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욱경 자화상 앞에서.
“경자 언니, 설거지하다.”
언니네 집 여의도 시범아파트 주방 냉장고에 이런 쪽지를 붙여놓았던 거 기억나시죠? 언니보다 실제로 여덟 살이나 적은 저에게 언니라고 부른 건 ‘꾸지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겐 언니네 집 가장 큰 방이 온통 그림들로 가득 찬 것, 그리는 중이거나 그리다 말거나 완성한 그림들로 발 딛을 틈이 없던 공간을 보고 저도 모르게 선택한 언니에 대한 나름의 배려였다고 생각합니다. 언니에게 그림을 그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모아드리고 싶은 마음. 사실 설거지야 씻는 행위이니 그것 자체로 ‘힐링’일지 모릅니다. 혹시 언니의 작업도 ‘씻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즈음 언니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산들에 신들려 있었는데 산으로부터 위로를 얻으려 하신 건 아닐는지요.
언니는 우리 생명의 본질에 대해, 삶에 대해 가지가지의 냉정하고 냉혹한 해설이나 정의를 하는 학문,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 생명과 생명 사이에 대한 너무 많은 질서라는 규제에 대해 넌더리를 내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1970년대 후반이었던가요? 서울 시내의 유명한 호텔에서 옷차림 때문에 출입을 거부당한 적이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도 낭비가 심한, 부질없는 교수회의에서 슬며시, 홀연히 나와 버린 적도 있었다고, 의아해하는 시선들을 향해, 집에 강아지가 기다린다고 했었나요? 강아지가 아프다고 했던가요?
언니는 말로 표현되기 이전의 것과 교감하고 그 교감된 것들을 색채로 표현하는 걸 사랑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고 귀로 들을 수 없는 존재들과의 교감. 언니의 그림 앞에 서서 곧장 돌아설 수 없게 하는 건 진실, 진정, 순수…… 그런 것들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여간 저에겐 그랬습니다. 그 힘에 이끌려 저는 언니의 시범아파트 집으로 찾아가고 언니와 이야기하고 충고를 듣고 언니를 느끼곤 했습니다.
요즘도 어쩌다가 여의도의 시범아파트 정문을 지나갈 일이 생깁니다. 그곳을 지나며 제가 어떻게 언니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1978년 미국에서 돌아와 오래지 않아 시범아파트에 드셨던 것 같아요. 시범아파트는 여의도 개발정책의 하나로 1971년에 입주가 시작된 곳이지요. 저는 서울 서쪽의 변두리에 살고 있어서 시범아파트로 가기가 수월했습니다. 저에겐 제 인생이 어떤 모양인지,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예감도 계획도 없을 때였습니다. 네 살 난 아이를 데리고 언니네 집에 가면 언니는 아이를 예뻐하면서도 저를 날카롭게 꾸짖었습니다.
“지금 너는 너처럼 살고 있지 않아!”
이 말을 들으며 저는 몸과 마음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는 걸 느끼곤 했습니다. 잿더미처럼 주저앉는 절망감, 열패감 같은 것에 함몰되곤 했습니다.
“너는 왜 너의 본질로부터 도망가느냐!”
“네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흥미롭다!”
이런 내용의 말을 여러 번 해주셨습니다. 내가 나로부터 도망간다는 말! 무섭고도 슬펐습니다. 저의 비굴함과 열등감이 낳은 기회주의적 삶의 방식이 창피해서 언니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싶었습니다. 언니의 그림들 앞에서 그 강렬한 색채로 들어가면 거기 붉은 심장과 숨을 모아서 내뱉는 폐가 보였습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생명, 형체도 공간도 시간도 없는 사랑이기도 했습니다.
언니. 지금 제 곁에 와 계신 게 느껴집니다. 여전히 따뜻하고 부드럽고 강렬합니다.
언니의 생명이 지구의 시공간으로부터 중력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혹시 아버님이 작고하신 뒤부터가 아니었을까요?
“아버지를 매장하고 왔는데…… 집에 와서 아버지한테, 아버지 장례 잘 치렀어요, 하려는데 아버지가 안 계신 거야…… 아버지한테 말해야 하는데…….”
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때부터 조금씩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밤, 시범아파트의 어린이 놀이터에서 저에게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 일기장을 맡으라고 했습니다. 순간 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불길함이 덮쳤고,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1985년 7월 중순에 언니는 아버지를 만나러 서둘러 떠나셨습니다. 거침없는 혼령이 되셔서 내 머리 위를 한동안 휘휘 돌아주시던 그 순간의 환희를 잊지 않았습니다.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언니의 회고전이 열렸습니다. 저는 마지막 작품 앞에 섰을 때, 깨달았습니다. 언니는 지구 삶에 화해 불가능한 염증(厭症)을 느끼셨다는 것…….
언니, 제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해주신 거, 여전히 제 삶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지금 언니가 예감한 저로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언니, 안녕!
- 글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