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30호 포스터
얼마 전 동네 책방에 들러 최은미 작가의 이름을 찾아 근작을 한 권 구매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로 발간된 《어제는 봄》이었다. 첫 장을 펼쳤고 중간에 덮을 수가 없어 내처 읽었다. 앞으로도 최은미라는 이름을 발견하면 나는 책을 사겠구나 생각했다. 이 작가가 포착하는 일상적인 대낮의 풍경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사랑하는 사람을 어루만지는 듯한 섬세한 문장은 또 얼마나 기막히게 좋은지. 이 평화가 흔들릴 거라는 조그만 암시에도 나는 덜덜 떨며 책을 읽었다. 최은미는 우리가 진짜 현실에서 마주하는 공포를 그린다. 그러니까 단지 소설 속의 일이 아니라, 몇 년 전의 내가 겪었을 혹은 몇 달 후에 내가 겪을 만한 일을 가장 섬뜩한 문장으로 옮긴다. 책을 읽어가며 나는 상황을 상상했다기보다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어제는 봄》 중에 인상적이었던 한 장면을 소개한다.
나는 소파에 구겨져 있는 윤지욱의 바지를 집어 윤소은한테로 내던진다. 소리 지른다. 거실이 니 놀이방이야? 인형들을 걷어찬다. 빈정댄다. 꼬투리를 잡는다. 그러다 변명하고, 내가 죽을까? 내가 죽으면 정신 차릴래? 위협한다. 인생 너무 뻔해! 예언한다. 윤소은이 내 말 폭탄을 뒤집어쓰고, 그 큰 눈에 겁을 집어먹고 떨면서, 굵은 눈물을 걷잡을 수 없이 뚝뚝 흘린다. 나는 니가 얼마나 좋은지. 나한테 타격을 입는 니가. 내 말 한마디에 베이고 마는 니가 얼마나 좋은지 나는!
최은미, 《어제는 봄》 부분
윤지욱은 주인공의 남편이고, 윤소은은 딸이다. 주인공 수진은 남편에겐 애정이 없으나 딸은 지극히 사랑한다. 그러나 딸에게 사랑을 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은 엄마는 딸을 두고 한 다짐들에 번번이 실패한다. 실패하는 정도가 아니다. 인용된 부분에서와 같이, 수진은 폭력적인 언행을 지속하다가 관계를 완전히 망쳐버릴지도 모른다. 수진은 딸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소은에게 솔직한 애정을 드러내는 일을 계속 미루어둘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애정을 보여주기는커녕 수진은 딸의 감정을 마음껏 휘두르고, 딸이 자신에게 느끼는 공포 앞에서 위안을 느끼기도 한다. 소은이 감당하고 있는 불안이 얼마나 처절한 것일지 생각하면 수진의 태도는 분명 문제적이다. 가족 간의 긴장만큼 일상에 치명적인 감정노동이 또 있을까 싶다. 내가 보기에 수진이 특별히 나쁜 엄마는 아니다. 어쩌면 많은 부모가 소설 속 수진처럼, 자신의 아이에게 부모의 감정을 감당할 것을 강요한다. 보편적이기 때문에 섬뜩한 이야기도 있는 것이다.
한 달 전이었다. 지금도 겨울이지만 한 달 전 역시 겨울이었다. 그날 나는 퇴근길에 어떤 여자의 만두를 훔쳐 먹었다. 그리고 한 달 내내 그 일을 잊지 못했다. 에이포 용지 두 장 분량으로 그 일을 쓰기까지 했다. 나는 왜 자꾸 현금이 필요해지는 걸까.
최은미, <이상한 이야기> 부분
<쓰다> 30호에 실린 최은미의 소설은 위와 같이 시작한다. 겨울, 주인공은 누군가의 만두를 훔친다. 그리고 곧 만두 주인과 마주친다. 그가 만두 주인과 만두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팽팽한 신경전을 보면서 독자는 주인공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고, 그가 저 민망한 상황에서 어서 벗어나기를 바라게 되기까지 한다. 최은미는 너무나도 사소해 보이는 에피소드를 통하여 가난이 인간의 감정과 태도를 얼마나 왜곡하는지 드러낸다. “나는 왜 자꾸 현금이 필요해지는 걸까.” 현금 쓸 일 많은 가난한 일상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요약하는 문장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이상한 이야기>는 짧은 소설이다. 이 짧은 이야기가 남기는 긴 여운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오래 생각했다. ‘만두’라는 글자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와 진한 음식 냄새가 주인공이 겪고 있는 오랜 허기를 자꾸 생각하게 했다. 속이 꽉 찬 만두, 맛있고 값싸고 쉽게 포만감을 주는 만두가 주인공의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앗아간 것인지 나는 자꾸 셈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나의 일처럼.
- 글 김잔디_웹진 [비유] 편집자
- 사진 제공 웹진 [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