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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35귓가에 은은한 러시아 자작나무 냄새
에스더 유의 바이올린이 날렵하게 음을 뽑아낸다.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35는 당대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드 아우어가 악보를 받고 “연주 불가!”라며 초연 연주를 거부했다는 곡이다. 듣기에는 쉬운 멜로디지만 정확하게 연주하기는 매우 어렵다. 지금도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들 중에는 이 곡을 연주하다 좋지않은 인상을 남긴 연주자들이 많다.

차이콥스키가 작곡한 단 하나의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는 지난 10월 1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에사 페카 살로넨이 지휘한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35를 협연했다. 그는 바늘 끝같이 예리하고 정확한 음정과 명료한 멜로디 라인, 다채로운 변화를 통해 명연주를 들려줬다. 특히 느린 패시지나 빠른 패시지에서도 지휘자 에사 페카 살로넨과 궁합이 잘 맞았다. 핀란드 출신으로 이제 60세가 된 관록의 에사 페카 살로넨은 섬세하게 곡을 이끌었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에스더 유를 푸근하게 받쳐주면서 건강한 톤 컬러로 곡의 밑바탕인 러시아의 자작나무 냄새를 은은하게 들려주었다.
1878년 차이콥스키는 스위스의 제네바 호숫가에 자리한 리조트 클라렌스에서 이 곡을 작곡했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제자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절망적으로 이혼한 후 요양하던 차였다. 이곳에서 차이콥스키는 베를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셉 요아힘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던 그의 작곡 제자 요시프 코텍을 만난다. 두 사람은 함께 지내며 차이콥스키는 피아노를, 요시프 코텍은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그들은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같은 작품을 편곡하고 사랑을 나눴다. 제목은 교향곡이지만 실제로는 바이올린 협주곡인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은 신선함, 가벼움, 짜릿하고 자극적인 리듬, 아름답고 빼어난 화성적 멜로디로 차이콥스키를 사로잡았고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에도 자극을 주었다.
차이콥스키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2악장을 완성하며 동생 아나톨리에게 편지를 썼다. “내 연주곡 때문에 요시프가 얼마나 바쁜지 몰라. 난 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그의 연주는 또 얼마나 훌륭한지….” 차이콥스키는 사실 이 협주곡을 요시프 코텍에게 헌정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동성애가 밝혀질 것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결국 그에게 헌정하지 않았다. 1881년 차이콥스키는 코텍이 이 곡의 연주를 거부하자 그와 헤어졌다. 코텍은 이 곡이 청중들에게 좋은 반응을 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고 자신의 커리어에도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 여겼다. 오늘날 이 곡이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차이콥스키는 이 곡 대신 소품인 <왈츠-스케르초>를 코텍에게 헌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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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감동의 1악장

차이콥스키는 이 곡의 초연을 명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드 아우어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아우어가 거절해 결국 새로운 바이올리니스트를 찾아야 했다. 한데 아우어의 이야기는 차이콥스키와 달랐다. 차이콥스키가 이 곡을 아우어에게 헌정했는데, 인지도 없는 젊은 작곡가가 완성된 악보를 보여주지도 않고 초연 전에 헌정한다고 밝혀 기분이 상했고, 그 때문에 연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한 아우어의 애정은 차이콥스키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우어는 자신이 “연주 불가”라고 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며 몇몇 패시지가 바이올린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 것이 와전되었다고 했다. 차이콥스키는곡을 헌정한 아우어가 연주를 자꾸 미루자 결국 수정을 거쳐 바이올리니스트 아돌프 브로드스키에게 두 번째 버전을 헌정했다. 브로드스키는 1881년 12월 4일 빈에서 이 작품을 초연했다. 아우어는 차이콥스키가 죽기 전에 그에게 그 일에 대해 사과했고 차이콥스키도 용서해주었다고 전했다.
차이콥스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인 이 곡은 그의 피아노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1악장이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차이콥스키의 나라 러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의 청중들 모두가 장렬하게 연주되는 1악장이 끝나면 뜨거운 박수를 치고 만다. 에사 페카 살로넨이 지휘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에스더 유의 이번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곡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청중들도 깜짝 놀라 박수를 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곡은 1악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서정적이고 느린 2악장을 거쳐 아타카로 넘어가 러시아 댄스 같은 3악장이 펼쳐진다.
이 아름다운 바이올린 협주곡은 영화에서도 만날 수 있다. 러시아의 가짜 볼쇼이 오케스트라가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연주한다는 만화 같은 이야기를 코믹하게 담은 프랑스 영화 <더 콘서트>(2009)의 마지막 장면, 연주는 기교냐 감정이냐를 다룬 중국 영화 <투게더>(2002)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 곡은 큰 감동을 안겨준다.

글 장일범 음악평론가, 팟캐스트 ‘장일범의 유쾌한 클래식’ 진행자
그림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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