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성악연구회와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음악과 춤을 결합한 극장 공연의 효시
일제강점기의 ‘조선악’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국악’이다. 1938년 1월 3일 《조선일보》는 ‘조선악의 3대 진영’이라 해서 조선정악전습소, 조선성악연구회,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자세히 소개했다. 여기서 조선정악전습소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국악을 ‘정악’과 ‘민속악’으로 나눌 때, 조선정악전습소는 ‘정악’을 바탕으로 전문가뿐만 아니라 동호인을 규합한 단체였다. 오늘날 ‘민속악’이라 부르는 음악을 바탕으로 창립한 단체는 조선성악연구회와 조선음악무용연구회다. 당대 최고의 예술인이 모였으며 이들에 의해 조선악은 점차 극장 문화의 꽃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조선성악연구회 진주 촉석루 야유회
조선악, 극장 문화의 꽃을 피우다
조선성악연구회는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이 많았고 창극을 주로 공연했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충청도와 경기도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조선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민간 춤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 중심에는 당대 최고의 고수鼓手 한성준1874~1942이 있었다.
1926년 서울 정동에 경성방송국JODK이 건립되고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라디오방송을 시작한다.
라디오방송의 인기 프로그램에는 조선악이 흘러나왔다. 최다 출연자는 누구였을까? 한성준이었다.
판소리를 부르는 남녀 명창이 달라져도 북을 잡은 사람은 대체로 한성준이었다.
조선성악연구회에도 깊숙이 관계했던 한성준에게는 ‘또 다른 큰 꿈’이 있었다.
조선의 무용을 근대 극장을 통해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목표였다.
1937년 12월 28일 오후 6시, 인사동 천향원에서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순조선純朝鮮 고전적古典的 가무음악歌舞音樂을 향상, 발전시키고
이 땅의 정취를 실은 예술을 대중적으로 통속화시키는 것’이 그들의 실천 과제였다.
당시 조선성악연구회와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의사결정 과정은 사뭇 달랐다.
권력이 분리돼 명창 명인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 조선성악연구회였다면,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철저하게 한성준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경운정에 회관을 건립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해 나간다.
한성준은 무소불위의 존재로서 30명의 정회원을 이끌어갔다.
당시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조선에 40여 종의 춤이 있는데 앞으로 100개에 이르는 극장무용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자부했다.
1938년 4월 25일부터 열흘 동안 향토연예대회가 태평동 조선일보 대강당에서 열렸다.
여기서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고전무용대회로 큰 인기를 얻는다.
여기서 지금 한성준 계열의 춤으로 알려진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학무를 선보였다.
이것은 한성준과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레퍼토리 중 일부에 불과했다.
1998년 문화관광부의 9월 문화인물로 선정된 한성준
연극적, 음악적 요소 가미한 고전무용
당시에는 존재했으나 지금은 전승이 끊긴 춤 중에 ‘급제무及第舞’가 있다.
과거에 급제한 후 인물을 축하해 주는 삼일유가三日遊街를 춤으로 재현했다.
임금이 하사한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선배 관원에게 찾아가 인사를 하거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에서 벌이는 잔치를 무대화했다.
삼현육각 편성의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데 초연 당시 선배 관원은 한성준이, 신급제는 이정업1908~1974이 맡았다.
이정업은 줄타기와 해금의 명수이자 1960년대에는 주로 고수로 활약했다.
1938년 6월 23일, 조광회 주최의 조선음악무용연구회 공연이 부민관(현 서울시의회)에서 열렸다.
우리가 이날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마당 위의 농악이 무대화돼 처음 공연된 날이라는 데 있다.
농악은 조선 민간의 독특한 음악과 춤이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특별히 이 춤을 연구하고 연습해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다.
유량하고 질탕스러운 악무가 특징이자 매력이었다.
한성준이 이끄는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레퍼토리 중 ‘사호악유四皓樂遊’도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중국 고사에 나오는 네 명의 도인을 그린 상산사호도商山四皓圖를 춤으로 만들었다.
네 명의 젊은 여성(이수공·이화은·김주경·김청사)이 흰 눈썹과 수염을 단 채 바둑을 두거나 시를 읊는데,
이때 두 마리 검은 학(한성준·김효정)이 날아든다.
여기에 두 명의 동자(조효금·김재분)가 시중을 들고 있다. 이렇게 총 여덟 명이 출연하는 사호악유는
춤을 통해 이야기를 보는 듯한 황홀경을 경험하게 해줬으리라 짐작한다.
한성준과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춤에는 연극적 요소가 상당히 깃들어 있다.
한성준의 고전무용이 이러한 방향을 지향한 것은 그가 조선성악연구회와 교류하면서 창극과 같은 연극적 작품에 관여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성준의 고전무용은 이렇게 연극적 요소, 음악적 요소와 삼위일체를 이룬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활동은 1941년까지 이어졌다. 1940년 2월 27일, 일본 도쿄 공연에 앞서 그 레퍼토리를 부민관에서 공연했다.
이 공연이 한성준의 국내 마지막 공식 공연이다.
한성준은 아쉽게 사라졌으나 그의 문하에서 음악과 춤을 익힌 이들은 광복 이후 새롭게 활약하기 시작한다.
김재선, 김광채, 이정업, 이재원, 이충선, 지영희 등의 남성 악사가 한성준 문하에서 음악과 춤을 익힌 이들이다.
조선성악연구회는 그나마 건물이 보존돼 있지만 한성준이 이끌던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 위치는 알 수 있으니 서울시는 조선음악무용연구회가 있었다는 표지석은 세워야 하지 않을까?
일제강점기에 이 두 단체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과 같은 판소리와 창극, 음악과 춤을 이상적으로 결합한 고전무용은 존재하기 어려웠으리라.
글 윤중강_국악 평론가 | 사진 제공 윤중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