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마침내, 사랑해 볼 결심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를 것 같지만 산과 바다는 의외로 균질한 교집합을 가진다. 초록과 파랑으로 표현되지만 파란 산과 초록 바다가 있다. 산 위의 구름을 그린 그림과 바다의 파도를 그린 그림은 무척 비슷하다. 그리고 산과 바다에는 모두 흙이 있다. 산은 흙을 쌓아 올린 탑이고, 바다는 흙 위로 흐르는 물 같다. 산과 바다는 아주 많이 다르고, 무척 많이 닮은 남녀의 사랑이 향하는 방향 혹은 방식과 닮았다.
사랑이라는 상황
산 정상에서 추락한 남자의 변사체가 발견된다.
담당 형사 해준(박해일)은 남편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 않고 얼핏 웃음을 보이는 사망자의 아내 서래(탕웨이)를 용의자로 의심한다.
잠복해 서래를 관찰하는 해준의 수사는 점점 호기심 가득한 훔쳐보기로 변한다.
그리고 서래에 대한 의심보다 더 커진 관심은 형사로서의 중심을 흔든다.
살인사건이라는 커다란 이야기에 비해 〈헤어질 결심〉은 사실 서래가 진짜 살인자인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흐트러짐 없는 바를 정正자 같은 형사 해준과 비밀이 많은 여인 서래는 사건이 아닌 서로에 대한 감정으로 얽힌다.
형사로서는 서래를 의심하지만 남자로서는 서래를 지키고 싶은 해준의 마음처럼
관객도 자꾸 서래의 의심스러운 과거와 상관없이 현재, 그녀의 사랑이 진짜이기를 바라게 된다.
〈헤어질 결심〉은 굳이 메모하면서 볼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인공적 미장센을 회화처럼 나열했던 감독의 이전 작품들과 달리 〈헤어질 결심〉은 현란한 수사와 복잡한 이미지를 많이 내려놓고
특유의 잔혹함까지도 덜어내 눈을 질끈 감을 필요 없이 오롯이 인물과 인물 사이에 오가는 감정의 기류를 편안하게 느끼게 한다.
박찬욱 감독은 여전히 주인공들을 산과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의 풍광 속에 칼바람을 맞으며 서 있게 하지만
사랑이 시작되는 시점은 공간이 아닌 상황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랑이 오가는 많은 공간 속에 두 사람이 마침내 사랑할 결심을 하게 되는 상황을 촘촘하게 새긴다.
산에서 시작해 바다에서 끝나는 공간의 변화만큼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높이, 넓이, 그리고 깊이가 달라지는 변화 과정이 다채롭다.
바닷속으로 자라는 산
한국어로 소통이 쉽지 않은 여성과의 농도 짙은 소통 앞에서 서래라는 주인공은 〈헤어질 결심〉이 반드시 보여줘야 하는 개연성 그 자체다.
서래는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처럼 진심을 보일 듯 말 듯 해준과 관객의 애를 태운다.
직접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서래는 말이 아닌 표정과 호흡, 미간과 입술의 작은 변화를 통해 보여주면서 관객을 설득한다.
과거와 상관없이 이제는, 비로소, 마침내, 사랑해 보리라 결심한 두 남녀를 통해 〈헤어질 결심〉은
사랑을 끝내는 의미로서의 헤어짐이 아니라 사랑에 영원을 더하기 위한 독한 헤어짐의 방식을 보여준다.
불필요한 의미를 숨겨두지 않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파도가 치면 치는 대로 다 보여준다.
그래서 그 이면에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는 바람을 가질수록 관객은 헛헛해질 수 있다.
불균질한 요소가 툭 삐져나와 충돌과 파괴의 이미지를 구축했던 감독의 이전 작품들과 달리 〈헤어질 결심〉은 무척 친절하다.
그래서 불친절한 서사의 결핍으로 상상의 여백을 만들고 이미지의 과잉으로 관객을 매혹하는 박찬욱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관객에게는
다소 슴슴하게 다가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서래는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에 들어가 더 깊은 바닷속으로 침잠한다.
뒤늦게 나타난 해준은 바닷가를 뒤지다 결국 서래가 가라앉은 모래를 딛고 서지만 그녀의 흔적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가라앉아 버린 여자와 그 위를 딛고 선 남자는 같은 하늘 아래 있지만 도저히 만날 도리가 없다.
어쩌면 모래는 바닷속으로 자라는 거대한 산인지 모른다. 함께 사랑하지만 각기 다른 곳으로 자라나는 남녀의 사랑처럼 말이다.
글 최재훈 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