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m 도로로 구성된 블록 구조에 6m 내부도로를 따라 줄지어 지어진 박공지붕의 신흥주택 단지.
2 대지 약 50평(165㎡), 건축면적 약 60평(200㎡)의 신흥주택.
서울의 주택을 뒤바꾼 세 가지 주택 유형이 있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뒤바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번째는 1930년대 도시한옥으로 현재 북촌에 잘 남아 있으며, 두 번째는 1970년대 아파트(단지)로 현재 강남 지역(영동지구)이 대표적으로 잘 남아 있다. 세 번째는 1980년대 다세대·다가구로 서울 전 지역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이 세 유형은 모두 정부가 주도적으로 도시 개발에 개입해 이루어졌다. 정부 주도로 대규모로 개발된 증산동 신흥주택 단지도 대표적 주택 유형 중 하나가 될 수 있었으나, 오래 살아남지 못하고 희소해졌다. 하지만 증산동 신흥주택은 변화의 기로에 선 시기의 주택 유형이며,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도시와 주택 문화가 잘 기록된 지표종이다.
‘증산동 30만 평 택지조성지대 원매자 많으나 거래 뜸’,
<매일경제> 1974. 10. 29
‘날개 돋친 전세’,
<매일경제> 1974. 10. 18
증산동 주택 단지는 서울시가 1972년부터 역촌지구로 개발하기 시작해 1974년 역촌추가지구로 30만 평의 논밭을 택지로 개발한 곳이며, 주택은 주로 1970년대 중후반에 지어졌다. 1970년대는 도시 개발과 함께 경제 상황, 사회생활양식이 크게 변화하는 시기였고, 주택은 그 중심에 있었다.
1962년 마포아파트를 시작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지어졌으나, 사람들은 주택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런 아파트의 당시 상황을 소설가 조정래는 <비탈진 음지>에서 “머리 위에서 불을 때고, 그 머리 위에서 또 불을 때고, 오줌똥을 싸고, 그 아래에서 밥을 먹고”라며 이상한 공간으로 묘사했다. 이런 이유로 아파트 단지와 함께 청량리 도시한옥, 증산동 단독주택 등이 함께 개발됐을 것이다. 이렇게 1970년대는 어떤 주택을 선택할 것인지 기로에 서 있었다.
3 증산동 신흥주택 단지의 난간과 담장 장식들.
주택에 대한 취향
증산동 신흥주택은 보통의 주택과 별반 다른 것 없이 보일 수 있지만, 1985년 건축법 개정으로 지어지기 시작한 (법적으로 단독주택에 속하는) 다가구와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다가구는 대체로 기존 주택을 철거하고 지어져 개별 필지의 난개발로 이루어진다. 반면 신흥주택 단지는 블록을 구성하는 10m 도로가에는 양쪽으로 플라타너스 나무를 심고, 도로에 면해 담장을 만들고, 그 안쪽으로 나무를 심고 마당을 만들었다. 다가구는 대체로 법이 허용한 최대치인 3층(지하층 제외)으로 개발하고, 방공호로 만들어진 지하층까지 주거공간으로 변용했다. 신흥주택은 박공지붕으로 된 2.5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가구는 옆집이나 도로와 간격이 거의 없고, 외벽에 매달린 외부 계단을 통해 각층과 옥상까지 기능적으로만 연결한다. 신흥주택은 지하층이 없고, 1층과 2층은 대문을 지나 공유된 마당에서 각각 바로 진입할 수 있는 독립적 구조를 띤다. 증산동 신흥주택의 특징은 무엇보다 담장과 난간의 장식에 함축되어 있다. 집집마다 다양한 장식으로 자신들의 집을 표현하고, 외부와 면하는 담장과 대문 등을 정성 들여 장식한다. 이에 비해 아파트나 다세대 등의 최근 주택들에서 외부 공간은 주택의 영역으로 인지되지 않기에 도시와의 접점은 버려진 곳에 가깝다. 이는 빠르고, 크게, 많이 짓는 것에만 맞춰져 대량으로 건설되고, 내부 공간만을 지향하는 폐쇄성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부 공간의 장식은 단순히 미학적 가치가 아니라 함께 사는 마을과 도시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지표다. 하지만 이런 가치도 평가받지 못한 채 하나둘 장식이 부서져나가고, 신흥주택은 다세대·다가구로 아파트로 빠르게 개발되며, 이젠 파괴의 지표종이 되었다.
- 글·사진 제공 정기황_건축학 박사, 사단법인 문화도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