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이나 스포츠 선수가 아닌데 삭발을 하면 서구인들은 스킨헤드를 먼저 떠올린다. 저항과 반항을 넘어선 불법과 폭력의 이미지다. 동양은 좀 다르다. 불교에서 삭발은 속세의 욕망과 단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불교 문화권이 아닌 나라에서 삭발의 의미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그들에게 우리 정치인들이 연이어 ‘바리캉 챌린지’를 하는 모습은 어떻게 보일까. 머리털과 함께 국격까지 밀리는 것은 아닐까.
삭발, 힘없는 자들의 마지막 보디랭귀지
황교안 대표의 파르라니 깎은 머리는 정작으로 고왔다. 두상도 예뻤다. 그래서 서러운 사람은 삭발을 몸의 언어로 썼던 약자들이다. 황 대표의 삭발에서는 비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삭발은 마치 화려한 뷔페의 주먹밥처럼 어울리지 못했다. 뷔페에 주먹밥이 있다 한들 5·18민주화운동의 지사들이 거리에서 허기를 달래던 그 절실한 맛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황 대표의 삭발에는 감동이 없었다.
삭발은 힘없는 자들의 마지막 보디랭귀지이다. 힘없는 자들이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으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할 때 내놓는 몸의 재물이다. 그들은 내 몸에서 바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을 희생하며 겨우 마이크를 잡을 기회를 얻는다. 그래서 KTX 여승무원이나 청소 노동자들이 삭발할 때 보는 사람도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느꼈다.
거대 야당이 약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 마뜩잖았던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황 대표의 유유자적한 삭발을 보며 한마디했다. 심 대표는 “과거 운동권 시절 삭발, 단식은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모욕했던 공안 검사들의 말이 생각났다”라고 말했다. 화려한 뷔페에 오른 5·18민주화운동 주먹밥을 보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황 대표는 어떤 고민을 거쳐 삭발을 했을까. ‘단식도 있고 삼보일배도 있는데 뭐가 좋을까, 그렇지 삭발이 좋겠다. 두상도 좋은데’ 정도로 그저 방법론적인 유용성만을 따져 골랐을 것 같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삭발로 울부짖었던 사회적 약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강남 8학군에서 어느 날 이사 온 학생이 농어촌 특별전형으로 서울대를 꿰차는 것을 보는 농어촌 학생들의 심정 아니었을까.
삭발 뒤 발언하고 있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삭발의 본래 의미
역사학자 전우용 선생이 지적했듯이 삭발은 일본 군국주의의 유산이다. 전 선생은 삭발 결의가 야쿠자의 관행에서 왔다고 설명했다. 심기일전해서 두목의 명을 충실히 따르겠다는 의미로 삭발을 했다는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 야쿠자의 삭발 결의 관행은 사무라이들의 ‘도게자’ 전통에서 왔다. 다이묘의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사무라이가 책임을 지고 절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삭발을 하고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삭발 관행이 우리 정치권에서 자리 잡게 된 것은 1987년 대선 때문이다. 당시 박찬종 의원이 양김의 후보 단일화를 주장하면서 삭발을 단행해 충격을 주었다. 일본의 전통에 비추어 이 삭발의 의미를 해석한다면 국민에게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함을 사죄하면서 꼭 이루겠다는 결기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우리에게 삭발은 고작 30년 조금 넘는 전통을 가진 셈이다.
자 그렇다면 이언주 의원에서 시작해 박인숙, 김숙향, 황교안, 김문수, 강효상, 이주영, 심재철, 차명진으로 이어지는 ‘바리캉 챌린지’에 이런 결기가 남아 있을까? 각자 선 곳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풍경이겠지만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에게는 정치 희화화의 단면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삭발의 비장한 의미는 이미 사라지고 나경원 원내대표가 언제 삭발을 할지에 대한 호기심만 남았다.
사무라이에게 삭발의 본래 의미는 사죄였다. 황교안 대표를 비롯해 정치인들의 삭발에서도 그런 사죄의 의미를 읽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민생을 돌보지 못하고 극한 대립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사죄일까, 아니면 더 가열차게 투쟁해서 조국 장관을 해임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일까. 삭발을 해도 머리는 자란다. 머리가 자라서 바람이 날릴 때가 되면 그들의 사죄도 그렇게 날아갈 것이다.
- 글 고재열_시사IN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