다
국가무형문화재 황용주1937~2022. 자신의 예능 종목 ‘선소리산타령’ 뿐만 아니라 과거의 기록을 수집하고 정리해 책으로 출판하는 일에 큰 의의를 두는 국악인이다. 추석에도 왜 쉬지를 않았을까? 《조선고대사》 《경복궁 지경다지기》와 함께 역대 명창명인의 일대기를 모은 《명인대전집》을 출판하는 것이 선생의 목표였다.
선생과 대화하면서 그의 스승 이창배1916~1983 명창이 겹쳤다. 두 사람은 참 닮은꼴이다. 이창배는 일찍이 《증보 가요집성》1961과 《한국가창대계》1976 등 국악의 가사를 정리한 책을 출판했다. 황용주는 《한국경서도창악대계》1993를 출판했는데 스승이 낸 책에서 경기민요와 서도민요 부분을 확대·심화시킨 출판물이다.
1983년 1월 5일, 이창배 선생이 타계했다. 일종의 회귀본능이랄까? 동대문 근처에서 운영하던 학원을 접고 황용주는 스승이 운영하던 학원 근처인 이곳으로 옮겨왔다. 1957년, 지금은 5호선 종로3가역 3번 출구인 곳에 이창배가 ‘청구고전성악학원靑邱古典聲樂學院’을 열었다. 우리나라에서 경서도창京西道唱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민요학원 1호였다.
이창배는 왜 민요학원의 이름을 청구靑邱라고 했을까? 청구는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중국에서 한반도를 그렇게 불렀다. 이창배의 원래 직업은 측량기사였다. 일제강점기, 삼천리 방방곡곡 안 간 곳이 없었다. 그런데 지역이 달라도 비슷하게 보이는 풍경이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푸른 언덕, 청구였다.
스승 이창배와 제자 황용주의 만남
1960년대, 청구고전성악학원의 활동은 대단했다. 서울에 원각사(을지로2가 4번지, 현재 을지로1가역 4번 출구 앞)가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0주년을 기념해 1958년 건축된 전통예술의 전당이었다. 1960년 11월 18일부터 이곳에서 ‘제1회 민요발표회’가 열렸다. 한국의 민요가 단순한 여흥餘興의 음악이 아닌, 감상하기에 충분한 예술가곡임을 알리는 자리였다.
1962년 4월 28일과 29일 이틀 동안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도 민요발표회가 있었다. 당시 한미재단이 후원하고 고전성악과 고전무용이 어우러지는 성대한 무대였다. 이런 자리에 빠지지 않는 노래가 있다. 바로 ‘백두산타령’으로, 이창배가 작사하고 작곡했다. 그날도 전 출연진이 이 노래를 부르며 시작했다. 이은미, 심명화 등 민요명창은 물론 훗날 여창가곡 국가무형문화재가 된 김월하1918~1996가 ‘관산융마’를 불렀다.
1960년대에는 이창배의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중심으로 우리 민요를 품격 있게 알리는 공연 무대가 자리를 잡았다. 이런 노력의 결과, 선배 소리꾼과 함께 이창배는 선소리산타령 예능보유자(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이창배가 경서도창과 선소리산타령을 위해 당시 얼마만큼 애를 썼는지는 안 봐도 보이는 듯하다.
1960년, 청구고전성악학원에 남자 제자 한 사람이 찾아왔다. 황용주는 당시 국악을 할 생각도, 민요(산타령)를 부를 생각도 전혀 하지 못했다. 그저 삶의 돌파구가 필요했을 뿐이다. 충남 공주 태생인 황용주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고향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상경해 동대문시장에서 우산 도매업장의 점원으로 일했다. 조부가 서당의 훈장이기도 한 황용주는 그냥 이렇게만 지낼 수는 없었다. 국립국악원(운니동 98번지)에서 시조 강습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한문에 능한 자신에게는 가장 맞는 취미라고 생각했다. 이주환 선생1909~1972에게 시조를 배우다가 스승 이창배를 만나게 됐다. 이창배는 민속악인(민요 전공)으로서는 일찍이 국립국악원과 인연이 있었다. 국립국악원에서 시조를 배우던 황용주는 이창배와 인연을 맺고 청구고전성악학원에서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 ‘유산가’를 배웠지만 워낙 어려웠다. 하지만 노래는 서툴렀어도 어려운 가사를 누구보다도 더 잘 받아들였다.
‘경복궁 지경다지기’를 향한 열의
우리네 인생에는 몇 번의 ‘기회’가 온다던가? 황용주에게 그런 기회는 바로 스승 이창배와의 만남이었다. 차분하고 진중한 황용주에게 이창배는 제안했다. 청구고전성악학원의 한 켠을 빌려줄 테니 먹고 자고 청소도 하면서 자신의 비서 역할을 해주길 원했다. 두 사람은 모두 한문에 능통했기에 통하는 점이 많았다. 두 사람은 《고문진보古文眞寶》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성실하고 꾸준한 사람을 누가 따라잡을 것인가? 이후 황용주는 이창배뿐 아니라 정득만1907~1992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황용주는 1972년 선소리산타령 전수장학생을 거쳐 1977년 이수자가 됐고, 1985년 선소리산타령 전수조교(준문화재)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2년 선소리산타령 보유자(국가무형문화재)가 됐다. 국악에 입문한 지 40여 년, 전수장학생이 된 지 꼭 20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이러한 황용주가 생전에 이루고자 한 꿈은 무엇일까? 1991년 6월 5일, 경복궁 복원을 위한 기공식이 있었다. 이때부터 황용주의 소원은 오직 하나였다. ‘경복궁 지경地境다지기’의 정립이었다. 지경다지기란, 집을 세우기 위해 집터를 닦는 과정에서 장정들이 땅을 파고 고르며 부르는 노래다. 이렇게 노래함으로써 공사에 탈이 없고 집이 잘 지어져 모두 다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노래다.
1997년 9월 11일,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지에서 복원되는 흥례문 기공식에서 황용주의 지도하에 ‘경복궁 지경다지기’가 재현됐다.
1998년 10월 14일부터 사흘간 밀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39회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서울시는 ‘경복궁 지경다지기’로 참가해 그해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이때부터 황용주는 해마다 ‘경복궁 지경다지기’에 힘을 기울였고, 남산골한옥마을에서 ‘경복궁 지경다지기’가 재현됐다. 고인이 눈을 감으며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광화문 경복궁에서, 남산골한옥마을에서 ‘경복궁 지경다지기’가 계속 이어지는 것 아니었을까?
글 윤중강_국악 평론가 | 사진 제공 윤중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